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재밌게 읽은 책 있어?"
모임에서 누군가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다. 별것 아닌 질문인데, 바로 대답이 안 나왔다. 나는 그래도 책을 꽤 읽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소설은 챙겨 읽는 편인데, 막상 "뭘 읽었어?"라고 물으면 제목이 안 떠오른다.
어물쩡 대답을 흘리고, 나중에 교보문고 구매 기록을 찬찬히 살펴봤다. 아 맞아 이 책 읽었지, 와 이거 재밌게 읽었는데, 에이 이건 재미없었지. 구매 내역을 스크롤하면서야 그간의 독서가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다. 읽는 순간에는 분명히 좋았다. 어떤 문장에서는 가슴이 뛰었고, 어떤 장면에서는 멈추고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감동이 한 달, 두 달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영화는 장면이라도 남는데, 책은 감정의 잔상만 희미하게 남고 구체적인 기억은 다 날아간다.
내가 읽은 책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 교보문고 구매 내역이라니.
기록을 시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티스토리에 블로그를 열고, 읽은 책마다 독서 기록을 남겼다. 반년 정도 했을까. 꽤 많은 기록이 쌓였다. 제목과 저자, 줄거리 요약, 인상 깊었던 부분, 내 생각. 나름 성실하게 채워나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책을 다 읽고 나면 기대보다 부담이 먼저 왔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려면 어느 정도 분량을 채워야 할 것 같았다. 한두 줄 휙 적고 끝내기엔 허전해 보이고, 그렇다고 매번 긴 글을 쓰자니 독서 기록이 또 하나의 숙제가 됐다.
사실 내가 남기고 싶었던 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면 "재밌으니 읽어 보세요"라고 전해주고 싶은 정도. 이 책이 이러이러한 감동을 주었고 이러이러한 문체로 쓰여서 큰 울림을 줄 것이다, 같은 멋진 리뷰가 아니라 그냥 가볍게 진심을 담아서 —
나는 이 책 재밌게 읽었어, 너도 한번 읽어봐.
그 정도면 충분한데, 블로그라는 형식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책을 다 읽자마자 블로그를 열었다. 나중에는 "주말에 몰아서 써야지" 했다가, 그 주말이 지나고, 다음 주말도 지나고, 기록하지 못한 책이 두세 권씩 밀리기 시작했다. 밀린 기록은 다시 쓸 동기가 더 없었다. 이미 감동은 희미해졌으니까.
노션에 독서 노트 템플릿을 만들어본 적도 있다. 제목, 저자, 읽은 날짜, 한 줄 감상. 칸을 깔끔하게 만들어놓고 세 권쯤 채웠을까. 블로그보다 가벼울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엔 반대의 문제가 있었다. 나만 보는 기록에는 동기부여가 안 됐다. 아무도 읽지 않는 노트에 매번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나마 블로그는 누군가 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동력이 됐는데, 노션에는 그것마저 없었다.
결국 블로그도 노션도 흐지부지됐다. 기록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방법이 안 맞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누가 "최근에 읽은 책 뭐야?"라고 물으면 한 박자 늦게 대답한다. 머릿속에서 표지를 더듬고, 제목을 조합하고, "음... 뭐였지?"를 반복하다가 겨우 한 권을 꺼내놓는다. 그마저도 정말 좋아서 기억나는 건지, 최근이라 기억나는 건지 확신이 없다.
읽는 건 좋아한다. 지금도 좋아한다. 읽는 행위 자체는 여전히 좋은데, 읽은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이 감각이 어느 순간부터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좋았던 책을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은데 기억이 안 나고, 다시 읽고 싶은 문장이 있었는데 어떤 책이었는지 모르겠고, 내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스스로도 설명을 못 하겠는 그런 순간들.
당신은 어떤가요.
작년에 읽은 책, 바로 떠오르시나요?
그 책의 어떤 문장이 좋았는지, 왜 그 책을 집어 들었는지, 읽고 나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 지금 바로 말할 수 있나요?
만약 저처럼 한 박자 늦게 대답하는 쪽이라면, 아마 이 이야기가 조금은 와닿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