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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형제, 자매님이라는 정체성

왕 같은 제사장으로써

by 한자루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 9절



프랑스 파리의 뒷골목 카페.

철학자 사르트르가 앉아 있던 작은 테이블 위에는 진한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선택할 자유를 가졌지만, 동시에 그 자유가 주는 불안과 책임도 함께 짊어집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교회 안에 머무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 삶 전체로 확장되는 실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주일, 예배와 찬양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느낍니다.

그러나 월요일,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가면 그 확신은 점차 희미해집니다.

출근길, 뉴스, 광고, 사람들의 말 속에서 우리는 또다시 묻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주일과 월요일 사이의 간극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질문입니다.


당시 로마의 가치 체계에서 가족은 혈통, 권력, 재산을 보존하는 도구였기에, 계급이 분명했고, 노예는 인격이 아니라 재산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초기 교회 안에서는 노예와 자유인, 귀족과 평민이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같은 식탁에 앉고, 서로를 형제와 자매라 불렀습니다.

현대는 대체로 평등한 인격을 보장받는 사회이기에 형제, 자매님이라는 말이 그다지 감동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로마시대 노예들에게 이런 표현은 단지 파격적인 행위가 아니라, 감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노예들이 '형제, 자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고, 그 안에 담긴 복음의 위력은 세상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것이었을 겁니다.

세상 질서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관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정체성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도 그렇습니다. 세상이 붙인 이름을 벗고, 하나님이 부르신 이름 속에 사는 것.

그런데 문제는 이 이름이 세상 속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뉴스와 광고 속에서 우리는 ‘더 벌어라’, ‘더 가져라’, ‘너 자신을 증명해라’라는 목소리에 더 많이 노출됩니다.

그러다보면 주일에 들은 말씀의 울림이 월요일 오후쯤이면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둘로 쪼개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빛은 세상 바깥에서가 아니라, 그 한가운데서 비춥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고립 속에서 지켜내는 깃발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퍼지는 향기입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가 끝나고 성경책을 덮는 순간, 다시 세상의 공기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출근길 버스에서, 아이를 등교시키는 길에서, 혹은 시장의 분주한 소리 속에서, 신앙은 갑자기 ‘교회 안의 언어’가 아니라 ‘세상 속의 선택’이 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자리에서 우리는 곧 질문을 받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
이 질문은 때로는 진심 어린 호기심이지만, 때로는 은근한 조롱이고, 더러는 노골적인 거부감입니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인들은 비슷한 상황을 겪었습니다.

신약성서 속의 교회는 ‘믿음’과 ‘세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그 도시는 상업과 문화가 발달했지만 동시에 우상 숭배와 사치가 일상화된 곳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질문을 던져야 했습니다.

바울은 단호했습니다.

“너희는 값으로 산 자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이 말은 단순히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소속의 선언’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어떤 틀에 맞추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말합니다.


인문학적으로 보아도, 정체성이란 고정된 표지판이 아니라 계속해서 선택해야 하는 길입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를 ‘액체 근대’라 불렀습니다.

형태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개인은 안정된 자리를 잡기보다 늘 부유하는 상태에 놓입니다.

이런 시대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불안과 함께 옵니다.

신앙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문제는 세상이 제안하는 ‘정체성의 표식’들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직업, 성취, 외모, 재산, 팔로워 수까지 모든 것이 나를 정의하려고 달려듭니다.

그 안에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의를 붙잡으려 하지만, 그 정의는 보이지도, 즉각적인 이익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란을 느낍니다.

성경은 이 혼란을 감추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거류민과 나그네’ 즉, 완전히 뿌리내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나그네는 잠시 머무는 사람이기에, 그곳의 문화를 온전히 흡수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불편하고, 때로는 외롭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방향을 압니다. 목적지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현대인을 ‘인정투쟁의 존재’라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를 타인의 인정 속에서 확인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도 직장에서 인정받고, 사회 속에서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우리의 존재 근거를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에 둡니다.

예수님이 광야 시험에서 사탄에게 거절한 것도, 바로 이 인정 욕구를 잘라내는 사건이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유혹은, 오늘날로 치면 “네가 진짜 믿음이 있다면, 세상에서 성공으로 증명해 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등지고 살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신앙인은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성역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걷는 사람입니다.
그 바람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방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뿌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 말씀은 세상을 떠나라는 명령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또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빛들로 나타나기를…”
빛은 어둠 속에서만 빛납니다.

빛이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어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본래의 성질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체성’이란 완벽한 방어막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빛의 성질’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진실하게 말하며, 용서와 자비를 선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유태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존엄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를 “의미”에서 찾았습니다.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이라는 정체성입니다.

문제는 그 의미를 ‘주일의 설교’에만 두지 않고, ‘월요일의 선택’ 속에 심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하루의 선택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거창한 전략이 아니라, 작은 선택의 반복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말할 기회를 외면하고,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농담에 웃지 않으며, 양심에 걸리는 이익을 조용히 거절하는 일.

이런 행동들은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일상 속 작은 선택들이 모여 세상 한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지를 새겨가는 과정입니다.


신약성서는 우리에게 완벽함보다 ‘끝까지 견디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히브리서 10장은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고, 서로를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지 말자.”
정체성은 혼자 지키기 어렵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 표지를 서로 확인해 주는 자리입니다.

주일의 찬양과 기도가 월요일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되는 곳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계속 물을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그때, 우리의 대답이 꼭 말로만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하루가,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선택이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 속에서, 세상은 당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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