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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Nov 09. 2022

우리는 회현동에서 삼계동까지 걸어갔다

〔커피값 프로젝트〕 초봄호 2021. 03. 15. Mon.


전포동에서 커피를 마시고 책은 장전동에서 보고 밥은 광안동에서 먹은 뒤, 차가 끊겨 괘법동까지 걸어갔다. 이렇게 말하면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다.

새벽 봄바람에 취해 금호동에서 상무지구까지 걸어갔다. 이 문장을 보고도 그것이 딱 좋은 산책이었을지 객기 부리다 나가떨어졌을지 단박에 가늠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하동에 살고 어방동에 살고 산격동 봉계동 월평동 분평동 부곡동에서만 평생을 살아왔는데, 내가 머문 곳이 어떻게 묘사되고 활용될 수 있는가는 본 바 없고 이태원 풍경 가로수길 가게 압구정동 거리 성실하게 상상해보는 데 익숙하다. 손잡고 청계천 산책하는 기분과 퇴근 후 한강변 달리는 삶에 대해서는 가진 모든 자료들을 총동원하여 그려보는데, 내가 매일 걷는 해반천과 자전거 타기 좋은 낙동강변과 윤슬이 멋진 풍암동 연못은 그 누구도 눈 여겨 보지 않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노을빛 가까이 찾아 들어간 삼락공원 전경 바라보면서도, 햇빛 좋을 땐 그보다 평화로울 수 없는 해반천 산책하면서도, 괘법르네시떼역 골목 구석에 조용히 위치한 카페에서 글 쓰면서도 이곳 바깥 서울을 아쉬워한다. 충분히 조명 받지 못하고 주제되지 못한 채, 한 쪽에만 떨어지는 핀 조명과 어느 한 곳만 샅샅이 보여주는 돋보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내가 있는 이곳은 어딘가 짝퉁 같고 미완 같고 충분치 못한 것 같아진다.

발전하는 중이라는 말에는 이대로는 부족하다는 뜻이 깔려 있다. 그 방향이 명백한 대상을 향해 있는 경우에 그렇다. 그런 경우에는 ‘발전하다’에서의 ‘더 낫고 좋은 상태’나 ‘더 높은 단계’는 특정한 하나의 사례를 의미하게 되는데, 이미 가진 고유한 모양을 깎아 그것을 닮아가려 할수록 개발은 개발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개화에 머문다. 어떤 하나가 유독 특별하고 보편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실은 모든 것이 고유하고 유일한데 단지 다른 모든 것들이 그 하나에 비해 충분히 고려되거나 다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살지 않는 우리가 서울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데 반해 우리가 사는 곳들은 지방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불친절해지려고 한다. 괘법동에서 망미동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 거리라는 사실과 해반천이 삼계동에서 회현동까지 이어져 흐르는 기다란 시내라는 것, 전포동은 젊음과 금 간 벽에 걸린 빨랫줄이 대비되는 동네라는 설명은 굳이 쓰지 않았다. 글 한 편을 쓰는 데 필요한 묘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지명이 아니기 때문에 추가로 해명하게 되는 노파심을 경계했다. 누군가는 검색해보거나 그냥 넘기거나 생생하게 몰입되지 않는다고 느끼겠지만, 분명 누군가는 알아보고 즐거워하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런 경험이 생경하고도 반가울 것이다.


가끔 독자로부터 이런 메일을 받는다. 나도 어디에 사는 사람인데, 글 속에 등장한 동네 이름이 반갑고 신기했다고. 같은 공간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즐겁다고.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불친절해지고 싶다. 어느 방향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주변부에 있지만, 주변부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곳이 바로 세상의 중심부이기 때문이다. 내게 번화가란 내가 어릴 때부터 자주 가던 번화가이고, 내가 아는 산책로는 내가 늘 걷던 공원과 강변이고, 내게 도시는 내가 사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내가 앞으로 어디에 가든, 어디에서 영감을 받아 글로 쓰든 나는 계속해서 그렇게 쓰려고 한다. 그곳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마음으로, 마치 모든 사람이 그곳을 알고 있는 것처럼. 세상이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면서. 그래서 나는 어제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러 용호동에 다녀왔고, 오늘은 느지막이 일어나서 글을 쓰고 책을 읽으러 괘법동에서 주례동까지 걸어왔다.





김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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