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5일부로 다시 태어났다. 낯선 땅, 프랑스에서.
리셋하고 캐릭터 설정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임처럼,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마다할 이유 있을까.
두서 없이 말하는 나, 낮에 말한 단어를 곱씹으며 잠들 때까지 후회하는 나, 너무 긴장된 채 말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친절'하게 말하는 나, 굳어버린 습관을 버리고 싶은 나.
이들 모두에게 재탄생이 허락된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다면.
영어를 할 때는 미국인의 개방적인 성격이, 한국어를 할 때는 예의바르고 침착한 성격이 튀어나온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다. 그러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성격이나 태도의 전환이라기 보다, 자아를 새로 길러내는 일에 더 가까울 테다.
내게 프랑스어를 알려주고 있는 선생님이 가장 먼저 했던 말이다. 프랑스어 자아가 생긴다는 건 간단히 말해 내 안에 앞으로 프랑스어를 할 아기가 한 명 태어나는 것과 같다. 여기에는 내 '본캐'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20년을 넘게 한국어로 말하고, 싸우고, 전공 책을 읽고, 사랑을 속삭이던 성인 자아는 그를 다만 지켜보아 주어야 한다. 아기가 입을 뗄 때 '어어, 잠깐. 조사를 제대로 써야지.' 하며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는 내게 계속해서 이 사실을 주지시켰다. 프랑스 아기는 낯설고도 신기한 눈으로 처음 보는 글자의 조합을 구경하고, 귀를 간지럽히는 남사스러운 발음과 억양을 익히고,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 보며 프랑스어로 세상을 감각하고 표현한다. 옹알이부터 시작이다. 물론 문법은 모두 틀렸을 테고, 눈빛과 몸짓을 곁들여야만 겨우 알아 들을 수 있는 수준일 테다. 그리고 당신은 아래의 단계를 빠짐없이 거칠 것이다.
이 네 단계는 당신의 언어가 일정 수준에 다다를 때까지 무한히 반복될 예정이다. 4단계의 머쓱해하기는 3단계에서 당신이 얼마나 분노를 표출했느냐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진다.
나의 경우에는 가까운 동료이자 프랑스어 선생님인 이와 한밤중에 공원에서 소리를 지르고 대성통곡을 하며 싸웠다. 나는 학습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퇴행하는 것 같은 실력을 느끼며 불안과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고, 선생님은 성실하게 임하지 않고 부루퉁해있는 학생에게 불만이 쌓였다. 동네 주민들은 아마 저 동양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했을 테다. 종내 우리는 벤치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델프(DELF) 시험도 치지 말고 프랑스어도 배우지 말자고 말하고서 찔찔 울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마법같이 프랑스어가 들렸다.
뜨거운 화해 후 선생님은 내가 가져온 인문 잡지를 낭독해주었고, 나는 상호작용론이니 본성과 양육이니 하며 그걸 한국어로 통역해냈다. 프랑스어를 처음 배운 지 딱 한 달 되었을 무렵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고, 손바닥을 여러 번 맞추고 동영상을 찍고 이 변화가 얼마나 놀라운지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며 작지만 분명한 성과를 마음껏 자축했다. 그리고 나는 곧장 머쓱해졌다. 프랑스어가 무섭고 아무래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도망치고 싶다는 말을 중얼댄 지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또, 이런 말도 했었다.
이 한 마디로 선생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선생님은 한국에서 통용되는 외국어 교육 방식을 모두 빗겨가, 말 그대로 '아기를 키우는' 방식으로 열심히 내 프랑스어 자아를 양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의 생활반경은 모두 우리의 프랑스어 사전이 되었고, 그 생활 속에서 프랑스어 체계가 생겨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Grammar in Use, 한 권으로 완성하는 무슨 언어, 무슨 언어의 모든 것 류의 텍스트북과 워크북에 익숙해있던 24년산 한국인에게 생소한 학습 방식은 종종 겁과 착각을 주었다. 여기서 겁이란 영영 내가 프랑스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 착각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프랑스어 지식이 무질서하고 체계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런 불안은 '24년'에 기인한다. 우리는 모두 말 못 하는 아기였고, 당연히 문법 책 없이 한국어를 배웠다. 타고난 능력과 양육자가 제공하는 환경, 세상을 탐험하고 정보를 수집하여 나름의 체계를 만들려는 본능적인 노력으로 모국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했다. 프랑스어 선생님이 고집하는 방식은 낯설게 느껴졌지만, 사실 그건 우리 모두가 이미 거쳐온 과정이었다. 성인에게 그런 방식으로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직 아무도 없었을 뿐. 내 본캐, 즉 한국어 자아는 이미 24살인데 1살의 방식으로 새로운 언어를 배우려 하니 성인 자아가 불안해했던 것이다. 정작 1살짜리는 천진난만하게 무아지경으로 정보를 흡수하기 바쁜데도.
성장하는 아이의 머릿속에서 그러하듯, 사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분명하고 믿음직한 체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진리를 선생님 덕에 알게 되었고, 이런 방식으로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그의 수업이 유일무이하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건 듣고, 읽고, 말할 때마다 아직 채 완성되지 않은 그물망 사이로 뛰어내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다, 마침내 하나의 그물이 완성되면 더 이상 이 높이에서는 다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깨닿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그물을 넓고 단단하게 짜나가는 것, 바닥으로 떨어져도 자신을 믿고 또 한 번 뛰어내려 보는 것, 마침내 떨어지지 않았음을 깨달으면 곧바로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앞으로 나의 그물이 선생님의 조력과 함께 얼마나, 어떻게 촘촘하고 넓어져가는지 당신과 공유하고 싶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도 그런 경험을 가져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