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용서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 사이

by 한자루





“이쯤이면 용서할 때도 됐지 않아?”
“그래도 사과는 했잖아.”
“그 정도로 계속 화낼 일이야?”

이런 말은, 겉보기엔 조언 같지만 실제로는 침묵의 명령이다.
말을 꺼낸 사람은 위로의 마음일 수도 있고,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피해자는 또 한 번의 심리적 방 안에 갇힌다.

“왜 그 기준을 당신이 정하나요?”
이 질문은 늘 늦게 도착한다. 이미 용서를 강요당한 뒤에야, 이미 “너무 오래 끌었다”는 말까지 들은 후에야, 피해자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걸까?’

사과가 끝나면, 사람들은 피해자의 역할을 기대하기 시작한다.
받아들이거나, 용서하거나, 잊거나.

그 어느 것도 택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묻는다.
“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
이 질문은 조용하지만 단호하다. 그리고 그 순간, 피해자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다.
‘감정을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재규정된다.

우리는 자주 말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자.”, “그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정작, 그 입장에서 말하거나 행동하는 피해자는 곧 비난의 대상이 된다.

피해자가 분노하면, “너무 감정적이야.” 거절하면, “왜 이렇게 독하게 구는 거야.” 잊지 못하면, “언제까지 끌 거야?”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은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말로는 피해자를 지지하지만, 실제로는 회복의 방향을 통제하고 있다는 증거다.

용서는 선택이다. 결코 의무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선택의 권리를 피해자에게 온전히 주지 않는다.
대신 사회는 말한다.
“보상도 받았잖아.”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책도 내고, 인터뷰도 하고…”

이 말들은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된다.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
그건 조용한 종결 요청이고, 또 다른 침묵 강요다.

2차 가해는 때로는 욕설보다 부드러운 말로, 조언처럼 들리고 상식처럼 가장한 언어로 다가온다.

“너만 힘든 거 아냐.”, “그때는 그럴 수도 있었잖아.”, “지금은 좀 괜찮잖아.”

이 말들은 모두, 피해자에게 ‘조용한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조용함 속에서, 피해자는 또다시 고립된다.


우리는 회복을 말한다.
하지만 그 회복의 방식은 너무 자주 ‘용서’ 하나로 고정된다.
마치 용서하지 않으면 회복도 없다는 듯이.

그러나 진짜 회복은 말할 수 있는 환경, 분노할 수 있는 권리, 기억을 잊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존중에서 시작된다.

누군가는 잊고 싶어할 것이다. 누군가는 끝까지 싸우고 싶어할 것이다. 누군가는 아직 그 모든 선택조차 힘겨운 시간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모두가 옳다. 그 모두가 존중받아야 한다.

용서할 수 있느냐보다,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향해야 할 회복의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