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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용할 배고픔을 주소서.

엠마오의 식탁을 떠올리며

by 한자루
보라,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거리로 주노라.
(창 1:29–30)




저녁 무렵, 골목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냄새가 스며듭니다.
빵집 앞에서는 고소한 향기가 부풀어 오르고, 국밥집 앞에서는 뜨거운 김이 피어올라 마음까지 덥혀 줍니다.
그 냄새 속에는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기쁨만이 아니라, 하루를 버틴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이제 허기를 달래주는 음식보다 인터넷 음식 화면에 더 오래 머뭅니다.
SNS에 줄줄이 올라오는 음식 사진, TV 속 끝없는 맛집 소개,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먹방 채널.
사람들은 실제로 먹는 것보다 먹는 장면을 소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풍요의 시대, 음식은 더 이상 생존의 도구가 아니라 욕망의 전시장으로 변했습니다.


성경은 오래전부터 먹는 문제를 신앙의 자리로 보았습니다.
인류의 첫 타락은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굶주린 예수께 돌을 떡으로 바꾸라며 시험했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언제나 단순한 생리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선택이자 결단이었습니다.

창세기는 인간이 금지된 열매를 따먹는 순간을 타락의 시작으로 기록합니다.
그 장면은 단순히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먹는 행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서의 식탁은 한 그릇 팥죽 앞에서 장자의 권리를 내던진 자리였습니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지쳐 있던 에서는 눈앞의 허기를 참지 못했습니다.
순간의 배고픔이 영원한 약속을 삼켜 버린 것입니다.

반대로 엠마오의 식탁은 달랐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했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 주님이 떡을 들어 축사하시고 떼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빵 한 조각이 눈을 열고, 식탁이 임재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이 두 식탁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는 약속을 내던진 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얼굴을 알아본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의 식탁이 어느 쪽이 될지는, 음식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성경 이야기 속에서만이 아니라, 역사 속의 음식 규범과 금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와 이슬람은 돼지고기를 금했습니다. 돼지 고기가 맛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서 돼지고기는 이미 맛있고 기호성이 강한 고기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고대 로마의 요리서 아피키우스에는 돼지고기를 다루는 조리법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아리스토파네스와 아테나이오스 같은 고대 그리스 문헌에도 돼지고기 요리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합니다.

돼지고기는 그 자체로 맛있고 풍미가 깊어, 당시에도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유목과 사막 환경에서 살아가던 히브리인이나 아랍인에게 돼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습니다.

돼지는 반추동물이 아니어서 사람과 같은 먹거리를 소비하고, 물을 많이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생산성이 낮았던 당시 공동체 전체의 관점으로 보면 가난한 이의 몫을 빼앗는 동물이 된 것입니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그의 저서 '돼지와 성스러운 것(Pigs, Taboo, and Sacred)'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돼지고기는 고대 사회에서 맛과 기호성 때문에 강하게 선호되었지만, 유목·사막 환경에서는 돼지를 기르는 것이 생태적·경제적으로 너무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금기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돼지고기를 금한 것은 단순히 위생이나 종교적 편견 때문이 아니라, 환경과 공동체 윤리를 고려한 집단적 선택이었던 셈입니다.

이 맥락에서 보면, 돼지고기 금지는 단순한 ‘먹지 말라’는 차가운 명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입의 쾌락보다 이웃의 허기를 먼저 보라.”는 하나님의 따뜻한 질서이자, 공동체를 위한 깊은 지혜였습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또 다른 금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첫 곡식입니다.
가장 달콤한 순간인 첫 수확은 농부의 입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께 먼저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곡식은 성전 창고를 통해 제사장과 레위인, 과부와 고아, 나그네에게 돌아갔습니다.
내 손이 땀 흘려 거둔 곡식이라 해도 가장 먼저 내 몫으로 삼지 않는 훈련, 그것이 풍년에도 흉년에도 공동체를 지켜온 힘이었습니다.

돼지고기 금기와 첫 곡식 금기의 뿌리는 같습니다.
먹는 문제는 단순히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함께 기억하는 문제였습니다.


중세 수도사들은 탐식을 피하기 위해 작은 규칙들을 세웠습니다.

배고프다고 아무 때나 허겁지겁 먹지 말 것.
값비싼 음식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 것.
음식 투정을 하거나 까다롭게 가리지 말 것.
음식을 급하게 삼키지 말고 천천히 음미할 것.
욕심내어 게걸스럽게 먹지 말 것.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그린 ‘칠죄종’ 속 탐식 장면에 대한 그림이 있습니다.
‘칠죄종’은 중세 수도사들이 인간이 쉽게 빠지는 일곱 가지 근본적인 죄악 즉, 교만, 탐욕, 질투, 분노, 음욕, 게으름, 그리고 탐식을 묶어 경고한 목록입니다.
보쉬는 그 가운데서도 탐식을, 사람의 영혼을 좀먹는 욕망의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또한 1896년에 알베르 앵커가 그린 ‘지나친 탐식’을 보면, 그 속의 식탁은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매우 소박하고 초라해보이기 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그것조차 과한 욕망의 상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식탁을 떠올려 보십시오.
당시의 탐식이 오늘의 눈에는 소박해 보일 정도라면, 지금 넘쳐나는 우리의 식탁은 어떤 이름으로 불려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한 가지 태도를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절제입니다.

절제는 단순히 덜 먹는 것이 아닙니다.

절제는 필요한 만큼, 올바른 방식으로 먹는 것입니다.
풍요를 감사로 바꾸고, 탐욕을 다스리는 힘이 절제 안에 담겨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또는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먹는다는 것은 욕망을 풀어내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풍요의 시대에는 주기도문을 바꿔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대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주옵소서.’”라고.

여기서 말하는 배고픔은 단순한 허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 이웃의 필요를 느끼는 민감함, 음식에 깃든 희생과 수고를 기억하는 마음입니다.
이 배고픔이 있을 때 우리의 식탁은 게걸의 자리가 아니라 예배의 자리가 됩니다.


강연가 김창옥 선생님은 그의 한 강연에서 이런 기도문에 대한 이야기 했습니다.


이 식탁 위에 있는 음식은 저 멀리 태양에서 온 햇빛과 농부들의 수많은 수고와 유통업자들의 노력,
그리고 더운 날 주방에서 뜨거운 불을 만지며 음식을 만들어 주신 분들의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음식은 그래서 단순한 음식이 아닌, 우주와 사람들의 종합 선물세트와 같습니다.
이 음식을 먹고 매일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삶에 감사하게 도와주십시오.


이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한 끼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그 안의 하나님의 빛과 땀과 사랑을 기억하는 것.

그 마음이 절제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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