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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창조냐, 진화냐?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by 한자루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기 38:4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물음은 단순히 과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가장 깊은 질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고백을 배우지만, 학교에서는 “인류는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등장했다.”는 설명을 듣습니다.

머리로는 두 이야기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말하고 있음을 이해하려 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부딪히는 긴장이 남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붙드는 것이 곧 과학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느끼고, 또 어떤 이들은 과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을 버리는 길이라고 두려워합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이에서 갈등하며, “나는 교회 안에서는 창조를 믿는다 말하고, 학교에서는 진화를 믿는다 말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혼란을 경험합니다.

이 고민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의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갈등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모든 의문이 해소되어야만 성립되는 계산식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영역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걸어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가 있습니다.

성경은 과학책이어야 하고, 과학은 인생의 의미까지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근본적으로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책이지, 자연 현상을 기술하는 교과서가 아닙니다. 반대로 과학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어떻게”라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지만, “왜”라는 목적에는 답을 줄 수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성경은 사랑의 노래이고, 과학은 사용 설명서입니다.

노래는 내 마음을 흔들지만 기계 작동법을 알려주지 않고, 설명서는 기계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내 마음의 갈증을 채워주지 않습니다.

시를 읽거나 감동적인 에세이를 읽으면서 문법과 문자를 중심으로 해석하려 들거나 단어의 어원에만 집중한다거나 문단 구성을 파헤쳐 해석하려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또한 설명서나 작동법을 읽으면서 인생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하거나 감동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하지만 노래를 설명서처럼 읽거나, 설명서에서 사랑의 위로를 찾으려 하면 혼란만 깊어집니다.


사실 창조와 진화를 둘러싼 논쟁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역사 속에는 이미 과학과의 충돌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중세 교회는 성경의 “해가 뜨고 진다.”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연구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교회는 혼란에 빠졌고,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교회는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이 사건은 성경이 우주의 구조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증언하는 말씀임을 일깨워줍니다.

또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땅 끝”이나 “땅의 기둥” 같은 시적 표현을 과학적 사실로 오해하여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혼란의 원인은 성경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우리의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역사는 오늘날의 창조와 진화 논쟁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성경을 과학의 언어로 읽으려 하거나, 과학적 설명을 신앙의 토대와 혼동할 때 불필요한 갈등이 생깁니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신앙을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어쩌면 10년, 20년, 혹은 30년 후의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진화론을 과학적 설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신앙을 지켜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의 후손들은 이렇게 묻지 않을까요?
“왜 그렇게까지 신앙의 위협을 느꼈을까?”

생명의 기원을 두고 우리가 창조냐 진화냐를 논할 때, 가장 먼저 가져야 할 태도는 확신이 아니라 겸손입니다. 우리의 이해는 언제나 부분적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론을 믿는 기독교 안에서도 다양한 관점들이 나타납니다.

창조과학은 창세기의 6일 창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며, 지구의 나이를 수천 년에 불과하다는 젊은 지구론을 주장합니다.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하지만, 학계에서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 속 창조 이야기를 고대 신화적 언어로 이해하며, 과학과 별개의 차원에서 신앙의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즉, “어떻게”보다 “무엇을 말하려는가”에 집중합니다.

유신진화론은 비교적 최근에 대두되었는데 진화 과정을 하나님의 창조 방법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우주와 생명의 질서를 세우셨고, 진화는 그분이 사용하신 도구라는 관점입니다.

이 입장은 과학의 성과를 수용하면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중간 지대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세 관점은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공통된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사랑 속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과학의 명확한 설명을 원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도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모든 의문이 풀려야만 가능한 계산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오히려 설명되지 않는 경계 위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용기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늘에서 내리는 기적 같은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믿겠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계산된 증거나 논리적 방정식 대신,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4:19, 9:9; 마가복음 8:34; 요한복음 1:43 등)

이 초대는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기적의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인격적인 부름이었고, 따르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가도록 하는 관계의 시작이었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 속에서도 우리는 같은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신앙은 과학적 이론처럼 완벽히 증명되거나 반박될 수 있는 공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름 앞에 서서, 그분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차츰 자라나는 인격적 만남의 여정입니다.

과학은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고, 신앙은 그 자연을 주신 분을 신뢰하게 합니다.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하는 사건,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차츰 자라나는 것입니다.

과학적 증거만으로 신앙을 완전히 설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과학을 전적으로 배척하는 것도 온전한 태도가 아닙니다.

신앙은 증명으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삶으로 경험하는 진실 안에서 더 깊어지고 확고해집니다.


오늘도 우리는 불확실성이 가득한 세상 속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이해 너머에 여전히 우리를 붙드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위로가 됩니다.

과학은 우주의 웅장함을 보여주지만, 성경은 그 우주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두 시선이 함께할 때, 우리는 더 겸손해지고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깊은 고백입니다.

“저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 안에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존재 자체가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이 고백이 은은한 등불처럼 우리의 걸음을 비춥니다.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부여하시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일으키신 창조주의 손길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오늘도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담대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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