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페론 부부
출생 : 1895년(1893년) 10월 8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로보스
국적 : 아르헨티나
사망 : 1974년 7월 1일 (향년 78세)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올리보스
재임기간 : 제29대 대통령 1946년 6월 4일 ~ 1955년 9월 21일
제39대 대통령 1973년 10월 12일 ~ 1974년 7월 1일
경력 : 아르헨티나 부통령
정의당 대표
아르헨티나 전쟁부장관
아르헨티나 노동사회복지부장관
배우자 : 아우렐리아 티손(1929년 결혼; 1938년 사별)
에바 페론(1945년 결혼; 1952년 사별)
이사벨 페론(1961년 결혼)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초원, 팜파스의 흙먼지 속에서 자란 소년 후안은 일찌감치 깨달았다.
이 나라에서 출세하는 가장 빠른 길은 책도, 시장도 아니라 군복이라는 사실을.
그는 사관학교에 입학해 전형적인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걸었지만, 그의 관심은 전술보다 관중의 반응에 가까웠다.
유럽 파견 중 그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곳에서 그는 정치의 불편한 진실 하나를 배웠다. 대중을 지배하는 것은 총칼이 아니라 황홀경이라는 것.
질서 있는 군대에 열광하는 군중을 결합하면, 권력은 제도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실.
페론은 장군이었지만, 속은 철저히 연출가였다. 국가는 행정 단위가 아니라, 무대가 될 수 있었다.
귀국한 페론은 즉시 자신만의 극장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모두가 기피하던 '노동복지국'이라는 초라한 사무실을 자신의 분장실로 삼았다.
그곳에서 그는 먼지투성이 노동자들의 손을 잡으며 임금을 올리고 휴가를 약속하는 '희망의 대본'을 썼다.
군화 소리 대신 노동자들의 환호성이 광장을 채우기 시작했을 때, 페론은 직감했다.
무대는 완성되었고, 이제 자신과 함께 조명을 나누어 쓸 '주연 여배우'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1944년, 지진 피해 돕기 자선 행사장에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만난다.
바로 삼류 라디오 배우 에바 두아르테. 훗날 ‘에비타’라 불릴 여자였다.
이 조합은 완벽했다. 후안은 강한 아버지, 에비타는 눈물 흘리는 성녀.
그녀는 가난한 이들의 손을 잡고 울었고, 그는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정치는 설명이 아니라 서사가 되었고, 정책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의 동선으로 배치되었다.
풍자의 정점은 여기였다.
에비타는 프랑스 명품 디올 드레스를 입고,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채 발코니에 서서 외쳤다.
“나의 사랑하는 탈의자들이여(셔츠조차 입지 못했던 가난한 노동자들이여)!”
모순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그녀의 보석을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가 흘리는 계산된 눈물에 반응했다.
정치는 이 순간부터 제도가 아니라 국가 단위의 종교 의식이 되었다.
페론의 정치 철학이었던 유스티시아리소(Justicialismo)는 듣기만 해도 달콤했다.
자본주의의 탐욕도 싫고, 공산주의의 폭력도 싫다는 이들에게 그는 말했다.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간다.”
이것이 훗날 페론주의라 불릴 감정의 정체였다.
이념이라기보다는 정서, 정책이라기보다는 관계.
국내에서는 돈을 찍어 임금을 올리고 복지를 확대했다.
당장은 축제였다.
하지만 곳간이 비어가는 소리는 에비타의 연설 박수에 묻혔다.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소련 사이를 오가며 ‘아르헨티나는 특별하다’는 자존심을 키웠다.
문제는 자존심이 외환을 대신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페론주의는 이렇게 작동했다.
국가는 보호자이고, 지도자는 목소리이며, 국민은 박수로 응답한다.
반대는 토론이 아니라 배신이 되었고, 비판은 의견이 아니라 모욕이 되었다.
에비타가 서른셋의 나이로 요절했을 때, 아르헨티나는 집단 최면에 빠졌다.
그녀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국가적 성물처럼 떠돌았다.
페론은 아내의 죽음마저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눈물은 영원하지 않았다.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으로 무너졌고, 1955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관객은 등을 돌렸고, 무대 장치는 철거되었다.
후안 페론은 하루아침에 주연 배우에서 퇴출된 망명객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망명은 초라하지 않았다.
파나마, 도미니카, 베네수엘라, 스페인. 그는 세계를 떠돌며 여전히 ‘전직 대통령’이 아니라 ‘대기 중인 왕’처럼 행동했다.
편지를 보냈고, 지지자를 키웠고, 조국의 정치를 원격 조종했다. 망명지에서도 그는 연출가였다.
아르헨티나 내부의 혼란을 바라보며 속으로 확신했을 것이다.
“봐라. 내가 없으니 연극이 엉망이 되었지.”
실제로 그가 떠난 아르헨티나는 안정되지 못했다.
군부와 민간 정권이 교대로 무너졌고, 정치는 방향을 잃었으며, 사람들은 점점 ‘그래도 페론 때가 나았다.’는 위험한 향수에 젖어 들었다.
이때부터 페론은 정치인이 아니라 전설이 되었다.
부재가 신화를 만들었고, 망명은 그의 이미지를 정화했다.
1973년. 열여덟 해 만에 페론은 귀환한다. 노쇠한 몸, 그러나 여전히 요란한 조명.
공항은 인파로 뒤덮였고, 그의 이름은 다시 광장을 울렸다.
그러나 이 귀환은 승리의 귀환이 아니라, 이미 끝난 연극의 앙코르 공연이었다.
그는 늙었고, 시대는 변했으며, 그가 떠난 사이 세상은 훨씬 더 잔인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내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세 번째 부인 이사벨을 부통령으로 세우며 권력을 가족 서사로 연장하려 했다.
무대에는 새 배우가 필요했지만, 그는 여전히 같은 캐스팅을 고집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노년의 페론은 더 이상 연출하지 못했고, 이사벨은 감당할 수 없는 배역을 맡았다.
정치는 붕괴했고, 폭력은 일상이 되었으며, 아르헨티나는 곧 군부 독재라는 가장 잔혹한 장르로 넘어갔다.
페론은 1974년 사망한다.
그의 마지막 장면은 박수도 야유도 아닌 불길한 침묵이었다.
후안 페론은 두 번의 기회를 가졌다.
하나는 절정에서 떠날 기회, 다른 하나는 전설로 남을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둘 다 거부했다.
그는 무대 뒤로 내려가는 대신 끝난 연극을 다시 올리려 했고, 그 선택은 국가 전체를 무대 붕괴에 휘말리게 했다.
왕은 떠났지만 극장은 남았다.
그리고 그 극장은 지금도 아르헨티나 정치의 무의식 속에서 조용히 불을 밝히고 있다.
후안 도밍고 페론과 에바 페론은 떠났지만,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그들이 만든 극장에서 퇴장하지 못하고 있다.
선거철마다 정치인들은 에비타의 사진을 꺼내 들고, 대중은 ‘공짜 점심’의 향수에 흔들린다.
페론 부부는 틀리지 않았다.
정치는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이다.
다만 그들은 마음을 움직이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그 마음이 발 딛고 서야 할 현실이라는 바닥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후안과 에바 페론.
그들은 정치를 하나의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린 천재적인 연출가들이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던 노동자들을 무대 위로 불러냈지만, 동시에 그들을 '자립하는 시민'이 아닌 '환호하는 관객'으로 가두어버렸다.
"박수칠 때 떠나라." 이 진부한 격언은 이번에도 페론에게 가장 뼈아픈 교훈으로 남는다.
박수 소리에 취해 출구를 찾지 못한 배우는 결국 무대 위에서 추하게 늙어갈 뿐이다.
이제 조명이 꺼진 아르헨티나의 광장에는 여전히 누군가가 묻는다.
"우리는 감동적인 연극을 원했는가, 아니면 살 만한 세상을 원했는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총과 탱크가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눈물과 박수, 그리고 너무 완벽하게 연출된 무대일지도...
서른 명의 왕을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서른 명의 왕이 되고 싶었던 사람들을.
그들은 모두 비슷했다.
첫 등장은 늘 초라했고, 중반부에는 감동이 있었으며, 후반부로 갈수록 자기 대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를 하기 시작했다.
“이건 원래 이런 장면이 아니었는데요. 관객들이 이걸 원하실 것 같아서요.”
“제가 아니면 이 극장은 무너집니다.”
정치를 위험하게 만드는 건 악당이 아니라 주연병이다.
한 번 박수를 받으면 그 박수가 이유라고 믿게 되고, 두 번 박수를 받으면 그 박수가 권리라고 착각하며, 세 번 박수를 받으면 이제 관객이 조용한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부터 국민은 시민이 아니라 리액션이 부족한 관객이 된다.
이 연작에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나라를 사랑했다.
문제는 그 사랑이 오래되면서 점점 집착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내가 키운 나라다.”
“내가 없으면 얘는 안 돌아간다.”
“조금만 더 하면 완성된다.”
그래서 그들은 떠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떠나기엔 너무 많은 설정을 쌓아버렸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왕보다 더 위험한 존재는 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그땐 시원했잖아”라는 기억, “그때는 누군가 대신 싸워줬잖아”라는 감정, 그리고 “다음에도 이런 사람이 또 나오면 좋겠다”는 위험한 기대였다.
이제 서른 편의 연극이 막을 내렸다. 커튼콜도 끝났고, 꽃다발도 다 던졌다.
하지만 정치라는 무대는 항상 다음 공연을 준비 중이다.
새로운 배우는 조금 더 세련된 말투로, 조금 더 정교한 연출로, 조금 더 우리 편인 척하며 다시 등장할 것이다.
그때 이 연작이 답을 주지 못해도 괜찮다.
다만 한 가지는 남겼으면 좋겠다.
박수칠 준비보다, 출구를 확인하는 습관.
그것만 있다면 다음 왕은 조금 더 일찍 무대에서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른 편의 긴 연극을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객석의 불을 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