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 죄책감,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장 1~2절
성적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는 본능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성욕은 종종 경건과 거룩에서 멀리 떨어진 것처럼 다뤄집니다.
우리는 기도와 찬양은 자유롭게 나누지만, 욕망의 흔들림은 감추어야 할 비밀처럼 숨깁니다.
그렇다고 이 침묵이 우리를 더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욕망을 죄의 영역으로만 몰아붙일수록, 그리스도인은 이중적인 삶의 무게에 짓눌립니다.
주일에는 성결을 고백하고, 평일의 밤에는 욕망 앞에 무너지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를 위선자라 느낍니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는 이를 ‘인지 부조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믿음과 실제 행동이 충돌할 때, 강렬한 불편함과 죄책감을 느낍니다.
“나는 거룩해야 한다.”는 신앙적 확신과 “나는 욕망 앞에 쉽게 흔들린다.”는 현실이 부딪힐 때, 내면에는 균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이중인격자라 느끼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신앙 자체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긴장은 단순히 실패의 증거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불편함은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죄책감조차 사라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앙과 욕망이 더 이상 서로를 부르지 않는 침묵의 상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성욕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요?
이 문제는 단순한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창조와 타락, 구속과 회복이라는 기독교 세계관 전체와 맞닿아 있습니다.
솔직히 오늘날 우리 세상은 성욕을 소비하는 방식에서 이미 오래 전에 선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길거리에서, 화장실에서, 지하철에서 누군가는 몰래 카메라를 꺼냅니다.
한 인간의 몸은 더 이상 살아 숨 쉬는 인격이 아니라, 훔쳐 저장할 수 있는 이미지 조각이 됩니다.
숨결도, 표정도, 삶의 서사도 다 사라지고, 오직 화면 속 몇 초짜리 장면만 남습니다.
포르노 산업은 그보다 더 대규모의 소비를 이끌어 냅니다.
인터넷 상에서 클릭 한 번이면 수많은 포르노 영상들이 쏟아지고, 수많은 관계들이 조작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한 인간의 내밀한 언어도, 기억의 무게도, 진짜 사랑의 맥락도 없습니다.
오직 자극만 있고, 자극은 소비되고, 곧바로 버려집니다.
포르노는 결국 사람을 만나고 존중하는 능력을 빼앗아 갑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보다, 사람을 소모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욕망이 더 극단으로 치달으면, 소유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스토킹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적인 욕망이 “너는 내 것”이라는 집착으로 변할 때, 상대는 인격과 자유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내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는 장난감처럼 취급됩니다.
한 사람의 삶 전체가 통제 가능한 물건으로 축소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서로 다른 현상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사회적 증상들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타인을 전인격적 존재로 보지 못하고, 욕망의 파편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몰래 촬영은 한 인간을 숨결 없는 이미지의 조각으로, 포르노 소비는 한 인간을 순간적 자극의 덩어리로, 스토킹은 한 인간을 소유 가능한 물건으로 바꿔 버립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의 사랑을 신화적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본래 둥글고 완전한 존재였고, 두 얼굴과 네 팔, 네 다리를 가진 그 모습은 스스로 자족할 만큼의 강력함을 상징했습니다.
인간이 지나치게 강력해지자 하늘의 신들은 그 힘을 두려워했습니다.
신들의 권위와 질서가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우스는 인간을 멸망시키는 대신, 그 힘을 약화시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반으로 가른 것입니다.
잘려 나간 인간은 불완전하게 되었고,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평생 방황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신화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인간의 갈망은 상실에서 비롯되었으며, 우리는 본래의 온전함을 되찾기 위해 서로를 갈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성경에서 인간은 신들을 위협할 만큼 강력한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겨루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관계 맺도록 지어진 피조물입니다.
인간의 존귀함은 스스로의 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창 1:27).
따라서 플라톤의 신화가 인간의 갈망을 “잃어버린 힘과 반쪽을 찾는 여정”으로 설명한다면, 성경은 인간의 갈망을 창조주와의 단절에서 비롯된 목마름으로 설명합니다.
신화 속 인간은 신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지만, 성경 속 인간은 하나님께 사랑과 동행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랑과 욕망이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잃어버린 온전함을 되찾으려는 그리움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시고, 둘이 만나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한 몸”은 단순한 육체적 결합이 아니라, 인격과 품성, 몸과 영혼이 함께 어우러지는 전인격적 연합을 뜻합니다.
성은 소비되는 자극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다른 존재에게 건네지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존재 전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명 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말끝에서 맴도는 내밀한 언어, 문득 스치는 눈빛에 담긴 마음, 상처와 기억이 쌓여 만들어진 복잡한 감정들까지 이 모든 것이 모여 하나의 우주와 같은 인간을 이룹니다.
육체와 사고, 인격과 영혼, 내밀한 심리까지 어우러진 온전한 세계가 한 사람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시선을 회복하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을 때, 욕망은 제자리를 잃었습니다.
사랑과 생명을 낳는 불씨였던 성은 이제 잘린 조각처럼 소비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포르노는 하나의 우주와 같은 인간을 몸만 떼어내어 팔고, 권력은 성을 지배의 무기로 삼습니다.
욕망은 더 거칠고 빠르게 자극되지만, 그 끝에는 더 깊은 고립과 공허만이 남습니다.
방 안이 고요해질 때, 화면의 불빛 하나가 공간 전체를 지배합니다.
손끝이 기억한 습관, 눈동자가 저장한 이미지가 다시 불을 붙입니다.
그러나 무너진 뒤 남는 것은 단순한 죄책감이 아니라, “나는 절대 변하지 못한다”는 깊은 절망감입니다.
이것이 파편화된 욕망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 절망의 틈에 은혜가 스며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많은 이들은 두 번째 말씀인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만 붙들며 발버둥칩니다.
그러나 변화는 언제나 첫 번째 선언에서 시작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은혜는 정죄보다 먼저 오는 선언이며, 무너진 정체성을 다시 붙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우리의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더럽다고 부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값 주고 사신 존귀한 성전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성적 욕망은 숨겨야 할 짐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다시 제자리를 찾아야 할 선물입니다.
욥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다”(욥 31:1)고 고백했습니다. 욕망은 눈에서 시작됩니다.
시선이 어디를 향하느냐가 욕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욥의 언약은 단순한 결심이 아니라, 눈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친밀의 환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강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눈이 흔들리고,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그럴 때 시편의 고백은 또 다른 빛을 줍니다.
“그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먼지뿐임을 기억하신다”(시 103:14).
욕망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은 하나님께 낯선 장면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그분께 이미 알려져 있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욕망과의 싸움은 단순히 넘어지지 않는 싸움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은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착각이 아니라, 무너져도 돌아갈 품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 품 안에서, 파편화된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고, 하나님이 처음 빚으신 전인격적 인간으로 회복되어 갑니다.
세상은 성을 끝없이 소비합니다.
스크린 속 자극, 상업화된 쾌락, 관계 없는 만남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은 단 하나의 진실을 말해 줍니다.
인간은 여전히 누군가의 품 안에서 따뜻함을 확인하고 싶은 존재, 사랑받고 싶은 마음의 떨림을 품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성적 욕망은 부끄러운 조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몸과 인격, 기억과 감정이 함께 내는 전인격적 울음입니다.
그 울음은 누군가와 진심으로 연결되고 싶은 마음의 언어입니다.
하지만 그 울음이 길을 잃을 때, 욕망은 음란으로 기울어집니다.
음란은 사랑을 잃은 욕망입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대신, 나를 채우려는 허기로 타오르는 불입니다.
그곳에는 몸이 있지만 마음이 없고, 접촉은 있지만 만남은 없습니다.
성욕이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라면, 음란은 자신에게 갇힌 외로움입니다.
성욕이 생명을 잇는 다리라면, 음란은 그 다리를 스스로 끊고 서 있는 그림자입니다.
욕망이 방향을 잃을 때, 세상은 그것을 상품으로 포장합니다.
따뜻함을 향한 그리움은 거래의 언어로 바뀌고, 친밀의 갈망은 소비되는 자극으로 흩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왜곡된 욕망 속에서도 우리가 친밀함을 향해 헤메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잘못된 길로 흘러간 욕망의 방황조차, 하나님은 “사랑받고 싶다”는 본래의 목마름으로 들으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욕망을 지우는 길이 아니라, 욕망이 누구를 향해 흘러갈지를 새롭게 정하는 길입니다.
성욕은 결국 생명을 향한 충동이기에, 하나님께로 흐를 때 삶을 세우는 에너지가 됩니다.
세상이 욕망을 상품화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사랑과 생명을 살리는 관계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욕을 바라보는 건전한 시선은 거기서 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