헌금함 앞에서 돌아보는 마음
각 사람은 마음으로 이미 정한 만큼 드리십시오. 억지로 내거나 아까워하며 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드리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 (쉬운 성경)
주일 아침 예배당 입구에 놓인 헌금함 앞에 서면,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조용히 봉투를 꺼내며, 우리는 잠시 멈춰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마음속에서는 계산기가 하나 켜집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요.’, ‘이만큼 드리면, 이번 달은 별 탈 없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언어를 빌리고 있지만, 그 계산의 뿌리에는 종종 믿음보다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우리의 돈이 필요하신 적이 없으셨다는 점입니다.
하늘의 질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 단위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유통되는 것은 액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헌금은 그 마음의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행위일 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거대한 조직의 최고경영자처럼 상상합니다.
헌금을 일종의 투자나 보험처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근히 이런 기대가 생깁니다.
‘제가 드렸으니 더 좋은 것을 주시겠지요.’, ‘적게 드리면, 혹시 손해가 있지는 않을까요.’
하지만 하나님과 헌금 사이에는 거래 관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헌금을 많이 드린다고 해서 복이 승인되는 것도 아니고, 적게 드린다고 해서 은혜가 중단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을 설명하며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 카리스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들은 헌금을 ‘얼마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로 다시 보게 만듭니다.
코이노니아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대입니다.
누군가의 필요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짊어져야 할 우리의 몫이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코이노니아가 작동하는 공동체에서는 “왜 저 사람이 저렇게 어려운가”를 따지기보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함께 감당해야 하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디아코니아는 마땅히 감당하는 섬김을 의미합니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칭찬을 받기 위한 행동도 아니고, 선의를 과시하기 위한 선택도 아닙니다.
그저 내가 공동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맡게 되는 책임입니다.
그리고 카리스는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입니다.
헌금이 의무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종종 이 지점을 놓칩니다.
카리스의 관점에서 보면, 헌금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드리는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에 대한 뒤늦은 감사에 가깝습니다.
이 세 단어가 함께 놓일 때, 헌금은 거래도, 부담도, 계산도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 내가 여전히 연결되어 있고, 섬김의 자리에 아직 서 있으며, 은혜를 은혜로 알아보는 눈을 잃지 않았다는 조용한 신앙의 고백이 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헌금은 지출이 아니라 순환입니다.
몸에 피가 돌지 않으면 생명이 유지될 수 없듯, 나눔이 멈춘 신앙은 서서히 호흡을 잃습니다.
헌금은 액수를 세는 행위가 아니라, 신앙이 아직 움직이고 있는지를 가만히 확인하는 맥박과 같습니다.
복음서에는 헌금함 앞에서 벌어진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액수를 넣었고, 헌금함은 꽤 요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한 가난한 과부에게 머무십니다.
그 여인이 넣은 것은 렙돈 두 개,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거의 의미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장 큰 헌금이라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여인은 남는 것을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의지할 마지막 여지를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들은 액수 때문이 아니라 거짓된 태도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전부를 드리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체면과 평가를 헌금함에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헌금은 드러내는 신앙이 아니라, 숨겨진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정직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아주 조용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배고픈 이를 향해 “평안하십시오”라고 말해 주면서, 정작 그의 빈 손을 외면한다면, 그의 믿음은 마음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말에만 남아 있는 것일까요.
요한 역시 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재물을 가지고도 이웃의 궁핍함을 외면한다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헌금은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쓰이기 위한 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흘러가야 합니다.
누군가의 식탁 위에 빵이 놓이고, 누군가의 손에 책 한 권이 들릴 때, 헌금은 그제야 숫자가 아니라 생명이 됩니다.
헌금을 교회의 권한으로만 생각할 때,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헌금은 성도 모두가 함께 책임지는 공동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 흐름이 투명한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성도들이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살필 때 헌금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억지로 내는 부담이 아니라, 기쁨으로 참여하는 공공의 신앙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헌금은 우리 삶을 가장 강하게 지배하는 우상, 곧 돈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연습입니다.
손을 꽉 쥐고 있으면, 다른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손을 펴기 시작할 때, 그 빈자리에 계산할 수 없는 평안이 찾아옵니다.
주일, 헌금함 앞에 들고 있는 그 봉투는 공로를 증명하는 서류가 아닙니다.
“하나님, 당신이면 충분합니다”라는 아주 조용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봉투의 두께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 봉투를 쥔 손에 담긴 진심을 보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