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으로 기도를 마쳐야 할까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익숙하게 그렇게 기도를 마칩니다.
때로는 너무 익숙해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입 밖에 내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꼭 그렇게 끝맺어야 할까요?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도가 무효가 되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형식보다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이름 없는 자의 신음, 외로운 이의 탄식, 말 잃은 자의 눈물도 들으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니 기도의 말미에 정해진 문장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과 별개로, 우리는 때때로 말의 형태 속에서 마음을 다잡고 정리하기도 합니다.
익숙한 표현은 어느 날에는 습관처럼 흘러가기도 하지만, 또 어떤 날에는 무너진 마음을 붙잡아주는 고백이 되기도 합니다. 익숙한 주기도문, 찬송가의 가사, 짧은 암송 말씀들처럼요.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블랑쇼는 '형식은 침묵 속에서 말이 되도록 돕는 외곽선'이라고 말했습니다.
말이 흘러내리지 않고 머물 수 있으려면, 형식이라는 그릇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말들은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나 대신 기도해주듯 입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귀에 익은 문장이 마음을 끌어당기고, 흔들리는 나를 다시 믿음의 자리로 데려다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도 그런 형식 중 하나입니다.
때로는 습관처럼 말하게 되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단순한 마침표가 아니라, 기도의 방향을 예수님께 정렬시키는 신호인 셈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문장을 일종의 주문이나 신령한 암호처럼 생각하고 사용하기도 합니다.
꼭 붙여야만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은 기도의 비밀번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삶,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3-1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뜻에 일치하는 마음과 삶의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요한일서 5장 14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시게 들어주십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을 구하고자 하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예수님처럼 신뢰하고, 예수님처럼 순종하고자 하는 내적 고백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형식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공동체의 믿음을 이어 주는 언어입니다.
기도는 개인의 속삭임이면서도, 세대를 넘어 이어온 신앙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매주 같은 찬송을 부르고, 주기도문을 함께 암송하는 이유는 그 문장 속에 수많은 성도의 눈물과 감사와 절박함이 스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도, 오랜 시간 반복되어 온 믿음의 말 위에 나의 기도를 얹는 일입니다.
나 혼자의 고백 같지만, 그 말 속에는 믿음의 세월이 쌓인 공동체의 숨결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형식은 공동체의 기억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을 기억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단지 감정을 풀어놓는 시간이 아니라, 누구의 이름으로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다시 떠올리는 의식입니다.
반복되는 기도문의 문장들 속에서, 우리는 매번 하나님이 누구신지, 내가 누구인지를 되묻고, 그 안에서 신앙의 자리를 확인합니다.
말하자면, 이 기도는 마음의 작은 성찬입니다.
평범한 문장을 반복하면서도, 그 말 속에 담긴 은혜와 기억을 다시 받아먹는 은밀한 예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조차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기도를 끝내야 하니까 그냥 입으로는 말하지만, 너무 익숙해져서 그 말이 오히려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그런 순간이 온다고 해서,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감정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됩니다.
어떤 청년은 그 말이 너무 ‘형식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기도를 망설이게 된다고 말합니다.
마치 그 문장을 붙이지 않으면 잘못된 기도 같기도 하고요.
또 어떤 분은 그 말을 매번 외우지만, 마음에는 닿지 않아 무언가 ‘빚을 지는 느낌’이 든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우리가 신앙 안에서 실제로 겪는 진짜 고민입니다.
말은 있지만, 마음은 아직 그 말을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들.
그럴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할 형식’이라는 부담을 잠시 내려놓고, 그 문장 안에 담긴 마음의 깊이를 천천히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다시 나의 고백이 될 때까지는, 자유롭게 기도해도 괜찮습니다.
대신, 그 익숙한 말을 다시 살아나게 하려면, 잠시 멈춰 이렇게 질문해 봐야합니다.
“나는 지금 왜 이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치고 있는가?”
“예수님의 이름이 내 기도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런 질문이 마음을 다시 깨우고, 한때는 형식처럼 느껴졌던 그 말이 다시 믿음의 고백으로 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다른 언어로 표현해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의 마음을 의지하여 드립니다.”
“제가 직접 설 수 없는 이 자리에, 예수님의 은혜로 나왔습니다. 주님, 받아주세요.”
“나를 대신해 중보하시는 주님을 믿고, 감히 이 기도를 올립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를 형식에 맞춰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하나님과 멀어질 것 같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순간에도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이렇게 위로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형식주의는 껍데기만 남기지만, 의미를 품은 형식은 신앙에 숨을 불어넣습니다.
반복된 언어라도 그 안에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고백이 됩니다.
그래서 기도를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으로 끝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익숙한 문장을 마음을 다해 되새긴다면, 그것은 단순한 마무리가 아니라 내가 누구를 믿고, 누구의 은혜에 기대어 살아가는지를 드러내는 고백이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닿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그분의 품에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매번 큰 감동이 따르지 않더라도, 그 말을 진심으로 다시 고백하려 할 때, 기도는 말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집니다.
말이 습관이 되었다면, 그 습관 속에 남아 있는 믿음의 흔적을 다시 살펴보세요.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진심으로 다시 고백해보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그 순간, 반복된 언어도 새로운 은혜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한 문장 안에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신 예수님의 중보와 우리를 위해 말없이 고난을 견디신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