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고 지킨 자연의 나라, 스위스로 떠나는 가족여행 #2
작지만 부유한 오늘날과 달리 중세의 스위스는 척박하고 거친 산악지대일 뿐, 농사 지을 땅은 적고 목축업 외에 별다른 산업이 없어 그 지역의 ‘산사람’들은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았다.
가난했지만 험난한 환경 덕에 신체적으로 강인했던 스위스인들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받고 전쟁터로 나갔는데, 이들은 유달리 용맹했을 뿐 아니라 다른 용병과는 달리 고용된 나라와 왕에게 끝까지 충성스럽기로 널리 알려져 여러 나라의 왕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라이슬로이퍼(Reisläufer)는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스위스 용병을 의미한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민병대를 조직하여 싸우는 등 크고 작은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스위스는 주(칸톤) 단위로 직업 군인을 양성하고 관리했기 때문에, 프랑스나 이탈리아 지역의 왕국들은 스위스 지방 정부에만 의뢰하면 전투에 단련된 프로 용병단을 고용할 수 있어 이들을 선호했다.
한편, 나라의 경제가 용병업으로 지탱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용주와의 신뢰가 깨지면 경제 자체가 무너질 수 있어 스위스인들은 한번 고용주와 계약이 되어 충성 서약을 하면 전쟁터에서 부모 형제나 친척을 적으로 만나더라도 서로 죽이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가난이 부른 슬픈 역사의 단면이다.
장창(Pike)과 미늘창(Halburd)으로 중무장한 전투 진형은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적의 섬멸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포로를 남기지 않고 무자비하게 죽였으며, 전장에서의 죽음을 명예로 여겼던 중세 유럽의 최강 전투 집단.
라이슬로이퍼는 용맹과 명예, 신뢰와 충성의 대명사로 중세 중후반에 전 유럽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들의 '자랑스러운' 전통은 오늘날 바티칸 교황청의 근위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종교개혁의 불이 활활 타올라 신교(루터교)와 구교(가톨릭)의 대립이 격화되던 중세 후반의 1527년,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는 자신을 견제하고자 반제국 연합을 규합한 교황 클레멘스 7세에 분노하여 로마 교황령 침공을 명하였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의 주력 부대는 라이슬로이퍼에 대적하기 위해 독일 지역에서 양성된 또 다른 용병단 란츠크네흐트(Landsknechts)였다. 수십 년간 라이슬로이퍼를 벤치마킹하며 양성되어 온 독일 용병단은 이 무렵 고용과 전장에서 이미 스위스 용병의 강력한 라이벌이 되어 있었다.
국가 차원의 군대가 없이 도시 단위로 소규모 용병에 의존하던 이탈리아와 교황령은 수만 명의 막강하고 돈에 굶주린 용병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고, 교황은 가까스로 도망을 치게 된다.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과 약탈이 벌어진 이 사태를 ‘로마 약탈(Sacco di Roma)’이라고 부른다.
당시 로마와 교황청을 지키던 대부분의 군사들은 이미 도망을 쳤고, 교황 곁에는 스위스 근위대 189명이 남아 지키고 있었다. 교황이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했지만 이들은 성 베드로 성당에서 마지막 한 명까지 목숨을 바치며 교황이 비밀 통로로 빠져나갈 시간을 벌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교황령에 따라 교황청의 근위대는 용맹한 스위스인들로만 구성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스위스에서 용병제가 금지된 19세기 이후부터는 용병이 아니다.)
라이슬로이퍼에게 로마 약탈과 비슷한 유형의 비극은 18세기 후반에 파리에서도 있었다. 취리히 남쪽의 작고 아름다운 도시 루체른(Lucerne)에는 프랑스 혁명 전쟁이 벌어진 1792년에 프랑스 왕 루이 16세를 지키다 전멸한 스위스 용병을 추모하는 조각, 빈사의 사자상(Löwendenkmal)이 있다.
새벽에 런던을 출발한 스위스 여행 첫날, 우리는 오전에 라인 폭포를 들러 첫날밤을 지낼 루체른으로 출발했다. (뜻밖의 발견, 스위스의 라인 폭포)
라인 폭포부터 취리히를 통과해서 루체른으로 들어가는 최단 거리의 고속도로가 있었으나 나는 자동차 여행을 하는 김에 루체른 호수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고 싶었다. 호수 끝에 있는 브루넨이라는 마을의 대형 수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천천히 루체른으로 들어가면 일정에도 무리가 없이 괜찮을 것 같았다. 브루넨은 합스부르크가의 억압을 받던 스위스 동맹이 처음으로 자유를 쟁취한 역사적 회담이 있던 마을이다.
문제는 이 날이 일요일인 데다 새벽 2시 반에 일어나는 바람에 내가 잠이 부족했다는 것, 초행길에 비가 계속 오락가락하는 날씨였다는 것, 그리고 렌터카의 내비게이션은 제대로 업데이트가 안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경험했는데, 산간 지역에서는 모바일 데이터 통신이 안 터지는 경우가 많아 내비게이션을 구비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스위스 날씨야 익히 들어서 알고 있으니 그렇다 치고, 고속도로를 한 시간 남짓 달려 호숫가에 위치한 브루넨에 도착해서 보니 수퍼마켓이나 웬만한 상점은 모두 문을 닫았다. 런던에 비해서도 훨씬 물가가 비싼 스위스라서 웬만한 먹거리는 사서 가려고 했는데 계획이 틀어져 크게 실망을 했다.
'이런.... 일요일이라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네. 우리 그냥 호숫길을 따라 루체른으로 가자'
무안한 마음에 멋쩍어하며 가족들을 돌아봤다. 실제로는 무안함을 넘어 밥과 물을 비싸게 사 먹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더 컸다.
설상가상으로 호수를 따라가는 길은 중간중간에 공사가 너무 많았고 내비게이션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자꾸 엉뚱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때마다 감에 의존해서 루체른 방향이라고 생각되는 쪽으로 운전대를 틀었는데 몇 번이고 길을 잘못 들어 뱅뱅 돌고 나니 피곤함이 배가되었다.(중간의 작은 마을에서는 두세 번이나 쳇바퀴를 돌기까지.)
한참 헤매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한 집사람이 핸드폰으로 구글맵을 열었다.
'어차피 안 터질 거야.' 내가 툴툴대며 말했다.
'어라? 터지는데?' 집사람이 한심한 듯 나를 쳐다봤다.
그렇다. 스위스는 정보통신 강국이었던 것. 영국이나 독일이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산간 지역에서 보란 듯이 핸드폰이 터지는 게 아닌가.
허탈한 마음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인터넷의 도움으로 몇 번에 걸쳐 마의 구간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한편, 주차비에 대한 공포 때문에 나는 호텔 예약 시 주차 공간을 미리 요청해 둔 바 있었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 호텔 주위에 주차장이 없다. 한 바퀴 돌아보다가 호텔에 전화를 했더니 노상 주차장에 24시간 동안 주차할 수 있는 티켓을 줄 테니 일단 짐부터 내리란다.
만차였던 노상 주차장에서 차 한 대가 빠져나가는 것을 본 나는 재빨리 차를 끼워 넣었는데, 차에서 내려서 보니 미터기가 떡- 하고 서 있었다. 호텔 측에서 24시간 주차권을 준다고 했지만 아직 확신이 안 서는 데다, 스위스에서 교통 법규만큼은 반드시 지키라는 조언이 떠올라 1시간 주차비로 2프랑을 넣고 왔더니 호텔 주인장이 무심히 한 마디를 뱉는다.
'왜 그랬어요? 내가 24시간권 준다니까..'
알고 보니 주차권은 무료로 주는 것이 아니라 원래 주차비보다 할인된 티켓을 파는 것이었다.
그래도 24시간에 15프랑이었으니 싸게 건진 셈이었다.
호텔 방에는 싱글 침대 4개가 전부였다. 공간이 협소해 딱히 앉을 공간마저 없어 도미트리에 들어온 기분이었지만 살인적인 스위스 물가를 생각하면 참고 견디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그나마 호텔이 구시가 입구에 있어 루체른의 구시가부터 카펠교, 빈사의 사자상 등 웬만한 스폿을 한 번에 모두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방에 오자마자 피곤하다며 양말을 벗고 누우려는 아들을 힘들게 설득했다.
'잠깐!! 우리 지금 바로 나갈 거야! 힘들지만 나가서 산책한 후에 얼른 저녁 먹고 들어 오자.'
루체른은 필라투스(Pilatus), 리기(Rigi), 티틀리스(Titlis) 등 3형제라 불리는 알프스의 산들과 거대한 루체른 호수에 접해있는 교통의 요지이자 휴양지이며 관광지로 1332년에 스위스 동맹(Eidgenossenschaft; Swiss Confederacy)에 가입한 유서 깊은 주(칸톤)이다.
날씨가 맑으면 루체른으로 일찍 들어와 필라투스 산만큼은 올라가 보려고 했는데, 종일 비 오고 흐리던 날이 저녁 무렵에야 맑아지는 바람에 루체른 호수에 서서 산을 올려다보며 만족해야 했다.
어차피 이튿날 융프라우요흐에 올라가기로 계획을 세웠던 터라 아쉬움은 덜했다. 혹시나 아이들에게 케이블카를 타고 필라투스 산에 올라가 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지만 보기 좋게 묵살을 당했다.
다음에 와야 할 이유를 남기는 것도 여행의 묘미, 루체른에서는 여유 있게 시내만 돌아보기로 했다.
호텔을 나선 우리는 로이스 강(Reuss River)을 따라 걸었다. 로이스 강은 스위스에서 4번 째로 긴 강으로 고타드(Gottard)에서 시작하여 루체른 호수를 거쳐 아레 강을 통해 북쪽의 라인강으로 합쳐진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지붕으로 덮인 목조 다리, 스프레우어교(Spreuerbrücke; Spreuer Bridge)였다.
이 다리는 카펠교의 유명세에 가려져 있지만 카펠교가 1993년에 화재를 겪어 현대에 파손, 복구된 데 반해 수백 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다리이다. 1408년, 원래는 강 오른쪽의 제분소와 연결되어 곡식 등을 쌓았다가 실어갈 수 있는 용도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1566년에 홍수로 무너진 후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리 지붕 아래는 삼각형 패널에 수십 개의 그림이 걸려 있다. 이 그림들은 17세기 초, 화가 카스퍼 메글링거(Kaspar Meglinger)가 주도하여 그린 덴스 마카브르(Danse Macabre; Dance of Death)라는 장르의 67개의 그림 중 현존하는 45개로서, 죽음의 보편성에 대해 그린 특이한 작품들이다.
덴스 마카브르 또는 '죽음의 무도'란 중세 말기에 유행한 미술 장르로 생명의 허무함과 더불어 현세의 영광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일깨우려는데 목적이 있다. 의인화된 죽음이 현실 세계를 뜻하는 사제나 평민, 왕이나 교황, 어린이 등을 만나거나 무덤 앞에서 춤을 추는 형태로 묘사되어 있는데, 죽음은 주로 해골과 뼈만 남은 사람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수백 년 된 다리가 여전히 본래의 용도대로 사용되어 시민들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어 인상적이다. 보호 목적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문화유산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보호했지만 숭례문도 불에 타지 않았나.
스프레우어교에서 강의 상류, 즉 루체른 호수 쪽을 바라보면 강의 수위를 조절하는 워터 스파이크(Water Spike)가 있다. 나무로 된 수문을 손으로 직접 넣었다 빼면서 강물의 방류량을 통제하는 일종의 소형 댐으로 루체른 호수의 수위를 조절한다고 한다.
하나씩 끼웠다 뺄 수 있는 통나무를 니들(Niddle)이라 부르기 때문에, 이런 유형의 보를 니들 댐(Niddle Dam)이라고 부른다. 1859년부터 1861년 사이에 설치된 이 수동형 나무 수문이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다는데 놀랄 수밖에 없다.
수량이 풍부한지 댐의 3/4 가량이 열린 니들 댐 아래의 물살은 정말 거셌다. 나무로 된 수문은 틈이 있어 물을 완전히 밀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수압을 버틸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19세기의 엔지니어링 기술을 2010년대에 더 확장, 적용하여 루체른 호수의 수위를 수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스프레우어교를 등진 상태에서 루체른 호수를 왼쪽에 끼고 카펠교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강을 따라 산책하면서 본 루체른은 암스테르담과 비슷한 느낌이 살짝 들었지만 좀 더 넓고 여유 있는 분위기였다. 비가 그치면서 강변에는 주말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10여 분 남짓 더 걸었을까, 눈 앞에 카펠교(Kapellbrücke; Chapel Bridge)가 나타났다.
카펠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지붕이 있는 목조 다리로 1365년에 건설되었다. 길이가 약 204미터에 이르고 중간에는 살짝 지그재그 형태로 굴절되면서 로이스 강을 대각선처럼 가로질러 강의 양쪽을 잇고 있는데, 강 위의 타워와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이 다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트러스 교(Truss Bridge)이기도 하다. 트러스 교는 여러 개의 직선 부재를 삼각형 형태로 연결해 뼈대를 구성하여 다리의 하중을 분산시키는 구조로 서울의 성수대교나 한강철교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카펠교 중간에 연결되어 34미터 높이로 우뚝 솟아있는 팔각기둥 모양의 워터 타워(Water Tower)는 1300년대 초반에 도시를 방어하는 성곽의 일부로 건설되었으며, 이후 감옥이나 고문실 또는 전리품 창고나 보물실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변화무쌍한 스위스의 날씨 덕에 이른 오후에는 흐리고 궂은 하늘 아래서 카펠교와 워터 타워를 바라보다가 저녁 무렵에는 푸른 하늘 아래 전혀 다른 모습의 카펠교를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목조 다리 위로 올라섰다. 다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난간이 알프스 산에서 꺾어온 듯한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마치 우리에게 꽃길만 걸으라는 듯 화려하게 꽃 장식된 주황색 지붕의 나무다리 위에 올라서 보니 중세의 어느 마을에라도 온 듯 한껏 들뜬 마음이다.
혹시 해리포터의 배경인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나무다리도 카펠교를 본뜨지 않았을까?
다리 아래 강물에는 물새들이 유유히 떠 있고, 건너편 강변의 다양한 노천카페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차를 마시거나 맥주를 한잔씩 하고 있었다. 이런 여유를 가졌던 게 언제이던가. 정신없이 바쁘기만 했던 2-3일 전까지의 일상이 어느덧 까마득한 옛 일처럼 기억 뒤로 멀어져 간다.
다리는 튼튼하고 견고한 목재로 세워져 있다. 사실, 카펠교는 1993년에 다리의 그림이 거의 모두 전소될 정도로 화재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숭례문의 화재 기억이 가슴 아프게 남아 있듯 700년을 이어온 다리가 불에 탔으니 그 손실은 계산으로 따질 수 없을 것이다.
다리는 화재 후에 1년도 안되어 복원되어 1994년에 다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수백 년 전 모습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카펠교는 루체른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카펠교 지붕 아래에는 스프레우어교와 마찬가지로 삼각형 패널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유럽에서 지붕을 얹은 목조 다리에 이런 패널화를 그려둔 곳은 루체른이 유일하다.
카펠교의 그림은 17세기의 종교 화가였던 한스 하인리히 베크만(Hans Heinrich Wägman)이 그리기 시작했다.
죽음의 무도를 주제로 그려져 있는 스프레우어교의 그림과 다르게 카펠교의 그림들은 루체른의 수호성인인 성 레오데가르(St. Leodegar)와 성 마우리티우스(St. Mauritius)에 관한 삶과 전설, 순교자들과 영웅들, 흑사병 등 스위스와 루체른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담고 있다. 그림을 후원했던 가문과 개인의 문장이 오른쪽 아래에 새겨져 있는 것도 눈길이 간다.
1993년 화재 이전까지만 해도 전체 158점의 그림 중에 147점이 보존되어 있었다는데, 화재 이후로 완전히 복원된 그림은 30점에 불과하다고 한다.
다리를 거닐며 감상했던 그림 중에서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그림은 다리 위의 단두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는 그림이었다.
루체른의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카펠교를 건너 구시가로 들어간 후 빈사의 사자상까지 걸어갔다가 되돌아왔더니 하늘이 활짝 개어 카펠교가 더욱 선명한 색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파란 하늘 아래의 카펠교 뿐 아니라 석양이 내려앉을 때의 카펠교 역시 색다른 아름다움을 뽐냈다. 다리를 가운데 두고 한가롭게 휴일의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로 루체른의 오후는 익어가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터진 대혁명은 백성을 억압하는 왕과 귀족을 쫓아내고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앞세워 공화국으로 가려는 자유민들의 열망이었으나 이후 수년에 걸쳐 왕정 체제를 유지하려는 유럽의 여러 나라와 프랑스 혁명정부 간의 전쟁을 불러왔다.
프랑스혁명으로 자국 체제에 위협을 느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자 프랑스 혁명정부는 선전 포고를 하게 된다. 1792년 8월, 프로이센의 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넘자 수만 명의 성난 군중들은 루이 16세가 머물고 있던 튀일리 궁을 향해 진격했다.
프랑스인들은 당시 왕과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가 외국과 내통하는 바람에 프랑스 혁명군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는 왕비의 모국이기도 했고, 루이 16세는 이미 오스트리아로 탈출을 하려다 국경에서 붙잡혀 튀일리 궁에 유폐되다시피 한 상태였기 때문.
참고로, 튀일리 궁은 루브르 박물관과 연결된 궁전이었는데 1870년 경 파리 코뮌 때 불타서 전소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당시 궁 안에는 프랑스 근위대마저 도망을 치고 없었지만 루이 16세가 고용했던 780여 명의 스위스 근위대만은 단 한 명도 이탈하지 않고 혁명군에 맞서 프랑스 왕을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루이 16세가 '이제 모두 떠나도 좋다'라고 말했음에도 떠나지 않았고, 혁명군이 항복을 권하며 보내주려 했음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혁명군의 입장에서 봐도 이들은 어차피 외국인 용병일 뿐 아니라 자신들과 처지가 비슷한 가난한 백성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대로 신뢰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스위스인들은 단 한 명도 항복하거나 물러나지 않고 싸웠고 결국 몰살을 당했다. 아무리 용맹한 스위스 근위대라 해도 대포까지 동원한 수만 명의 혁명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던 데다, 왕이 민중들을 향해서는 발포를 금했기 때문에 이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하고 말았다.
빈사의 사자상은 덴마크의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Bertel Thorvaldsen)이 설계하고 독일 출신의 석공 루카스 아호른(Lucas Ahorn)이 1824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루체른의 자연 암벽 안에 새겨진 길이 10미터, 높이 6미터에 달하는 대형 조각상이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루이 16세를 지키다 전멸한 라이슬로이퍼, 즉 스위스 용병 근위대를 기리기 위한 작품이다.
작품에서 라이슬로이퍼를 상징하는 사자는 부러진 창으로 심장이 꿰뚫려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도 프랑스 부르봉 왕실을 상징하는 백합 문양의 방패를 안고 있다. 마지막 한 명의 숨이 다할 때까지 루이 16세를 위해 싸웠던 스위스 근위대의 충성심을 노래하고 있는 것.
암벽 위에는 라틴어로 "HELVETIORUM FIDEI AC VIRTUTI", 즉 "헬베티아인(스위스인)의 충성심과 용기"가 깊게 새겨져 있다.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의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유럽을 여행하고 쓴 'A Tramp Abroad'(1880년)에서 빈사의 사자상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바위'라며 이렇게 썼다.
The Lion lies in his lair in the perpendicular face of a low cliff
사자는 깎아지른 절벽 아래의 은신처에 누워있다.
for he is carved from the living rock of the cliff.
그는 절벽의 살아있는 돌에서 깎였기 때문이다.
His size is colossal, his attitude is noble.
그의 크기는 거대하고, 그의 자세는 고귀하다.
How head is bowed, the broken spear is sticking in his shoulder,
고개를 한껏 숙이고, 부러진 창이 그의 어깨에 꽂힌 채
his protecting paw rests upon the lilies of France.
그의 앞 발은 프랑스의 백합을 지키려고 올려져 있다.
Vines hang down the cliff and wave in the wind,
덩굴은 절벽을 따라 늘어진 채 바람에 흔들리고,
and a clear stream trickles from above and empties into a pond at the base,
맑은 물은 위에서부터 흘러 연못의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and in the smooth surface of the pond the lion is mirrored, among the water-lilies.
사자의 모습은 수련이 핀 부드러운 연못의 표면 위로 비춘다.
루체른 시내에서 빈사의 사자상으로 가는 길은 지도를 검색하거나 길을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엄청난 수의 중국 단체 관광객이 걷는 방향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가다 보면 사자상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자상 근처에는 관광버스 정류장도 두어 개 있어 이 곳이 유명한 관광지임을 알 수 있다.
마크 트웨인은 거대한 사자의 모습이 아래 연못에 비친다고 했으나, 우리가 갔을 때는 아쉽게도 대대적인 보수 공사 중이어서 연못과 어우러진 사자상을 감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통으로 일그러진 생각보다 큰 사자의 얼굴을 보며, 타국의 왕을 위해 비참하게 스러져간 스위스 용병들의 처절함과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이 나라의 역사가 가슴을 아프게 쳤다.
아이들에게 사자상의 의미와 역사에 대해 한참 설명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오신 분이 어머니와 같이 선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길래 흔쾌히 몇 장을 찍어 드렸다.
빈사의 사자상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 우리는 하늘이 맑아지는 것을 보며 루체른 호수로 돌아왔다. 이 호수는 독일어로 피어발트슈테터 호(Vierwaldstättersee)라고 부르는데, '숲 속 원시 4 마을의 호수'라는 뜻이다.
1291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억압적인 지배를 받던 스위스 지역에서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의 3개 칸톤은 서로 영원히 단결하며 자유를 지키자는 1차 스위스 동맹을 선포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스위스 역사의 시작이다.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놓고 화살을 쏘았던 '빌헬름 텔' 이야기의 배경이 바로 이 시기이다.) 운터발덴 주는 이후 니트발덴(Nidwalden) 주와 옵발덴(Obwalden) 주로 나뉘었다.
이러한 스위스인들의 '반역'을 두고 볼 수 없었던 합스부르크가의 레오폴드 1세는 1315년에 대군을 이끌고 스위스를 침공했으나, 모르가르텐 전투(Battle of Morgarten)에서 기습작전을 펼친 스위스 동맹군에 의해 대패하고 물러나 이 칸톤들의 자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호수는 현재 이 4개의 칸톤과 루체른까지 5개의 칸톤으로 둘러싸여 있다.
탁 트인 호수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 아래 시원하게 뻗어 있었고 그 위로는 간간히 유람선이 떠 있었다. 티끌 하나 없는 맑은 공기를 폐 속 깊이 들이마셔 보았다. 미세 먼지나 황사 때문에 파란 하늘을 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우리나라와 달리, 여기서는 수십 킬로미터 밖의 산 꼭대기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호숫가에서 햇빛을 쬐며 여유를 즐기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 왔다.
점심을 라인 폭포에서 대충 때운 아이들도 너도나도 배고프다며 아우성이다. 물가가 후들후들하다고는 하나 여행의 백미는 역시 음식 아니겠는가? 오랫 만에 여행 앱을 뒤져 괜찮아 보이는 멕시칸 식당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가서 보니 호텔에 딸린 식당이어서 상당히 고민이 되었다.
집사람과 마주 보며 ‘다른 곳으로 옮길까?’라며 눈빛을 교환해 봤지만 이미 자리에 앉아 메뉴를 들여다보고 있는 아들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음식은 맛있었으나 너무 비싸 오히려 로이스 강가의 노천카페가 더 나아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카펠교 바로 옆의 노천카페에 2차로 자리를 잡고 앉아 해질녘까지 맥주(아이들은 물!) 한 잔을 더했다. 마침, 석양의 카펠교와 루체른 호수를 그냥 두고 들어가기에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좋은 핑곗거리도 있었다.
해가 밤 9시를 훌쩍 넘겨지는 바람에 야경을 보기까지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만, 밤의 루체른은 전혀 다른 옷을 갈아 입고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숙소에 돌아온 건 밤늦은 시간, 가족들은 모두 씻자마자 꿈나라로 가버렸다. 여행 첫날이 너무도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