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0. 왜 내 기도는 기각되는가

기도, 인간이 멈추어 서는 자리에서

by 한자루
이르시되 아버지여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복음 22장 42절




누구나 한 번쯤은 하늘을 올려다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길을 잃었을 때, 억울할 때, 설명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위를 바라봅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인간은 의미를 잃을 때 절망하고, 의미를 되찾을 때 살아난다.”고 말했습니다.
기도는 삶의 복잡한 결을 잠시 멈추고, “나는 왜 여기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으로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기도가 ‘마음의 명상’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기도는 단순한 자기 위안이 아닙니다.
기도는 나보다 크신 존재에게 말을 거는 일, 곧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손을 내밀고, 그분의 응답을 기다리는 시간, 기도는 존재와 존재의 대화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기원을 에덴에서 시작하지만, 그 첫 장면의 끝은 ‘추방’으로 마무리됩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은 “노드의 땅”, 곧 방황의 자리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노드(Nod)’라는 말은 ‘흔들림’, ‘방황’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상태를 드러냅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동쪽, 즉 안정과 중심에서 멀어진 자리에서 살아갑니다.

기도는 바로 그 흔들리는 마음의 나침반을 다시 맞추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불안하기 때문에, 기도는 필연입니다.

기도는 결핍을 고백하는 행위이며,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용기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기도를 ‘요청’으로 이해합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한 간청, 원하는 것을 향한 청원의 행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거래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 흥정을 시도합니다.

신앙의 언어를 입에 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만큼 드렸으니, 그만큼 주셔야 한다”는 계산을 놓지 못합니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그의 재능을 시기하는 궁정 음악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겉으로는 음악사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실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신앙적 갈등을 그린 작품입니다.
모차르트는 거침없고 방탕하지만, 그의 음악은 마치 하늘의 언어처럼 순수합니다.
반면 살리에리는 경건하고 절제된 삶을 살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질투와 원망으로 물듭니다.

살리에리를 통해 우리는, 신앙 속에서도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응답의 수단’으로 오해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는 젊은 시절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게 음악의 재능을 주신다면, 저는 제 인생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그의 기도는 경건해 보이지만, 본질은 거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상’으로, 헌신을 ‘조건’으로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방식대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곁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모차르트가 나타났고, 살리에리는 절망과 분노에 빠졌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순결을 지켰는데, 어째서 저 방탕한 자에게 재능을 주셨습니까?”
그의 절규는 사실, ‘응답받지 못한 신앙’의 초상이었습니다.

살리에리의 비극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은 신앙의 파산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한 협상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받아내는 협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내 마음을 맞추어 가는 조율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훈련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종종 너무 일찍 ‘아멘’으로 끝납니다. 기도를 짧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도는 대화인데, 우리는 늘 우리의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를 떠납니다.
“하나님, 이것을 주시고, 저것을 해결해 주세요.”
말을 쏟아내고는 마지막에 “아멘”을 찍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립니다.

그분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는데, 우리는 응답을 들을 시간을 남겨두지 않은 채, 자신의 말로 기도를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말하고 하나님이 듣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내가 듣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말하는 법”은 배우지만, “듣는 법”은 배우지 못한 채 신앙을 살아갑니다.

‘아멘’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이어야 합니다.
그 쉼표 뒤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머무는 고요가 있습니다. 그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초대이며, 거절이 아니라 응시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침묵으로 말씀하시며, 그분의 말 없는 응답은 평안이라는 언어로 다가옵니다.

기도의 침묵은 말보다 깊은 이해의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요청보다 더 큰 응답을 듣습니다.
그것은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전환이며, 불안한 간구가 잦아든 자리에서만 들리는 하나님의 미세한 속삭임입니다.

우리가 침묵을 배운다면, 그분의 대답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신앙인 김교신 선생은 1943년, 그의 일기 속에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더욱 감사합니다. 제 기도를 기각해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분은 만약 자신이 바란 대로 모든 기도가 이루어졌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좇아 살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버려진 기도가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의 시작이었음을 감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응답하셔야 하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내가 요청하면 들어주셔야 하는 비서나 해결사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성숙하게 빚어 가시는 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복음 22:42)

이 기도는 겉으로 보면 응답되지 않은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 구원이라는 더 큰 응답이 그 뒤에 있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멈춰 세우심으로써, 더 깊은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기도는 설명이 아니라 관계, 요청이 아니라 응답,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입니다.

오늘 하루가 혼란스러우셨다면, 우선 말을 줄이시고 귀를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이미 말씀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이 말씀의 핵심은 ‘무엇이든 구하라’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라’에 있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조용히 말씀하시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서는 일입니다.

우리가 침묵을 배운다면, 그분의 대답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