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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 Jun 09. 2023

인생 첫 직장의 쓰리 쪽팔림 썰

이제야 웃을 수 있다.

살면서 가장 쪽팔렸던 순간이 언제인가요? 


참으로 신박한 질문이다.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질문 앞에 다른 작가님들처럼 여러 장면들이 빠르게 훑고 지나간다. 그중 하나를 고르기 전에 쪽팔임의 감정을 어떤 감정으로 정의해봐야 할까 잠시 먼저 고민해 봤다. 


나의 쪽팔림으로 모두가 즐거웠던 순간이어야 할까, 아니면 무안함이 강하게 밀려들었던 순간으로 정의해야 할까. 난 후자로 결정했다. TMI일 수도 있겠지만 MBTI로 ENFP를 담당하는 나에게 전자의 경우는 그리 쪽팔리진 않다. 오히려 뿌듯하다면 모를까.


'가장' 쪽팔렸던 순간이라고 해서 한 가지 에피소드만 떠올려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딱 떠오르는 게 세 가지가 있어서 그냥 다 적어볼까 한다. 모두 다 첫 번째 직장에서 경험한 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에.


1. 인턴 시기


나의 첫 직장의 시작은 인턴이었다. 잠시 부연 설명을 해보자면, 첫 직장에 입사할 때 사외 이사님으로 계셨던 명예 교수님의 추천으로 입사했기에 모든 처우는 입사 후에 결정되었다. 어쨌든 시작은 인턴으로 결정되었다. 인턴쉽의 첫 임무는 볼리비아 국영석유가스공사 관계자 수행이었다. 와우. 인턴에게 맡기긴 참 큰 프로젝트가 아닌가 싶겠지만, 그들 때문에 채용된 상황이었던 터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공항에서부터 공장 투어까지는 크게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그냥 관광객들에게 한국을 알리듯 가벼운 대화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문제는, 공식 석상에서 벌어졌다. 


가벼운 일과를 마치고 처음 테이블 미팅을 하는 자리. 스페인어 전공자였던 나의 임무는 통역이었다. 근데 통역이 뭐 쉽나? 안타깝게도 당시 나는 스페인어 감각이 바닥이었던 시기다. 대학원 진학 후 근 3년가량을 사용하지 않았던 탓에 머릿속에 단어가 맴돌아도 입 밖으로 잘 내뱉어지지 않던 시기였다.


결국 사고라면 사고를 쳤다. 공식 석상에서 순차 통역을 해야 하는 순간, 인사를 나누는 첫마디 이후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정말 눈앞이 새 하얘지는 경험을 해봤다. 순간 자리에 함께 계셨던 교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그다음부터 난 있었지만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솔직히 인턴이 끝나면 회사 잘릴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 첫 직장에선 그 뒤로 3년이 지나 내 발로 나왔다.


2. 신입사원 OT


신입사원 OT때 계열사 사장님 한 분이 오셨다. 등산을 좋아하신다는 그 사장님께서 이런저런 좋은 말씀을 나눠 주신 뒤 Q&A 시간이 진행될 때였다. 뭐 아무 질문이나 해도 된다길래 살짝 눈치를 보다 용기를 내봤다.


"사장님, 등산 초보자에게 추천해 주실 만한 코스가 있을까요!?"


결과는?

대차게 까였다.


"하아... 이런 질문 좀 하지 마라. 이런 건 그냥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와~, 딴 거!"


진심 짜증과 무안이 동시에 일어났던 경험이다. 아무리 사장이라지만 뭐 그렇게 까지 사람 무안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나 싶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경우를 싫어한다. 다시 떠올리니 급 짜증이 밀려온다. 


3. 사내 워크숍


나름의 우여곡절을 겪고 정직원이 되었다. 1년의 현장 근무를 마치고 서울 사무실에 출근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고 조금 늦은 나이에 입사했지만 신입 사원의 패기와 열정으로 일했다. 대략 반년 정도는. 모든 생활이 익숙해지니 긴장이 풀렸다. 역시 긴장이 풀리면 뭔 일이 생기긴 한다.


매달 한 번씩 금 토 1박 2일로 공장에서 워크숍을 했다. 일단 연구소장님과 QA 부서장님의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난 뒤 저녁식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밤 중에 영업팀 워크숍을 했다. 대표님은 꼭 그즈음 등장하셨다. 참고로 당시 전무이사였던 대표님은 해비토커였다. 한 번 입을 열면 기본 3시간이다. 


신입사원의 패기와 열정이 아닌 서열상 늘 제일 앞에 앉아야만 했던 시절. 솔직히 초반에는 대표님의 말씀이 교훈으로 다가왔던 적도 있었다. 그분은 나름 회사의 전설 같은 분이셨다.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임원까지 올라가신 분이니 스토리는 이미 완성됐고, 기술자 출신에다 영업까지 두루 섭렵하셨던 분이니 영업사원들 휘어잡는 건 일도 아닌 분이셨다. 게다가 카리스마까지 장착하셨으니 이만하면 초반에 나름 뻑 갈 만하지 않나.


그랬었는데, 긴장을 유지했어야 했는데, 제일 앞에서 결국 졸았다. 예쁘게 양손을 꽃받침을 하고 턱을 괸 체 졸았다. 그러다 한쪽 팔꿈치가 미끄러지며 책상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신속한 인사를 드리고 정신이 번쩍. 


진짜 그때 기분으로는 뭔 일 날 줄 알았다. 다행히 그냥 넘어갔다. 그날 밤 숙소에서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한 소리 들었다. '이런 X 친 놈' 욕을 하면서 얼굴 표정은 어쩐지 측은함이 서려있었다. 그때 알았다. 그들도 과거에 같은 경험을 해봤다는 것을. 그래.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해비토커가 잘못한 거다. 






지나온 쪽팔림을 공개적으로 꺼낸다는 게 썩 유쾌하진 않다. 그럼에도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보니 이젠 그냥 피식 웃음이 난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건 난 지금도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경우는 정말 싫어한다는 것이다. 


정말 한 번만 더 생각해 보고 배려하면 상대의 쪽팔림을 막아줄 수 있다. 부디 살아갈 앞날은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은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살면서 가장 쪽팔렸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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