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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Dec 13. 2022

개인적 유희 이상으로서의 문학: 읽고 쓰기의 효용

『깊이에의 강요』 해설

 문학은 배 부른 자들만의 추상적인 유희거리인가? 혹은, 배 곯을 것을 각오하고서야 향유할 수 있는 허영일 뿐인가? 읽고 쓰는 행위에 씌인 오랜 누명을 풀어줄 실마리를, 우리는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의 단편집 『깊이에의 강요(Drei Geschichten und eine Betracht ung)』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1949년 독일 뮌헨 출생의 소설가로, 1985년 발표한 장편소설 『향수(Das Parfum)』가 영화화되는 성공을 거두며 베스트 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다. 그의 또 다른 작품으로는 소설 『좀머 씨 이야기(Die Geschichte von Herrn Sommer)』, 시나리오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Rossini oder die moerderische Frage, wer mit wem schlief)』, 그리고 에세이집 『사랑을 생각하다(Ueber Liebe und Tod)』 등이 있다. 1995년 출간된 단편집 『깊이에의 강요』는 단편소설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 그리고 에세이 「문학적 건망증」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읽고 쓰는 행위가 어떻게 사회 혹은 거대 권력과 대비되는 존재로서의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저항의 도구가 되는가의 관점으로 본 단편집을 조명하겠다.

『깊이에의 강요』에 수록된 네 작품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꼭짓점의 꼴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단편집에서 「깊이에의 강요」가 네 작품 중 가장 첫 장에 배치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의도적인 것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약 90여 쪽에 걸쳐 펼쳐지는 그의 세계의 기반이 「깊이에의 강요」에서 처음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독자는 이 작품을 가장 먼저 읽음으로써, 앞으로 이어질 작품들을 리드미컬하게 독파하며 그의 자문(自問)과, 깊은 사유의 결과로서의 자답(自答)의 과정을 따라갈 수 있다. 첫 장에서 제시된 물음은 두 번째 장인 「승부」에서 전개된 뒤, 다음 장인 「장인 뮈사르의 유언」에서 확장된다. 확장된 세계관은 「문학적 건망증」으로 이어져 또 다른 질문을 낳고, 마침내 쥐스킨트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처음 던진 물음의 해답을 제시한다. 결국 이 단편집은 마지막 장인  「문학적 건망증」을 주축으로, 그것을 향해 나선형으로 굽어 돌아가는 삼각형 통로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이어질 본문에서는 각 텍스트가 제시하는 사건들과 그것이 시사하는 바, 그리고 개별적인 작품들이 이루는 전체적인 구조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이루어질 것이다.


  「깊이에의 강요」에 등장하는 비평가는 한 화가의 작품에 대해 ‘깊이가 없다’고 평가한다. 사람들은 화가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마치 “비평을 외우고나 있는 듯이” 입을 모아 그녀에게 깊이가 없다고 말한다. 화가는 ‘깊이’에 골몰한다. 그는 말한다.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자신의 작품에 정말로 깊이가 없는지, 그에 앞서 그 ‘깊이’란 것이 무엇인지 사유하기도 전에 이미 비평가의 말을 내면화하여 ‘왜’ 깊이가 없는지에 대한 고민부터 하게 된 것이다. 그는 깊이에 집착한다. 깊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또 그것을 얻기 위해서 세상을 뒤지고, 자신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가 나타나도 자신에게는 깊이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심지어는 작품이 아니라 그 자신을 마음에 둔 이에게조차 “자신도 그가 마음에 들었으니 원한다면” 집에 데려가도 좋지만, “자신에게는 깊이가 없으니 각오하라”는 말을 남긴다. 본질 자체가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깊이’만이 최고의 가치가 된 것이다. 비평가의 말을 시작으로 자기의심에 시달리다 정신분열을 얻은 그는 결국 투신하여 숲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애초의 비평가는 다시 평한다.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이며, 이 사건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번 충격적”이라는 말을 남긴다. 여기서 ‘상황’과 ‘남아 있는 우리’에 주목해보면, 비평가는 그의 죽음에 완전한 타자로서 존재한다. 이 두 표현은 화가가 나약하여 단순히 그에게 주어진 상황을 타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며, 비평가는 그와는 관련없는 타자임을 시사한다. 기득권층으로 대표되는 비평가는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책임하고 속이 빈 말일 뿐이다. 대중은 비판적 사고 없이 획일적으로 기득권의 사상을 외우다시피 되풀이하며, 집단이 가진 힘을 모른 채 다만 자극적인 유희거리로서 그의 생애를 소비할 뿐이다.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기 쉬운 개인의 경험은 다만 개별적 현상으로 구분지어지는 데에 그친다.


  「승부」에 등장하는 동네 체스 고수 장은 어느날 광장에 나타난 젊은 도전자와의 체스 경기에 임한다. 젊은 도전자는 어쩐지 범상치 않게 초연하고 침착한 태도를 보이고, 구경꾼들과 장은 그것에 매혹된다. 어느새 도전자가 진정한 체스 대가일 것이라는 추측은 기정사실이 된다. 장과 구경꾼들은 각자의 욕망을 그에게 투영한다. 장은 내심 누군가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 주어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서의 부담감에서 도망하고 싶은 욕망을, 구경꾼들은 장에게서 얻은 반복된 패배에 대한 복수의 열망을 투영한다. 구경꾼들은 도전자가 질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그에게 치밀한 전략이 존재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자신의 신념에 따라 용감하고 대담하게 체스를 두는 행위-을 대신 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맹신으로 변모한 것이다. 심지어는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지지 않았어.” “... 자네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견했었어. 아니,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지.” 장 역시도 후광 효과와 집단적 맹목의 열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장은 자신이 이기고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그 상황과 자신을 거듭 의심하기에 이른다. 도전자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졌다는 표시로 킹을 쓰러뜨린 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광장을 떠난다. 구경꾼들은 아주 잠시 놀랍고 부끄러워한 뒤, 이내 체스판을 떠나 본래의 삶으로 흩어져 돌아간다. 구경꾼들의 마지막 모습은 좌절된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가지만 그것을 실현할 용기와 의지는 없는, 소시민적인 현대인들의 군상을 하고 있다. 남겨진 장은 승리의 초라함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는 체스를 두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에게 이번 승리는 “실제로는 패배”한 것이며, “그것은 복수할 기회도 없고 ... 보상할 수도 없기 때문에 끔찍하고도 결정적인 패배”이다. 그는 이 승리와, 승리를 얻기까지의 자신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낀다. 젊은이와 체스를 두는 내내 스스로를 낮추고 의심했으며 신념을 따르지 않고 “전보다 더 소심하게 체스 정석에 매달려 이리저리 재보고 계산”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탈규범에의 의지를 드러낸 인물은 젊은 도전자 뿐이다. 이 마지막 장면은 권위 또는 주류 앞에 너무나도 쉽게 무릎을 꿇고 스스로의 신념을 포기하고 마는 개인들의 초상을 대변한 것으로 읽힌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수치심과 자기혐오, 그리고 그것들에서 기인하는 극단적 결정이고, 감시자로 작동하던 사회적 시선은 이내 흩어져 또 다른 곳으로 몰려간다.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세계의 진실을 발견하는 데 천착하고,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알리는 데에 생애를 바쳐야 한다고 믿은 장 자크 뮈사르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는 조개와 장미의 비유가 수차례 등장한다. 뮈사르는 자택에 장미 화단을 조성하였으나 장미는 전혀 자라지 않았고, 그는 화단을 전부 없애고 대신 그 자리에 테라스를 설치할 계획을 세운다. 애초의 조개는 그곳에서 발견된다. 뮈사르가 본래 물질을 중시하다가 지성의 세계로 넘어갔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여기서의 장미는 ‘빵과 장미’의 그것에 빗대어 볼 수 있다. 장미는 투표권을 의미한다. 투표권은 기본권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지성과 자유의지를 적절히 발휘할 수 있는, 적극적이며 합리적인 행위 주체임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따라서 여기서 장미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 즉 지성과 성찰을 의미한다. 진리에의 탐구를 시작하기 전의 뮈사르의 화단에는 장미가 피어나지 않았고, 장미 화단을 없애려 하자 세상은 석화되기 시작했다. 뮈사르는 그때 처음 조개를 발견하고 세상의 조개화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 탐구하고 골몰한다. 마침내 진실을 발견하고 석화되어 죽은 뮈사르의 무덤에는 “수많은 장미 송이가 무덤을 뒤덮었다.” 진리에 가닿을 때에야, 석화된 뮈사르의 육신은 부서져 없어지고 비로소 흙무덤에는 장미가 가득 피어난 것이다.뮈사르가 발견한 진실은, 인간이 사회를 석회화시킬 수밖에 없는 본질을 가지고, 또 석회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순환고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조개와 조개 성분이 증가하는 원인은 끊임없는 물의 순환이었다. 물은 토양의 성분을 녹여, 조개의 형성에 필수적인 물질을 조개 암석에 전달한다. 물은 흙과 함께 생명의 탄생에 필요한 ‘존재의 기본 원소’이지만, 세상을 석회화시키는 주범이기도 하다. 최소 단위인 원소가 조개화라는 거대한 현상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뮈사르는 발견했다. 이는 결국 개인이 사회 현상을 발생시키고, 개인은 또 다시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상호작용론적 관점과 얼마간의 숙명론적 관점을 의미한다. 뮈사르는 또 한 번 물음표의 모양을 한 느낌표를 던진다. “전세계적으로 조개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면에는 단순한 어떤 힘이 아니라 유일한 최고의 의지에 복종하여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틀림없이 있다고 확신한다. ... 도대체 어떤 실체일까?” 뮈사르가 ‘조갯병’을 얻어 명을 달리한 것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깨닫고 그 대가로서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는 사건을 의미한다.


 쥐스킨트의 세 단편은 서로 대립되는 구조를 이룬다. 첫번째 작품인 「깊이에의 강요」에서 비평가는 기득권력으로, 예술가로 대표되는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일반대중은 권력에 너무나도 쉽게 휘둘리고 동조하며, 그 결과에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개인은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는 무력한 존재이다. 그러나 두번째 작품인 「승부」에 등장하는 개인은 이에 도전하고 저항한다. 이 작품에서 기득권은 기존의 질서를 충실히 따르며 체스 고수로서의 명성을 이어가던 장의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다. 젊은 도전자는 앞선 작품 속의 예술가와 같이 개인을 대표하지만, 그와 대비되는 태도를 가진다. 그는 규범과 관습을 거부하고, 기득권의 위용에 압도되지도 않는다. 여기서 개인은 신념과 중심을 가지고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적극적 행위 주체이다.  압도되는 쪽은 오히려 장과 구경꾼들이다. 구경꾼으로 나타나는 대중은 사회 질서와 권력에 영향을 받는 수동적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의도와 관계없이 거기에 가담하여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기도 하며, 때로는 소시민적 태도를 취하여 욕망을 숨기고 정의를 내세우는 비겁함을 보이기도 한다.「깊이에의 강요」와 「승부」는 공통적으로, 개인과 기존 질서가 필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도전하든 저항하든 복종하든, 이 둘은 서로 제한된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두 작품이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개인과 사회를 바라본다면, 「장인 뮈사르의 유언」에서는 상호작용론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전자의 관점에서 개인과 사회는 분리된 존재로서 일대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면, 후자의 관점에서 개인과 사회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조개화와 물의 상관관계로 보듯, 개인은 수동적이지 않고, 거대한 현상 혹은 사회에서 주가 되는 권력을 형성하는 것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게 형성된 사회는 또 다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사회는 개인을 개인으로 두지 않고,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게 할 수도 있다. 생태계의 물 순환 질서가 한 원소의 기능을 조개화라는 거대한 현상에 가담하는 존재로 변모시켰듯이 말이다. 즉, 세번째 작품에서는 개인이 사회를 형성하고, 그렇게 형성된 사회 문화가 또 다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개화된 지구나 석회화에 영향을 받는 개인이나 불리한 것은 매한가지이다. 이 작품 속에서 상호작용은 모두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특히, 개인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든 작품 속에서 사회 질서 자체에 저항하지는 못한다. 「승부」의 젊은 도전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체스를 두지만, 결국은 체스 경기 규칙이라는 질서 속에 있을 뿐이다. 마지막에 킹을 쓰러뜨리고 떠나는 행위 역시 체스판에서 무례하다고 여겨지는 행위로, 말하자면 ‘규범 내의 탈규범’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은 다만 무력할 수밖에 없는가? 개인과 사회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개인은 그 관계 내에서 어떤 방식으로 힘을 행사할 수 있는가?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체념과 실의에 빠지지 않고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나? 쥐스킨트는 이 질문들의 해답을 읽고 쓰기에서 찾는다. 마지막 장에 수록된 그의 에세이인 「문학적 건망증」에서 그는 독서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절대적 망각을 깨닫고 좌절한다. 쥐스킨트는 작자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한 시의 구절,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를 기억해내고 시구에 고무된다. 그는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책을 읽지만 그것은 그가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었고, 자신이 약 30년간 읽은 책들을 모두 망각했음을 깨닫고서 좌절과 체념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이내 스스로 독서의 의의를 찾는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사람을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바꾸어 놓기 때문에 그것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며, 독자는 독서와 동시에 이미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 건망증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분명하고 비판적인 의식으로 그 위에 군림하고 발췌하고 메모하고 기억력 훈련을 쌓아야”한다고 의지를 다진다. 그는 개인의 의지와 성찰, 그리고 명료한 인식과 비판 정신을 지식인으로서의 도덕적 의무로 보았다. 그는 자신의 흔적에 고무되어 독서를 했다. 결국 삶의 변화에의 의지를 다지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건망증 때문에 무용하게 보이는 독서 행위가 기실 자신을 계속해서 읽게 만들고, 종내는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읽는 자는 쓸 수밖에 없고, 쓰려면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이 순환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며 삶은 안주하지 않고 변화할 것이다.

 세 소설과 달리 마지막 장의 에세이는 개인을 보다 주체적인 존재로 그린다. 더불어, 앞선 세 소설에 등장하는 개인들은 비교적 자기확신이 덜하다. 그들은 성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찰하는 존재는 큰 맥락에서 자신이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지 끊임없이 가늠해본다. 메타인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찰이 없다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용기는 내볼 수 있되, 그것은 진정한 용기라기보다 치기로, 강한 의지와 확신은 얻을 수 없다. 반면 에세이의 화자인 쥐스킨트는 성찰하는 존재이다.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이 어떤 것을 어찌하여 망각했는지 알기 위해,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성찰하고 탐구하는 인간은 개인이 가진 힘을 행사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이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 장의 화자는 보다 적극적인 행위 주체이며 지성인에 가깝게 보인다.이렇듯 쥐스킨트는 첫번째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확장되며 이어지는 질문의 답을 ‘읽고 쓰기’로 정의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읽는 행위, 그럼으로써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쓰는 시간. 그것으로 개인은 절대적인 힘에 맞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낼 수 있다. 서론에서 밝혔듯, 『깊이에의 강요』에서 쥐스킨트는 미시적 관점을 세번째 장에서 거시적인 물음으로 확장한 뒤, 네번째 장에 이르러 개인적 경험에서 해답을 찾음과 동시에, 개인은 숙명적으로 틀 속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저자와 표제는 생각나지 않지만 시구를 떠올리고서 삶의 변화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쥐스킨트는 필연적 망각을 인지하고 절망하고 이내 다시 희망을 찾지만, 마지막에 또다시 망각하고 말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순간 저자와 표제는 생각나지 않지만, ...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비판적 의식과 훈련으로 상황을 타개해나갈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지만 결국은 그조차도 거대한 힘 속에 있음을 놓치지 않고 상기시키며 그는 작품을 끝맺는다. 그는 ‘의지’를 주축에 두고 단편집 안에서 하나의 원을 그린다. 그리고 그 원은 읽고 쓰는 행위, 문학이 갖는 의의와 효용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아직도 문학은 단지 개인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김수빈



*파트리크 쥐스킨트, 「문학적 건망증」, 『깊이에의 강요』 (파주시: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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