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도 주식 투자해도 될까요?
네가 이 세대의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디모데전서 6:17–18)
“그리스도인이 주식을 해도 될까요?”
카페에서도, 직장 점심자리에서도, 심지어 교회 소그룹 모임에서도 “어떤 종목을 샀다더라”는 말이 오갑니다.
누군가는 기술주에 투자했다 하고, 또 누군가는 배당주가 안정적이라고 말합니다.
투자는 이제 특별한 사람들의 일이 아니라, 현대인의 일상적인 선택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도 주식 투자해도 되나요?”라는 질문은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이고 필요한 물음입니다.
하지만 믿음과 자본, 영혼과 투자라는 단어들이 한 문장 안에 들어서면, 우리는 어딘가 불편함을 느낍니다.
믿음은 하늘을 향하는 것이라 여겨지고, 투자는 땅에 뿌리를 두는 일로 여겨지니까요.
이 질문에 흔히 등장하는 대답이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세요. 하나님은 돈 불리는 걸 칭찬하셨잖아요. 그러니 투자도 성경적인게 아닌가요?"
정말 그럴까요?
먼저 말씀드리자면, 달란트 비유는 주식 투자나 경제적 번영을 이루라는 비유가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사실 달란트 비유는 그것과 별 상관이 없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본래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맡긴 것에 대한 충성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성경 말씀을 투자에 관점에서 그렇게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만약 투자를 하고 싶으시다면, 성경보다 투자에 관한 책을 읽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건 마치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다면 물리학 책을 봐야 한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는 투자에 대해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질문은 ‘주식 투자’라는 단어를 빌려 묻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바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재물과 소유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나는 이 투자를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가?”
“부를 축적하고 싶은 내 마음은 정당한가?”
사실 주식 투자라는 행위는 단순히 재테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주식회사(corporation)라는 제도는 사실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중세의 교회와 수도원은 법인격(corporatio)을 최초로 인정받은 공동체였습니다.
즉, 개별 구성원이 죽거나 떠나도, 하나의 신체(corpus)처럼 계속 존속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훗날 이 개념이 세속 경제로 옮겨가면서, 기업도 “죽지 않는 몸”을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불멸의 신체에 지분을 사는 일을 투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식 투자는 단순히 돈을 굴리는 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신학의 흔적을 간직한 제도에 신뢰를 표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 공동체에 동참하겠다.”는 일종의 신앙 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곧 어떤 기업, 어떤 구조, 어떤 가치를 지지하겠다는 선언이며 다시 말해, 우리의 계좌는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부와 소유’에 대한 시선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은 부를 긍정할까요, 부정할까요?
한마디로 정리하긴 어렵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부와 소유에 대해 두 가지 시선이 성경 전체를 통해 역설적으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쪽의 입장만 강조한다면 성경을 왜곡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다!”라는 관점만 강조하면 기복주의, 번영신학으로 흐릅니다.
반대로, “부는 모두 우상이다!”라고만 말하면 청빈과 금욕만으로 신앙을 판단하는 협소한 관점이 됩니다.
우선, 성경은 '부와 소유'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물질적 약속을 주셨습니다.
특히 신명기 28장 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들에게 주시겠다고 당신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이 땅에서, 당신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땅의 소출이 풍성하도록 하여 주실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
이 구절은 단순한 정신적 위로나 영적 은혜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의 ‘생산성과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안정된 직장, 자녀의 건강과 성장, 재정적 여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노동의 정당한 결과로 주어지는 부’ 역시 긍정합니다.
잠언 14장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수고에는 이득이 있는 법이지만, 말이 많으면 가난해질 뿐이다.” (새번역 성경)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땀 흘려 일한 자는 그 대가를 반드시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의 중요한 관점 중에 하나는, 부의 목적이 소유가 아니라 ‘나눔’에 있다는 점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11절에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구제 헌금(연보)에 관한 바울의 권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일에 부요하게 하시므로, 여러분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
이 말씀은 부의 목적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가 부자 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로 이웃을 섬길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잠언 19장 17절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에 보답해 주실 것이다.” (새번역 성경)
성경은 부와 소유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는 긍정적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신앙의 길을 막는 영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경고합니다.
이 경고는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하나님과 돈 중 누구를 주인으로 삼을 것인가라는 신앙의 본질적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식 시장을 ‘경제의 장터’라 부르지만, 실은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신전과도 같습니다.
거대한 전광판은 제단처럼 번쩍이고, 매일의 호가는 제사처럼 올려집니다.
그곳에서 숭배되는 이름은 만몬(Mammon), 즉 돈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만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마 6:24)
예수님은 돈을 단순히 물질이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돈을 “만몬”이라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이 만몬을 단순히 ‘돈의 상징’으로 생각지만 고대 근동에서 숭배되던 실제 신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청중들은 돈이 단순히 교환 수단이 아니라, 영적 권세이자 숭배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만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은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니라, 영적 전쟁 선포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주식 시장이 바로 그 만몬의 신전과도 같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많은 눈과 마음이 오직 수익과 그래프에 매달리는 그곳에서, 우리는 여전히 숭배의 자리를 목격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은 “투자를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돈이 내 삶에서 도구인가, 주인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불공정한 제도, 불균형한 구조, 인간을 억누르는 시스템 역시도 부와 가난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불의한 법과 제도로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권세자를 고발했고 (사 10:1–2), 야고보는 노동자의 품삯을 가로챈 부자를 저주했습니다. (약 5:4)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백성을 꾸짖었습니다. (렘 2:13)
이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 안에 구조적 회복을 위한 장치를 마련하셨습니다.
희년 제도는 토지를 되돌리고 빚을 탕감함으로써 불평등이 영구화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안식년 제도는 땅과 사람 모두에게 휴식을 주며 자원을 재분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삭 줍기의 법은 추수의 끝자락에서조차 ‘몫 없는 이들’에게 몫을 남겨두는 제도였습니다.
이 모든 장치는 하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정의로운 나눔. 개인적 선행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책임지는 구조.
신앙은 청빈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청빈이 진정한 신앙의 증언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의와 연대, 사랑과 나눔이라는 더 큰 맥락 속에 놓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주식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단지 ‘가능, 불가능’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 그리고 이웃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는 주식은 “나는 이 회사를, 이 구조를, 이 가치를 지지합니다.”라는 신앙적 선택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라면, 내 투자 역시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여야 합니다.
이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주식을 해도 될까요?”
저는 이렇게 질문을 바꿔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떤 회사의 주식을 사시려고요?
그 회사가 사람을 해치는 물건을 만들고 있다면, 주식을 사는 것도 동참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주식을 사시려 하나요? 단지 숫자만 늘어나고 돈이 많아지는 게 목적이라면,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수익이 생긴다면, 그 돈은 어디에 쓰실 건가요?
이윤의 끝에 하나님과 이웃이 있습니까? 아니면 나만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