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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의 문장들

by 유자와 모과
서대문수제맥주.jpg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 정명원


* “10월 말, 감 수확철 동안에는 사람을 부르지 말아주세요. 그 시기 상주에서는 손 달린 사람은 모두 감을 깎아야 합니다. 심지어 양로원에 누워 있던 할머니들까지 모두 나와서 감을 깎습니다.”

다시 한번 상주의 유구한 전통에 대해 알려준다는 듯이 엄숙하면서도 어딘가 자부심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말하는 그에게 외지에서 온 풋내기 검사가 천진하게 묻는다.

“꼭 그때여야 합니까?”

그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단호하게 말한다.

“네, 그때입니다. 그때가 지나면 감이 물러져버리거든요.”

감이 물러지게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세계에서는 사람의 어떤 사정도 물러지는 감의 사정보다 중하거나 급하지 않다. 떫은 등시가 한 알의 곶감이 되기까지 놓쳐서는 안 될 절묘한 타이밍, 그 시기를 중심으로 상주의 한 해는 돌아가고 이 도시의 사람들은 감이 익는 속도에 생활의 속도를 맞춘다. 242


* 그러므로 모든 구속영장은 해피엔드를 향해 있어야 한다. 좋은 뜻을 위해서....

행복의 땅에 얼마나 많은 이가 생존해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 방향성만은 그쪽으로 기울어 있어야 한다. 조금 더 햇볕이 드는 쪽으로, 그와 우리의 업이 함께 말라 갈 수 있는 쪽으로. 270


<당신에게 끝까지 다정하기로 했다> 폴커 키츠/윤진희


* 우리는 일주일에 한두 번, 최소 두 시간씩은 만난다. 그만큼 내가 인내심을 잃을 기회가 많다는 뜻이다.

인내심을 잃은 날에는 한 시간쯤 더 아버지 곁에 머무른다. 아버지가 불쾌한 감정을 잊어버리길 바라면서. 어제도 신호등 사건 이후 우리는 카페에 가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케이크 두 조각을 먹은 아버지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도 나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의 기억에 내 모습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남을까 봐 몹시 두렵다. 이미 벌어진 일을 더는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렵다. 다음날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나 나를 더 이 상 알아보지 못해서 현장이 그 상태 그대로 봉인되어버릴까봐 두렵다. 그런 위험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나는 급한 걸음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방문을 두드린다. 방문을 활짝 연다. 아버지는 한 발로 서서 양말을 벗으려 하고 있다. 라디오가 켜져 있다. 아버지가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네가 와서 기쁘구나.” 그러고는 한쪽 손을 뻗어 내게 내민다.

이번에도 별일 없이 잘 지나갔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우리가 더 이상 변화시킬 수 없는 순간을 ‘임계점’이라고 한다. 그 지점을 넘어가면 우리는 사건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손실을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실패를 ’만회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아버지가 이곳 베를린으로 이사 와서 내가 정기적으로 만나게 된 이후, 나는 임계점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어느 순간에 현재가 과거가 되어버리는지, 그 순간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 답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170-2



* 나이든 노인 중 삶 전체가 오로지 만족스러운 사건으로만 이루어진 사람은 없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사건 현장이 우리가 누구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순간에 봉인될지, 아니면 갈등을 겪는 중에 봉인될지는 단순히 운에 달린 문제 아닐까? 삶은 조화와 갈등, 이 두 가지를 모두 제공하며, 그것이 밀물과 썰물처럼 번갈아가며 우리의 삶을 채운다. 그 삶이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우연히 멈추는지가 정말 중요한 문제일까? 181



* 흉터는 경계를 열어둔 채 사방으로 더듬으며 새로운 것을 찾아 나아간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움을 추구한다. 물론 과거를 품고 있으며, 과거를 부정하거나 잊지도 않는다. 그러나 결국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211



*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호스피스 담당자에게 아버지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넘겼다. 그리고 또다시 우리가 함께한 산책, 식사 그리고 며칠 전 아버지가 느꼈을 기쁨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자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고 말이죠.” 그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아직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어쩌면 지금 떠날 기회를 잡은 것일 수도 있다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 안에서 뭔가 변한 것 같았다. 마치 호스피스 담당자의 말이 나에게 쓸모있는 관점을 제시해준 듯했다. 과거를 원하지만, 그것을 되돌리려 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새로운 것에 과거를 받아들이되, 과거와는 달라야 한다. 214-5



*아버지가 수치심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버지의 삶에서 기대와 달랐던 부분이 수치심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 깨달았다. 치매로 인해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변화가 얼마나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지를 조사한 연구가 많다.

정신과 기억력은 사회적 기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능력을 상실하면 사람들은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질병에 걸린 사람은 진단 결과를 알고 싶어하지 않거나 이를 비밀로 유지하려 한다. 그들은 놀라운 능력으로 가면을 쓰고, 평범한 문장을 말하며, 타인과의 접촉을 피한다. 오랫동안 변화를 무시하고, 수치심 때문에 많은 가족이 너무나 늦게 타인의 도움을 구한다. 232-3



<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남명성


* 정신분석학자 W.R. 비온은 아기의 고통을 보살펴주는 어머니들의 능력을 ‘담아주기(containment)’라고 정의한 바 있다. 아기 시절이 행복한 시간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공포의 시간이다. 아기일 때 우리는 이상하고 이질적인 세상에 갇힌 채 제대로 볼 수도 없고 끊임없이 자신의 몸에 관해서 놀라며, 허기와 방귀, 배변 활동에 불안을 느끼고 스스로의 감정에 압도당하게 된다. 우리는 말 그대로 공격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가 우리의 괴로움을 달래주고 우리 경험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어머니가 그렇게 해줌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상황을 관리하는 방법을 천천히 배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를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은 어머니가 우리를 담아내는 능력에 직접적으로 달렸다.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담아내기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면 자신도 모르는 걸 어떻게 우리에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스스로 담아내는 법을 한 번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살아가는 내내 불안한 감정으로 홍역을 치르게 된다. 비온은 그런 감정을 이름 모를 두려움이라고 적절하게 명명했다. 그런 사람은 이런 채울 수 없는 담아내기를 외부에서 공급받을 방법을 찾게 된다. 이런 식의 끝없는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서 술이나 마리화나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마리화나에 중독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118-9



“사랑 말이야. 우리가 사랑을 불꽃놀이로 자주 착각한다는 이야기를 했어. 극적이고 역기능도 있는 것처럼. 하지만 진짜 사랑은 아주 조용하고 아주 고요해. 긴박하게 진행되는 드라마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루하기도 하지. 사랑은 깊고 차분해. 그리고 변하지 않지. 내 생각에 너는 분명히 캐시에게 사랑을 주었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 말이야. 그런 사랑을 캐시가 되돌려줄 수 있는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지.”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