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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Feb 29. 2020

하늘이 내린 절호의 기회,  융프라우 가는 날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고 지킨 자연의 나라, 스위스로 떠나는 가족여행 #3

스위스에서   곳을 가라고 한다면 누구나 융프라우(Jungfrau) 꼽는다.

스위스 베른 알프스의 주봉인 융프라우(해발 4,158m)는 아이거(Eiger, 해발 3,967m), 묀히(Mönch, 해발 4,107m)와 함께 나란히 병풍처럼 서 있어 베른 알프스 3형제 중 맏형으로 불리며 유럽 대륙에서 가장 큰 빙하인 알레치 빙하(Aletsch Glacier)를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이다.


융프라우 - Jungfrau는 처녀, 즉 Virgin이라는 의미로 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깨끗하고 성스러운' Virgin을 수도사(묀히 = Monk)가 도깨비(아이거 = Ogre)로부터 지키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고.

3형제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니 가운데 서 있는 수도사가 처녀를 도깨비로부터 지키고 있다니 아이러니컬하다.

하지만 실제 융프라우 명칭은 원래 인터라켄 산기슭에 있던 수녀원에서 파생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융프라우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단연 융프라우 철도 때문이다. 스위스인들은 1896년에 아이거 산 아래 클라이네 샤이덱(Kleine Scheidegg, 해발 2,061m)부터 아이거와 묀히의 지하 암반 지대를 통과하여 융프라우요흐(Jungfrauhoch, 해발 3,454m) 능선에 닿는 터널 공사에 착공해 16년 후인 1912년에 기어이 터널을 뚫어내고 정상에 올라섰다.

융프라우요흐의 스핑크스 전망대(Sphinx Observatory)에는 공사 과정에서 폭발 사고 등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터널과 작은 추모 명패들을 볼 수 있다.

융프라우 철도를 건설 중인 1900년의 인부들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스위스인들이 건설한 이 산악철도 덕분에 등산은커녕 걷지 못하는 사람들도 알프스 정상에 올라 만년설과 빙하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느 누가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있으랴.

이후 융프라우 철도 회사는 10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주변의 여러 관광자원을 개발했을 뿐 아니라, ‘유럽의 정상(Top of Europe)’이라는 브랜딩을 내세워 여러 가지 고급 브랜드들과 콜라보레션 관광 상품을 개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메가 시계와 콜라보한 융프라우 (사진출처 : junfrau.ch)


한편, 융프라우와 융프라우요흐를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두 지명은 다르다. 요흐(Joch)란 ‘두 봉우리 사이의 능선(ridge between two higher peaks)'이라는 뜻으로 융프라우요흐는 4천 미터가 넘는 2개의 알프스 고봉(융프라우와 묀히) 사이에 말안장처럼 얹혀있다.

따라서 기차로 융프라우에 올라간다 함은 융프라우요흐에서 융프라우 산을 감상한다는 뜻이다.

융프라우요흐의 스핑크스 전망대(Sphinx Observatory). 전망대 왼쪽에 묀히, 오른쪽에 융프라우 산이 있다. (전망대 벽에 있는 사진)


20여 년 전 힘들게 간 유럽 배낭여행에서 나는 일정과 예산 문제 때문에 융프라우는커녕 스위스라는 나라 자체를 제대로 여행하지 못했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융프라우를 포함하여 그 주변의 알프스를 둘러보는 것이었으므로, 이날의 일정은 스위스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되어야 했다.  

문제는 과연 날씨가 도와줄지 여부였는데, 3대가 덕을 쌓아야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다는 융프라우에 이날 하루를 제외하고는 일주일 내내 매일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전 날 새벽에 런던을 출발하여 라인 폭포와 루체른을 돌아본 강행군으로 몸은 이미 물에 젖은 솜이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맑다는 이날 융프라우에 오르지 못한다면 '이번 생'에는 알프스 최고의 절경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조급한 마음에 몸을 일으키고 아이들을 깨웠다.

호텔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숙소를 예약해 둔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으로 서둘러 길을 잡았다. 라우터브루넨은 인터라켄에서 베른 알프스 중턱으로 좀 더 들어간 협곡에 있는 마을로 융프라우요흐에 오르기 위한 베이스캠프이다.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으로 가는 길

아이들을 재촉하여 차에 올라 출발하자마자 눈 앞에 파란 하늘과 멀리 알프스의 산봉우리가 나타나는 순간 갑자기 '땡땡땡' 종소리가 나며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며 기찻길 차단기가 내려온다.

천천히 지나가는 빨간 전철마저 흰 구름이 살짝 낀 하늘이며 초록빛 산과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스위스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눈을 돌려도 아름다운 경치가 나타난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이 내 마음을 모르고 인터라켄으로 가는 빠른 길을 알려 주는 바람에 나는 일단 시원하게 뻗은 8번 고속국도에 올랐다. 하지만 '빠르다'의 문제는 경치를 볼 수 없다는 것. 아니나 다를까, 이 도로는 나를 계속 직선 터널로 끌어당겼다. 터널이 길어도 너무 긴 데다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터널 입구가 나타났다.

출발 전에 지도로 확인해 본 루체른에서 인터라켄까지의 운전 구간은 호수와 산을 통과하는 곳이라 내심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는 드라이빙을 기대했는데 이건 아니었다.

20여 분을 달리던 나는 참다못해 어느 이름 모를 마을길로 빠져나와 지방 도로 위를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했지만 호수와 산을 끼고도는 스위스 지방 도로 옆의 풍경은 기가 막혔다. 중간중간에 차를 세워 내려서 아름다운 주변 풍경을 눈에 담기도 하고, 푸른 산으로 둘러싸인 에메랄드 빛 호수에서 낚시를 즐기거나 패들링 또는 요트를 타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여유를 부러워했다.

멀리 보이는 산 중턱에는 오두막 집이나 창고들이 흩어져 있었고 가까이서 본 호수는 한참 아래까지 들여다 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했다. 루체른에서도 도시의 강이 이렇게 맑을 수 있나 싶었는데,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스위스의 강태공
룽게른 호수에서 보트를 나는 사람들


길은 4번과 8번 국도가 몇 번 조우하다가 인터라켄으로 이어지는데, 지역으로 보면 루체른에서 출발하여 옵발덴을 지나 융프라우가 있는 베른 주로 들어가게 된다. 옵발덴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룽게른(Lungern)이라는 마을을 지나 산길로 올라설 때, 앞쪽 관광버스가 서 있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서 카메라를 들고 있길래 호기심이 발동해 차를 세웠다.


주행 방향의 오른쪽이라 운전하느라 몰랐는데 내려서 보니 룽게른 호수가 장관이다. 이 곳이 바로 쉔뷔엘 뷰잉 포인트(Viewing Point Schoenbuehel; Schönbüel)로 아름다운 스위스를 상징하는 사진에 자주 등장한다. 하이디가 살았을 것 같은 아름다운 산과 호수, 마을이 눈 앞에 펼쳐지니 한동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차로는 갈 수 없는 곳에서 의도치 않게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렌터카 여행의 매력이다.  

쉔뷔엘 뷰잉 포인트(Viewing Point Schoenbuehel)에서 본 룽게른 호수와 마을


룽게른에서 얼마 안 가 도착한 인터라켄은 생각보다 도시가 커서 교차로를 빠져나오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인터라켄에서 라우터브루넨으로 올라가는 길은 이미 가파른 산길로, 한국에서 한참 캠핑을 다닐 때 좋아했던 강원도 양양의 한 캠핑장에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2000년 대 중반, 한국에서 입식 캠핑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도 전에 나는 아직 첫돌이 지나지 않은 둘째까지 데리고 사계절 내내 캠핑장으로 나갔었다. 국산 장비들은 아직 가짓수가 적고 완성도가 떨어져 일본과 미국, 유럽산 고가의 캠핑 장비를 사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캠핑장을 향해 내달리던 설레는 기분을 떠올리며 얼마 남지 않은 라우터브루넨을 향해 신나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미리 잡아둔 라우터브루넨의 숙소에 도착하고 보니 시간은 이미 정오를 넘어서고 있었다. 작은 부띠끄 산장 같은 숙소에서는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여자 주인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 영국에서 오셨군요! 반가워요, 나는 뉴캐슬 출신이에요!'

내가 영국인도 아닌데 고향 나라에서 왔다고 반갑다며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모습이 영락없는 우리네 '아줌마' 같았고, 나는 나대로 독일식 영어만 내내 듣다가 강한 영국 악센트를 들으니 정겨웠다.


하지만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호텔은 체크인 시간이 오후 4시라 당장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선 차라도 대놓고 빨리 융프라우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주차장이 어디인지 물었더니, 주인장은 전날 묵었던 손님이 떠났는지 확인해 보자며 집 뒤의 언덕으로 나를 이끌었다.

승용차가 네다섯 대 가량 주차할 수 있는 언덕 위 뒤뜰에는 마침 빈자리가 딱 하나 비어 있었고 이걸 본 주인장이 ‘럭키!’라고 소리치며 흔쾌히 주차를 허락해 주었다. 살인적인 주차비를 아낄 수 있어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라우터브루넨은 주차장에서 본 마을 풍경마저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아름다웠다. 절벽 아래 구릉을 따라 늘어선 집들을 보니, 캐나다의 로키산맥 속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중후 장대하기만 한 북미와는 또 다른 스위스만의 풍경이 인상적이다.

숙소 주차장에서 바라본 라우터브루넨 마을 전경


우리 숙소에서 마을 안쪽으로 흘깃 보았더니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슈타우바흐 폭포(Staubbachfall)가 유독 눈에 띄었다. 산신령이 나올 것만 같은 이 높고 가는 물줄기는 라우터브루넨의 랜드마크이다. 다만, 도착한 오후 시간에는 얼른 융프라우로 출발을 해야 해서 제대로 보지 못했고 나중에 밤 산책 삼아 폭포 앞을 다녀왔다.

라우터브루넨 슈타우바흐 폭포의 전경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융프라우요흐 가는 길

융프라우의 1차 베이스캠프로 유명한 인터라켄(Interlaken)부터 융프라우요흐까지는 기차를 2번 갈아타야 올라갈 수 있다. 그중 첫 번째 환승지는 라우터부르넨과 그린델발트(Grindelwald)라는 2개의 마을로 나누어지며, 인터라켄을 출발점으로 했을 때 어느 마을로 가더라도 두 번째 환승지인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융프라우행 산악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이날 라우터부르넨에서 묵고 다음날은 그린델발트에서 하루 머무를 계획이었다. 두 마을 모두 한번 스쳐만 지나가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융프라우를 오르기 위해서는 라우터브루넨이나 그린델발트를 거쳐야 한다, (구글 위성사진 캡처)


일단 숙소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기차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기차 티켓도 못 샀는데 하루가 반이나 지나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아이들도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하고 별말 없이 따라줘서 고마웠다.

라이터브루넨 기차역으로 잰걸음


라우터브루넨의 메인 스테이션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융프라우 철도 VIP 패스 2일권을 끊었다. 이 패스로 융프라우는 한 번만 갈 수 있으나 인터라켄 주변에서 기차와 케이블카 등 대중교통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아이들은 한 명당 30프랑이니 이틀간 교통비 치고는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느낌이었다.


한편, 지인의 조언에 따라 융프라우 철도의 한국 총판(동신항운)이라는 온라인 사이트에서 할인쿠폰을 신청해서 받아 왔는데, 이 할인권은 스위스 패스(Swiss Pass) 보유자가 아님에도 융프라우행 산악열차 30% 할인 혜택과 정상 매점에서 신라면(컵라면)을 먹을 수 있는 쿠폰, 그리고 전망대 기념품점(주인장이 한국인)에서 간단한 기념품을 받을 수 있는 큰 선물이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은 이때 쓰는 말이렷다.

융프라우요흐 전망대에 가보면 모든 한국인들이 컵라면을 먹고 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는데 다 이 사이트 덕인 듯.


융프라우로 가기 위해서 우선 클라이네 샤이덱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고, 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먼저 벵엔(Bengen)이라는 마을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산 중턱에 있는 벵엔까지 실제 거리는 얼마 안 되지만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기차가 직선으로 오를 수 없다. 옛날 동해선 기차가 태백산맥을 넘어가듯 기차는 지그재그로 산을 올라 벵엔으로 향했다. 라우터브루넨에서 벵엔까지는 등산로도 잘 되어 있다는데 맑고 시원한 날이라서 그런지 도보로 오르는 사람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기차 창 밖으로 보이는 라우터브루넨 계곡과 멀리 눈 덮인 브레이트호른(Breithorn, 3,780m) 산의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브레이트호른은 ‘라우터브루넨의 벽’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벵엔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바라본 라우터브루넨 계곡과 브레이트호른(Breithorn) 산


벵엔을 거쳐 클라이네 샤이덱에 가까워지면 진행방향 오른쪽에 만년설로 덮인 알프스 3형제의 산봉우리들이 눈 앞에 나타난다. 하얀 눈이 반쯤 녹은 채 덮여 있는 짙은 잿빛의 거대한 산들이 초록색 고원 위에서 마치 거인의 병풍처럼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저 위를 기차가 올라간다고?'

나무 하나 없이 눈과 얼음만 덮여 있는 저 험준한 산 위로 100여 년 전의 스위스 사람들은 어떻게 기찻길을 놓을 생각을 했을까? 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이 나라 사람들의 도전 정신에 말문이 막혔다.

기차 창 밖으로 보이는 영봉. 저 산은 묀히일 것이다.


우리는 곧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내렸다. 기온이 살짝 내려갔지만 햇빛이 좋아서 그런지 쌀쌀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다만, 환상적인 날씨에 융프라우를 오르려는 사람이 많아 역은 상당히 혼잡했는데 특히 중국 관광객들이 넘쳐났고 한국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위스 알프스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이 실감 났다.


차이점이라면 중국인들은 아직 수십 명 단위의 그룹 여행이 많은 반면 한국인들은 대부분 2-3명씩 다니는 자유여행자였다. 중국도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여행의 패턴이 서서히 바뀌고 있으니 앞으로 5년 내외면 자유 여행이 크게 늘 것이다. 그들의 글로벌 에티켓도 같이 좋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혼자 피식 웃었다.

 
클라이네 샤이덱 앞에 우뚝 선 묀히와 융프라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을 때, 유난히 딸랑딸랑 종소리가 크게 들려 돌아보았다.

기차역 뒤편 언덕에서 소 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게 아닌가. 2천 미터가 넘는 고원의 소떼라니, 여기야 말로 그림에서 보던 알프스 목동의 고향이구나 싶다.

클라이네 샤이덱 역 근처에서 풀을 뜯는 소 떼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해발 3,454m 지점의 융프라우요흐까지 가는 마지막 철도 구간은 처음 2km는 초원 지대를 오르지만 나머지 7km는 거대한 아이거와 묀히 산 아래 뚫려있는 터널을 지나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기차역에 도착한다.

 

초원 지대 끝에서 터널 구간으로 진입하기 전에 나타나는 지상의 마지막 역은 아이거글레쳐(Eigergletscher)이다.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여기까지는 걸어서 40분에서 1시간가량 걸리는 트레킹 코스가 있어서 산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사실, 클라이네 샤이덱은 라우터브루넨과 그린델발트를 연결하는 알프스 하이킹 코스의 중간 지점이자 겨울에는 스키장의 중심 역할을 한다고 한다. 알프스 하이킹은 내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이다.

아이거 산의 터널로 진입하기 전의 구간. 오른쪽에 트레킹 코스가 보인다.
아이거글레쳐 역에서 바라본 아이거의 직벽


드디어 기차가 터널 구간에 진입했다. 창 밖을 볼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기차에서 상영하는 융프라우 철도에 대한 홍보 동영상을 보게 되는데, 보면 볼수록 어떻게 인간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융프라우 철도는 스위스의 철도왕이자 기업가, 엔지니어인 아돌프 구에르-첼러(Adolf Guyer-Zeller)가 1894년에 건설에 대한 허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아무리 구상이 뛰어나다 한들 실행이 중요한데, 걷기만 해도 숨이 차오르는 이 높고 거친 곳의 암반을 뚫어낸 스위스 인들의 의지는 정말 대단하다.


동영상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갑자기 손이 시리고 추워지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물병을 보니 안쪽에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고, 주위 승객들도 너도 나도 외투를 꺼내 입기 시작했다. 해발 고도 천 미터의 차이가 이런 거였나, 달려온 시간은 10분 남짓인데 온도도 시간의 숫자만큼 내려간 모양이다.

7킬로미터의 터널을 달리므로 기차에는 현재 위치가 표시된다.


갑자기 방송이 나오더니 기차가 멈췄다. 창 밖을 내다보니 어두컴컴한 지하 역사에 아이스미르(Eismeer)라는 간판이 보였다.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역으로서 기차가 5분가량 서 있을 테니 역 플랫폼으로 내려가 창 밖으로 알프스 경치를 구경하고 오라는 방송이 나왔다.

비록 터널 안의 작은 역이지만 벽에 있는 큰 창문을 통해 알프스 산들의 '파노라마'를 감상해 볼 수 있도록 배려가 된 멋진 역이다.

 

나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나는 집사람과 아이들을 보고는 혹시 모르니 기차에 있으라고 하고 얼른 내려 창가로 뛰어가 보았다. 창 밖에는 엽서의 사진보다 아름다운 빙하와 만년설이 덮인 알프스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아이스미르 역에서 바라본 알프스


한편, 기차 안 내 앞자리에는 연로하면서도 우아한 백인 아주머니가 마주 보고 앉아 출발 전부터 카메라를 들고 연신 사진을 찍고 계셨다. 아주머니는 아이스미르 역에서 내려 창 밖을 보고 온 나를 보더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밖의 풍경이 어땠어요?’

‘오, 아주 환상적이었어요. 한번 보실래요?’

사진을 보며 한참 감탄하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와츠앱으로 내가 찍은 사진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나는 미국에서 온 테레사 아줌마와 와츠앱 친구가 되었다. 여행은 누구나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게 만든다.


아이스미르 역을 통과한 기차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종착역인 융프라우요흐 역에 도착했고, 나는 반나절 정도 시간을 잡고 ‘유럽의 정상(Top of Europe)’을 둘러볼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 꿈은 채 2시간도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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