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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Aug 28. 2019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하얀마을, 미하스

태양의 나라, 스페인 남부로 떠나는 가족여행 #2

태양의 나라, 스페인 남부로 떠나는 가족여행 #2

스페인 남부, 태양의 해변(Costa del Sol) 한가운데에 위치한 말라가는 강렬한 햇빛과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 가성비가 훌륭한 수준급의 리조트가 많다.  

전날은 밤늦게 체크인을 하느라 잘 몰랐는데, 아침에 가볍게 둘러본 리조트는 아담하면서도 상당히 깨끗하게 정비된 곳이었고, 별 기대하지 않았던 조식 레스토랑에서 맛 본 훌륭한 커피는 전날 런던 게트윅 공항의 트라우마를 가라 앉히기에 충분했다.

다만, 한 가지 이슈가 있었으니 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들이 오늘은 하루 종일 리조트의 수영장에서 놀 것임을 대대적으로 천명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여행 계획을 짤 때 간과했던 점으로, 이후 일정에 큰 지장을 주게 된다.

아침식사 후 산책하며 바라본 리조트


아무리 지중해에 면한 따뜻한 지역이라고 해도, 4월의 공기는 아직 시원함을 넘어 쌀쌀함마저 주는데, 아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풀에 풍덩, 입수하였다.  사춘기가 한창인 딸은 이런 날씨에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 일갈하고는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수영장 옆 벤치에 앉았다.  먹구름에 간간히 비까지 흩뿌리는 으스스한 날씨 덕분인지, 아들은 오전 내내 아무도 없는 넓은 리조트 수영장을 온전히 독차지하며 그간 배웠던 수영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말라가의 리조트. 아침에는 잔뜩 흐렸지만 오후에 화창하게 개었다.


반나절 정도 아이들을 리조트 수영장에 두었다가 주변을 돌아보려 했으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인도어 풀과 야외 수영장을 오가며 물놀이에 심취한 아들 덕분에 거의 온종일 숙소에 잡혀 있다시피 했다. 오전에는 잔뜩 흐린 날씨였지만 낮이 되면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었고, 아들 녀석도 또래의 스페인, 영국 친구들을 사귀면서 본격적으로 물속으로 들어갔더랬다.

리조트는 수영장 외에도 미니 골프, 축구, 테니스 등 여러 가지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와이파이는 거금 6유로나 내야 하는 유료 서비스였다.  이게 믿어지지 않아 리셉션에 몇 번이나 확인을 했는데, 돈을 내야 한다는 대답뿐. 마치, '웬만하면 전자기기는 꺼두시고 여유를 가지시죠'라고 핀잔을 주는 느낌이었다.


미하스 Mijas

뿌에블로 블랑까 Pueblo Blanca 즉, 하얀 마을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의 전통 주택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작렬하는 태양빛을 반사시켜 조금이라도 시원하기 살아 보고자 온 마을을 흰색으로 도배한 것일까, 이 마을들은 전체가 하나같이 흰색이다.  그중 백미라 불리는 미하스 Mijas가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음에도, 수영장에 꽂힌 아들을 비롯하여 가족들에게 한번 가보자고 설득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들었다.

뿌에블로 블랑카의 백미라 불리는 미하스 Mijas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점심은 맛있게 먹자는 핑계로 가족들을 미하스 가는 길 중간에 있는 바닷가 마을 푸엔히롤라 Fuengirola로 이끌었다.  음식문화가 형편없는 영국에 살아서인지, 뭐든 맛있기로 유명한 스페인에 온 이상 나는 유독 식도락을 중시했다.  멋지고 훌륭한 곳을 미리 예약하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곳에 대충 들어가 앉으면 신선한 해산물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호언장담에 가족들은 반신 반의 하면서 따라나섰다.  약간의 문제라면 딸이 채식주의를 선언했다는 점인데, 유럽은 어떤 식당이든지 채식이 준비되어 있다며 침을 튀겨가며 설득에 설득을 했다.


대충 눈에 보이는 해산물 전문점에 들어가 빠예야와 엔초비 튀김, 새우구이 등을 시켰는데, 엔초비 튀김은 너무 재료의 특징을 살려낸 것인지 비린내가 난다는 둥, 보기에 흉측하다는 둥 가족들이 손사래를 쳐서 나 말고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식당은 마치, 샌프란시스코 부둣가의 게를 쪄서 파는 수산시장처럼 어수선하고 그다지 깔끔하진 않았다.  빠예야도 특유의 구수한 샤프란 향은 좋았지만 해산물이 충분히 익지 않았고, 새우튀김은 생각보다 느끼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서둘러 식사를 마쳤는데, 5시까지는 다시 수영장에 돌아온다는 것이 아들과의 철석 같은 약속이었으므로, 마음이 급해진 나는 서둘러 미하스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샤프란 향이 그윽한 해산물 빠예야와 재료의 특징이 살아있는 엔초비 튀김.  아이들은 빠예야를 바닥까지 긁었지만 엔초비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미하스는 태양의 해변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다.  운전대를 잡고 산 아래에서부터 눈부시게 빛나는 온통 하얀색 마을에 감탄하며 마을 입구로 들어섰는데, 산 위의 마을이라서 그런지 해변 쪽에 비해서 기온도 낮아 훨씬 시원했다.  예전에 지리산을 종주할 때, 능선에서 산을 타고 넘는 구름을 보면서 감탄한 적이 있는데, 이 곳에서도 구름이 끝없이 마을을 휘감고 돌아 나가면서 제법 신비로운 풍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마을은 그다지 크지 않아서 한 바퀴 돌아보는데 한 시간 가량 걸렸다.  온통 수영장 생각뿐인 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물려가며 위쪽 전망대와 마을 한가운데 광장까지 구석구석 돌아보았는데, 관광객들을 싣고 다니는 마차의 말도 흰색이었고, 후미진 골목 구석까지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두었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마을은 온통 흰색이다
미하스에서 내려다 본 말라가 방향


새하얀 벽에 대비되는 파란색 화분과 빨간 화분도 색다른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곳에는 바위 성모 은둔지 성당(Ermita de la Virgen de la Pena)이 있다고 하는데, 약속한 시간에 쫓겨 동굴의 성당에는 가 보지 못했다. (성당이 자리한 성벽에는 수백 년 넘게 성모 마리아 상이 숨겨져 있다가 16세기에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미하스의 골목
먹구름 가득한 골목길을 걸으며


미하스에서 걷다 보니, 점심 먹으려 푸엔히롤라에서 주차하랴, 식당 찾으랴 보낸 시간들이 아까워졌다. 미하스는 그만큼 한적하면서도 온통 흰색으로 뚜렷한 존재감을 뽐내면서, Costa del Sol의 푸른 바다와 해안선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푸엔히롤라의 타파스

이유야 어쨌거나 점심식사의 실패(?)는 가족여행 가이드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사건이었다. 난 신선한 엔초비 튀김이 참 좋았는데, 입맛 까다로운 우리 가족 분들은 입도 대지 않으셨으니 실패다.  저녁의 식도락은 밤 8시 반까지 기어이 수영을 해야겠다는 아들에 대한 도전이자, 점심 사태로 인해 극에 달한 아내의 불신을 반드시 극복해 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미션이었다.  더구나, 오늘은 우리의 17주년 결혼기념일이란 말이다. 아내는 아들의 수영 시간도 있으니 그냥 리조트의 '피자리아'에 가자는 입장인데, 산해 진미의 땅 남 스페인에서 리조트 피자집을 가자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나는 '애정 하는' 여행 관련 앱을 30분이나 노려본 끝에, 푸엔히롤라 해변에 타파스가 훌륭하다는 자그마한 식당을 하나 찾아냈고, 7시 45분으로 예약을 하게 된다. 일요일엔 저녁 9시 반에 문을 닫는데, 8시 이후로는 예약이 안된다고 하니 이 또한 운명일 터이다.  당초 리조트 컨시어지는 길 건너편 해산물 식당을 강력 추천했으나, 검색 신공을 아무리 돌려봐도 평범한 관광지 횟집 느낌의 그 집은 내 기준에 한참 미달이었다.


피나는 설득작업으로 아들을 수영장으로부터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 나는, 가족들의 다소 따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가까스로 예약시간에 맞추어 식당에 입성할 수 있었다. 식당은 규모가 아주 작아서 테이블은 몇 개 없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음식이 내공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내가 카바 Cava 한잔에 잠시 여유를 가지는 동안 나의 모든 감각은 메뉴판을 분석하고 있었다.  결국, 타파스 5종 세트와 연어구이 시저 샐러드가 낙점되었고, 아이들은 스파게티로 대동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집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메뉴판이 거울이라는 것. 아들이 주인장에게 물었다.

'왜 메뉴가 거울에 있는 거예요?'

'오, 그건 네가 너의 멋진 얼굴을 보면서 음식을 고르라고 그런 거야.'

거울이 메뉴인 식당
혀의 맛세포를 모두 일깨우는 정갈한 타파스
제공되는 타파스는 매일 바뀐다고 한다.


주인장은 정말 유머와 위트가 넘쳤는데, 우리 가족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더니 자기 셀카를 먼저 찍는 개그 본능도 보여 주셨다. 타파스 저녁식사는 대성공이었다. 우리는 심지어 디저트 타파스 5종까지 연달아 흡입했고, 아이들은 스파게티를 싹싹 긁어먹는 바람에 난 맛도 못 봤으며, 아내는 이 집이 모든 소스가 훌륭하다며 카바를 한잔 더 했다. 

내가 운전을 해야 해서 물만 마셔야 하는 상황도 아내의 만족도에 고급 소스를 더하는 모양새였다.  이로써, 지난 1박 2일간의 어마어마한 시련을 딛고, 결혼 17주년 기념일 저녁은 모든 가족이 행복하게 그리고 맛있게 보냈다고 안도하였다.  하지만 아직, 폭풍은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내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으시는 주인장과 밖에서 안에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는 또 다른 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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