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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Aug 27. 2019

스페인으로 출발, 그리고 새벽 런던 공항에서 벌어진 일

태양의 나라, 스페인 남부로 떠나는 가족여행 #1

이것은 믿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실이었다.

아침 8시에 출발하는 영국의 대표적인 저가 항공 이지젯을 타기 위하여, 온 가족이 새벽 4시에 힘들게 일어나 부지런을 떤 끝에 우버를 불러 타고 6시에 런던 게트윅 공항에 도착했으나, 정오를 한참 넘긴 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공항 구석의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비행기 출발이 45분가량 딜레이 될 것이라는 항공사의 문자 메시지.
새벽에 차도 밀리지 않아 공항에 일찍 도착한 우리는 체크인을 끝내고 우아(?)하게 공항의 한 식당에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로 아침을 시작한 터였고, 아들이 내 핸드폰을 가지고 노는 사이에 아내와 딸은 서점과 면세점까지 한 바퀴 둘러보고 왔더랬다.

 

아무리 항공사에서 딜레이 된다는 문자가 왔다 하더라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에, 나는 식당에서 슬슬 일어나 7시 40분쯤에 공항 전광판을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가 타야 할 항공기는 전광판 일정표에 보이지 않았다.  등골은 오싹해지고 식은땀이 온몸의 모공을 뚫고 솟아오르는 순간, 나는 50여 미터 앞에 있는 이지젯의 안내 데스크로 뛰어갔다.  쉰 살은 족히 넘었을 데스크의 아주머니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Gate closed'라고 내뱉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네가 비행기가 딜레이 될 것이라고 문자까지 줬잖아요.'

'저는 그건 잘 모르죠. 어쨌거나 정시에 출발할 거고 전광판에 게이트가 마감이라고 떴다면 그게 맞아요.'

순간 당황한 나는 그럴 리가 없다며 핸드폰을 열어 항공사 앱을 확인했는데, 아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놀던 그 짧은 사이에 '비행기가 정시 출발하게 되었다'는 안내문이 떡- 하니 와 있었다.

아침 식사로 에그 베네딕트를 먹으며 우아하고 여유롭게 비행기를 기다렸더랬다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내 데스크에 이게 말이 되는 것이냐고 하소연을 했더니, 이 아주머니는 걱정하지 말라며, 잠시 후에 자기 동료 한 사람이 와서 우리를 데리고 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선진국인데 이대로 모르는 척하지는 않겠지.'

이렇게 생각한 나는 가족들을 안심시키면서 그 아주머니가 지정해 준 안내 데스크 앞의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 이미 내가 탔어야 할 비행기는 하늘로 높이 올라가 버린 8시 20분쯤 되어서야 한 명의 직원이 걸어와서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물었다.

'이지젯을 놓치신 승객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가족 외에도 서너 명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직원은 이 불쌍한 처지의 사람들 한 무리를 인솔해서 복잡한 계단과 복도를 한참 걸었다.  시무룩하게 아무 말 없이 10여 분을 따라 걸었는데, 가만히 보니 우리는 항공사 직원들이 다니는 통로를 통해 입국 심사를 받고 다시 밖으로 나가고 있던 것이었다.  


세상에, 2시간 전에 출국 심사를 받은 곳에서 다시 입국 심사를 받아 돌아 나오다니...  입국 심사대에 줄을 서 있는데 너무 화가 나서 걸리는 사람이면 모두 쥐어 패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핸드폰을 가지고 놀던 아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만, 순진하게 '왜 못 가는 거야?'라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아들도 너무 원망스러웠고, 무엇보다 여행에 자신이 있다며 자만했던 나 자신이 너무 싫었으며, 온몸으로 분노를 참고 있는 아내의 눈초리도 너무 신경이 쓰였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지젯 직원은 서비스 데스크로 우리를 안내해 주고는 해맑게 웃으며 '바이 바이~' 인사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한국이라면 항공사 직원을 붙잡고 통사정을 하든지 화라도 내 보든지 하겠지만 여기는 그런 것들이 통하지 않는 영국이다.  자포자기 상태로 서비스 데스크에서 확인해 보니, 현재 좌석이 있는 가장 빠른 말라가 Malaga행 비행기가 이틀 후 오후에 있다고 한다.  스페인 말라가의 근교 도시로 가는 모든 항공편을 찾아봐도 죄다 내일 오후 이후에나 비행기가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항공편으로 추가 발권을 하려면 인당 80 파운드나 더 내야 했는데, 이만큼 더 돈을 낸다 하더라도 내일 저녁 전에 스페인까지 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유럽은 부활절 기간이 여행의 최대 성수기 중 하나라는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반년 전부터 준비했는데, 그 모든 노력이 순간의 부주의로 무의미하게 생겼다.


나는 이대로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른 항공편이라도 알아보기 위하여 공항의 모든 항공사 데스크를 뒤졌는데, 한참 후에야 오후 4시 반에 출발하는 또 다른 저가 항공사에 4개의 빈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속으로 '만세~!!'를 외치며 발권을 해 달라고 했더니, 컴퓨터 화면에 대고 마우스 광클릭을 하던 데스크 직원이 살짝 난처한 표정으로 한 마디 던졌다. '어- 이거 지금 막 팔려버렸네'.


쿵! 나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현장에 없으면 인터넷까지 뒤져봐야 한다는 생각에 온갖 앱을 뒤졌고, 결국 last minute 항공권을 파는 곳에서 '방금 다 팔려 버렸다'던 그 항공사의 표 4장을 가까스로 구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표를 구입했다고 바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산 연동이 매우 느리기 때문에 표를 사고도 한참 동안 가슴 졸이며 예약이 확정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드디어 예약이 확정되었다는 이메일을 받은 순간, 나는 팔다리에 힘이 쫙 빠져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4장의 티켓을 살 수 없었다면 나는 결혼기념일을 공항에서 보낼 판이었다.  바로 다음날인 결혼기념일에 스페인의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하려던 게 이번 여행의 큰 의미였는데, 마지막에 건진 이 표가 아녔다면 그야말로 모든 게 산산조각 날 뻔했다.


태양이 작렬하는 남부 스페인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에, 온 가족은 공항의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사다 먹으며 구석진 벤치에 자리를 하나씩 잡고 앉아서 그로부터 5시간 후에 출발할 비행기를 기다려야 했다.  반년 전에 인당 100파운드도 안 되는 돈에 산 항공권인데, 서비스가 안 좋기로 유명한 또 다른 저가 항공기의 티켓을 무려 3배나 더 주고 샀어야 했다.  집사람은 명품 하나 살 돈을 공중에 날려 버렸다며 허탈해했지만, 이를 어쩌겠는가,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했다.

공항 벤치에서 몇 시간이고 비행기를 기다리는 아이들

시간도 많겠다, 샌드위치와 커피로 다소 정신을 차린 나는 한참 떨어진 곳의 이지젯 서비스 센터를 다시 찾아갔다.  여러 상황상 억울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고, 딜레이 문자로 피해를 봤으므로 최소한의 보상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서비스 데스크에 도착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따져 물었다.

'당신들이 보낸 딜레이 문자 때문에 내가 정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못 탔으니 보상을 받아야겠소.'

처음에 상냥하게 대응해 주던 직원은 한참을 다툴 것도 없이, 몇 분 만에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당신 상황은 안됐습니다. 하지만 250명이 정상적으로 탄 것으로 나오는 만큼, 저희가 해줄 것이 없네요. 공항에 와서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은 승객의 의무입니다.  고객센터 전화번호 줄 테니 원한다면 그리로 전화를 해보시죠.'

주먹이 부르르 떨렸지만 이 사람들과 싸워봐야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벤치로 돌아온 나는 밤늦게 도착할 말라가를 상상하며 비행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결혼기념일에 스페인에 있을 수 있다는 점에 위안이 좀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세비야의 부활절 축제와 죽기 전에 한번 가봐야 한다는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향한 여정의 첫날이 너무 순탄치 않았다.  새로 잡은 비행기마저 놓칠까 노심초사한 아내는 출발 한참 전부터 아이들을 다그치며 줄을 섰다.  5시가 되어서야 하늘로 오른 소형 비행기는 3시간가량 날아 저녁에 말라가 근교의 공항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자, 이제는 미리 예약해 둔 렌터카를 받아야 했다. 예약된 시간보다 많이 늦었지만 렌터카 회사에 미리 전화를 해둔 덕에 차는 별문제 없이 받았는데, 초행길인 데다 밤길 운전이었고 내비게이션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말라가의 리조트까지는 또 한참을 헤매면서 운전해야 했다.  소형 리조트인지라 밤늦은 시간이 되니 정문의 문이 닫혀있었고, 주변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 외에는 어떤 소음도 없는 조용한 곳이어서 근처에 차를 세우고 확인 전화도 두어 번 해야 했다.


그 난리를 치르고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나니 어느덧 밤 11시를 넘긴 시간.

'그래도 결혼기념일 전날에는 들어왔네'라는 안도의 한숨도 잠시, 3시간 거리의 휴가지를 두고 하루 종일 길바닥에서 헤매느라 지친 가족들은 모두 꿈나라로 가버렸다.

숙소 앞의 지중해 바다. 다음날 아침에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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