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롱고스 Apr 19. 2020

역사의 도시 스위스 베른(Bern)에서 찾은 여유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고 지킨 자연의 나라, 스위스로 떠나는 가족여행 #6

라인 폭포를 시작으로 카펠교와 빈사의 사자상이 있는 루체른, 유럽의 정상 융프라우를 거쳐 알프스를 병풍처럼 감상할 수 있는 멘리헨까지 쉼 없이 달려온 스위스 가족여행이 반환점을 돌았다.

알프스 산속에서 시간과 날씨에 쫓기던 여행을 전반부라고 한다면 여행의 후반부에는 여유를 가지고 북쪽 평야지대의 역사적 도시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원래는 프랑스어권 지역인 서쪽의 로잔(Lausanne)이나 몽트뢰(Montreux)까지 가 볼 생각이었으나, 산악 지대의 악천후 속에서 시달리느라 불만과 불신의 늪에 빠져 있는 가족들의 요구에 서쪽 일정은 과감히 포기하고 베른(Bern)으로 곧장 질러가는 것으로 변경했다.


20여 년 전에 가난한 배낭 여행자였던 나는 스위스에서는 제네바 만 잠시 들러 레만 호숫가에 앉아 비둘기와 더불어 바게트 빵을 뜯어먹었던 추억이 있다. 바다와 같은 그 호수에 다시 가보지 못하게 된 것과 퀸의 전설적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가 여생을 보냈던 몽트뢰를 스킵해야 한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몽트뢰는 프랑스어권인 서부 스위스의 시작점이나 다름 없다.


일정을 크게 바꾸고 나니 여유가 생겨 엽서라도 한 장 살 겸 체크아웃 후 그린델발트 마을로 산책을 나갔다. 하루 종일 오락가락 비가 쏟아지던 전날과 달리 파란 하늘 위로 눈부신 해가 솟아올라 있었다. 깎아지른 듯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마을은 평화롭기 그지없었고 스키 시즌이 아니라서 그런지 오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길거리 상점에서 아이들이 기념품을 구경하고 있을 때, 햇살과 더불어 빠르게 퍼지고 뭉치는 구름의 재미있는 움직임에 하늘을 보며 망중한을 즐기던 나는 순간적으로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전 날만 해도 짙게 낀 구름 탓에 위치를 짐작하지 못했던 만년설의 봉우리가 머리 위의 하얀 구름을 뚫고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툭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이거(Eiger)의 북벽(North Face)이었다.

구름 사이로 얼굴을 보여준 아이거의 북벽.


아이거는 영화 노스페이스의 배경이기도 하며, 익숙한 아웃도어 브랜드이기도 하다. 해발 3,967미터에 이르는 이 산의 상단부 1,800미터는 만년설과 얼음으로 덮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프스에는 마테호른을 포함하여 6개의 북벽이 있는데 그중 아이거의 북벽은 가장 등반이 어렵기로 유명하다.

융프라우가 1800년대에 정복되었지만 이 북벽들은 대부분 1930년대에 이르러 인간의 발길을 허락했다.


그린델발트는 다른 이유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마을이었지만 구름 위의 노스 페이스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비록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살짝 얼굴만 보여주고 사라졌지만 기분 좋은 선물이었다.


스위스 역사 속의 베른(Bern)

그린델발트에서 충분히 게으름을 피우다 오전 느지막이 튠(Thun) 호수를 지나 베른으로 방향을 잡았다.

스위스에서 많이 알려진 도시는 취리히나 제네바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의 수도가 어디인지 헷갈려한다. 각 칸톤(Canton; 주)들이 독립성을 가지고 동등한 지위 아래 영구적인 동맹을 맺고 있는 스위스 연방에는 법률상 수도가 정해져 있지는 않으나, 연방 의회가 있는 베른이 사실상(de facto Capital)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아레(Aare) 강이 감싸고 있어  동쪽으로 툭 튀어나온 반도 모양의 베른은 체링겐(Zähringen) 가문의 베르톨트 5세(Bertold V)에 의해 세워졌다. 12세기에 독일 남부 바덴 지역에서 유력했던 체링겐 가문은 스위스 북서부의 고원 지대에 다수의 도시들을 건설하면서 확장하고 있었다.

곰이 베른의 상징이 된 데는 베르톨트 5세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그는 이 지역에 새 도시를 건설하기로 하면서 '도시의 이름은 건설을 위해 잘라낼 나무에서 처음으로 사냥한 동물의 이름으로 선택하겠다'라고 맹세했는데 그 동물이 곰이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다른 기록으로는 이 지역에 처음 정착했던 켈트족의 한 갈래인 브레노도(Brenodor)족이 도시 이름의 유래라고도 하는데, 아무래도 곰이 들어가는 민간 전설이 더 머릿속에 남는 이야기인가 보다.

베른의 문장


동쪽의 강가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확장되어 갔으니 강으로 둘러싸인 베른은 중세까지만 해도 강 위에 다리가 하나뿐인 천연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베른의 구 시가지는 7-800년 전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인 곳이다. 구시가지 전체가 1983년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도시 안에는 스위스 국가 중요 유산(Swiss Heritage Site of National Significance)으로 지정된 유적지만 100개가 넘는다.

아레 강이 감싸고 도는 베른 구시가지 (구글 위성사진 캡처)

 

베른은 12세기에 아레 강(Aare River)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건설되었다. 이곳은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일관되고 치밀한 도시계획 개념에 따라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 왔다. 옛 시가지에는 여러 시대에 건설한 건축물이 있는데, 15세기에 건립된 아케이드(arcade)와 16세기에 만든 분수가 있다. 중세 시대의 마을들은 대부분 18세기에 개축되었지만 그 본래의 특징이 여전히 잘 보존되고 있다.

(출처 :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

곰 공원(Bear Pit) 위에서 바라본 베른 전경


베른은 1353년에 스위스 동맹에 가입하여 '8주 동맹'이라 불리는 스위스 연방의 초기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91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억압적인 지배를 받던 스위스 중부 지역에서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의 3개 칸톤이 서로 영원히 단결하며 자유를 지키자는 1차 스위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중세 봉건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역 동맹'을 두고 볼 수 없었던 합스부르크가의 레오폴드 1세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1315년에 대군을 일으켜 스위스로 진격했으나, 모르가르텐 전투(Battle of Morgarten)에서 지형을 이용하여 게릴라 전술을 편 슈비츠와 스위스 동맹군에게 대패하고 물러나게 된다.

스위스 독립 전쟁의 씨앗이 된 이 전투는 유럽에 슈비츠와 스위스 동맹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중요한 사건이다.(오늘날 스위스 국기는 슈비츠 주의 깃발에서 유래한다.)

이 승리의 영향으로 루체른이 스위스 동맹에 가입한다.


합스부르크가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베른 역시 모르가르텐 전투 결과에 영향을 받아 스위스 동맹과 군사 협력을 맺고 영토를 확장하게 되는데, 이에 자극받은 옆 동네의 프리뷔르(Freiburg) 주가 프랑스의 부르고뉴 공국과 연합하여 베른을 침공하게 된다. 베른은 스위스 동맹의 군사 지원을 받아 부르고뉴 공국에 맞서 라우펜에서 결전에 나섰다.(Battle of Laupen)


1천 명의 정예 기사단을 포함해 3배 이상의 병력을 보유했던 부르고뉴 공국은 애송이 베른 정도는 쉽게 제압할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맹군에는 모르가르텐 전투를 승리로 이끈 슈비츠의 숙련된 보병대가 있었고, 이들이 부르고뉴 기사단을 막아주면서 라우펜 전투는 스위스 동맹과 베른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스위스 동맹군은 처음으로 하얀 십자가 상징을 사용했으며, 전투의 승리로 스위스 동맹은 더욱 결속하게 된다.(그림의 오른쪽이 동맹군)

라우펜 전투 (by Diebold Schilling the Elder, 출처 : 위키피디아)


두 번의 큰 독립 전투에서 거둔 승리에 영향을 받아 1351년에 북부 최대 도시인 취리히가 스위스 동맹에 가입하였고, 베른까지 1353년에 정식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역사적인 8주 동맹이 결성되었다.(츄크, 글라루스 포함)

한편, 합스부르크가에서는 레오폴드 3세가 새로이 영주가 되어 스위스의 지배권을 주장했는데, 이미 세력이 커진 자유 스위스 동맹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결국, 합스부르크가와 스위스 동맹군은 1386년에 루체른 근처의 젬파흐(Sempach) 마을에서 또다시 결전을 벌이게 된다.

기사단을 앞세운 월등한 전력이었음에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군은 스위스 동맹군에게 대패했을 뿐 아니라, 레오폴드 3세마저 이 전투에서 사망한다. 젬파흐 전투의 결과, 오스트리아 접경 지대에 있는 스위스의 칸톤들이 독립을 선언하였고 스위스는 실질적인 독립국으로 한걸음 더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패자는 여전히 합스부르크가였고, 스위스는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등 주변 강대국들 틈에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이로부터 200여 년간이나 더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베른의 곰 공원(Bärenpark; Bear Pit)

국토가 작은 스위스라서 그런지 몽트뢰를 스킵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른의 숙소인 노보텔에는 체크인 시간보다 2시간이나 빨리 도착했다. 에어 비앤비 같은 숙소라면 빨리 도착해도 체크인이 가능했겠지만 이 호텔에서는 체크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로비에 대충 짐만 맡기고 다시 차를 돌려 베른 구시가지 한가운데에 있는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 보니 시간은 어느새 오후 1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인지라 도시를 돌아보기 전에 적당한 곳에서 점심을 해결하려고 구시가지 아케이드의 중간쯤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갔더니 훤칠한 웨이터가 문 앞을 가로막았다.

"이 곳 아케이드의 식당들은 2시부터 모두 키친이 클로징 되니, 다리 건너편의 '트램디포'라는 식당으로 가보세요. 거기서는 하루 종일 식사가 돼요."

"오, 그래요? 알려줘서 감사합니다."


'자기들이 쉬는 시간이라고 다른 식당을 안내해 주다니, 혹시 사장이 같은 사람인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레 강 다리 건너편에 웨이터가 알려준 곳으로 가족을 이끌었다. 강가 곰 공원(Bärenpark)과 붙어 있고 구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큰 레스토랑이 하나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관광지 식당 같았지만 방문객들의 평가 점수가 생각보다 높아 주저하지 않고 들어갔다.


시원한 맥주도 두 잔 주문하고, 로티(감자채 부침)를 곁들인 소시지와 새우 샐러드, 버거 등을 시켜 여유 있게 점심을 먹었다. 레스토랑은 뷰도 좋았지만 생각보다 맛이 그럴듯했다. 소시지는 짜지 않았고, 샐러드의 구운 새우는 버터의 풍미도 가득해서 이 집에서 직접 만든 시원하고 부드러운 맥주와 잘 어울렸다.

나름 훌륭했던 베른에서의 첫 식사와 하우스 맥주.


재미있었던 것은 쥐똥나무 울타리에 살고 있는 수십 마리의 참새 떼였다. 식당의 야외 테이블석과 바깥쪽 길을 나누는 울타리에 살고 있는 참새들이 레스토랑 손님들에게 길들여져 있는데, 비둘기도 아닌 녀석들이 빵이나 감자 부스러기를 얻어먹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슬금슬금 왔다. 한 번이라도 먹이를 던져주면 비둘기 떼처럼 사람들 옆으로 모여드는 참새 떼 덕분에 아들이 한참을 새들과 놀았다.

레스토랑의 참새 떼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나니 시간이 어느덧 오후 4시를 향하고 있었다. 그제야 우리는 곰 공원부터 시작해 베른 구시가지를 둘러보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베른이 처음으로 살아있는 곰을 보유하게 된 것은 16세기에 전쟁 전리품으로 곰을 가져오면서부터라는 기록이 있다. 도시에는 이후 여러 단계에 걸쳐 곰을 키우는 시설이 설치되고 관리되었는데, 현재의 곰 공원은 2009년에 4번째로 리노베이션 된 것이라고 한다. 기존에는 좁은 곳에 곰을 가둬뒀다시피 했었는데, 동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아레 강가의 비탈로 면적을 크게 확장하고 자연적 환경으로 개선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880년대의 곰 공원 (출처 : 위키피디아)


아레 강가의 곰 공원 면적은 6천 제곱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커다랗고 건강한 곰들이 강가부터 제방 위까지 이어진 비탈진 넓은 공원에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면서 생활하고 있어 아이들이 참 좋아할 만한 곳이다. 단순한 동물원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도시의 역사가 담긴 곳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곳이다.

베른의 곰 공원(Bear Pit). 오른쪽에 곰 2마리가 보인다.
베른의 상징, 곰이 살고 있는 곰 공원(Bear Pit)


베른의 구시가지(Old City of Bern)

곰 공원의 끝에서 계단을 걸어 내려와 아레 강변의 산책로에 섰다. 빙하가 녹은 듯한 청록색의 맑은 강물은 매우 청량해 보였고 물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아들이 강둑에 엎드려 강물 속에 손을 넣었다. 많은 사람들이 강가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흐르는 강물 소리에 묻혀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등 뒤로는 곰 공원이고 눈 앞으로는 넘실대는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다.


곰 공원 옆에는 베른의 구시가지를 강 너머로 연결하는 인상적인 다리가 눈에 띄는데, 이 다리는 1840년에 건설된 니덱 다리(Nydeggbrücke)로 스위스 국가 중요 유산 중 하나이다. 강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25미터에 이르고 다리 가운데 있는 큰 아치는 폭이 46미터에 달해 1890년까지만 해도 유럽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1800년대에 융프라우의 4천 미터 고산에 산악열차를 놓았던 스위스 답게 건축 기술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었나 보다.

베른의 구시가지와 신시가를 연결하는 니덱 다리(Nydeggbrücke)


아까 나왔던 구시가지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니덱 다리(Nydeggbrücke)로 올라섰다. 강의 양쪽으로 언덕을 따라 늘어선 집들이 도시를 둘러싸듯 내려다보고 있어 인상적이다. 구시가를 등지고 나올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에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고 강의 양쪽을 굽어 보았다.

시간은 중세에서 멈춘 듯하다.

강변에서 바라본 아레 강과 운터토르 다리(Untertorbrücke)


니덱 다리를 걸으며 아레강 북쪽을 바라보니 훨씬 더 고색창연한 다리가 청록색 강물 위를 그림처럼 가로질러 있다. 오른쪽 끝의 방어탑과 잘 어울리는 이 다리는 19세기 중반까지 베른의 유일한 다리였던 운터토르 다리(Untertorbrücke)이다.

이 다리는 도시가 형성된 13세기에 목조로 지어졌다가 홍수로 크게 부서진 15세기에 석조 다리로 재건축되었으며, 중세 시대에는 도시의 방어를 위해 여러 개의 게이트와 방어탑을 갖춘 모습으로 증축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도시의 방어 목적이 필요 없어지면서, 교통에 방해가 되는 게이트와 탑들은 제거되었다고 한다.

1600년의 지도에서 묘사된 운터토르 다리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니덱 다리에서 바라본 아레 강과 운터토르 다리


아레 강을 건너 강이 감싸고 휘돌아 나가는 반도 모양의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베른의 구시가지는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건설된 옛 모습이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3갈래 도보 길이 니덱 다리 앞에서 갈라져 서쪽 방향으로 나란히 직선처럼 뚫려 있고, 그 길을 따라 건물과 건물이 붙어 이어지는 석조의 아케이드는 날씨와 상관없이 쇼핑이 가능하도록 전체가 지붕으로 덮여 있다.  

1638년의 베른 지도. 오른쪽에 운터토르 다리가 선명하다.(출처 : 위키피디아)
니덱 다리 앞 크람가세에서 바라본 베른 구시가지의 아케이드 모습.


유럽의 도시를 다니다 보면 수백 년 된 건물과 집들이 여전히 현대인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점이 늘 인상적이다. 5-6백 년 전의 건물이 여전히 상점으로 사용되고 있고, 사람들은 당시에 살았던 집에서 오늘의 일상을 이어간다. 수많은 과거가 현재와 단절된 채 박물관에서 잠자고 있는 것이 당연했던 나에게 유럽의 도시들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물론, 혹자는 이런 과거 지향적이고 보수적인 모습이 유럽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아케이드가 이어진 구시가지의 중심 도로는 크람가세(kramgasse) 길이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이따금 과거에 지하 창고로 쓰였을 법한 문이 나타나는데, 현재는 대부분 지하 카페나 상점으로 이용되고 있어 재미있다. 길가 좁은 계단이나 아케이드 복도의 작은 공간에도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카페나 레스토랑이 많아 아기자기하다.

자하 창고였을 법한 곳이 상점으로 개조되어 있다. 미용실로 보인다.


100여 개의 분수가 있을 만큼 베른은 분수의 도시인데, 크람가세 길에도 중간중간 역사적인 분수대가 놓여 있어 중세 도시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중 눈에 띄는 분수대는 베른의 아버지인 체링겐 가문의 베르톨트 5세를 기념하기 위해 1535년에 세워진 체링겐 분수(Zähringerbrunnen)이다.

분수대 동상의 주인공은 갑옷과 투구를 두르고 있는 곰으로서, 베르톨트 5세가 사냥했다는 곰이 베른의 상징물이 되어 체링겐 가문의 상징인 사자 문양의 방패와 깃발을 들고 서 있다.

체링겐 분수대 동상 앞에 선 아들


정의의 여신 분수대(Gerechtigkeitsbrunnen)는 서쪽 아레강 앞의 카람가세 길 위에 서 있는데, 1543년에 스위스 르네상스 조각가 한스 기엥(Hans Gieng)의 작품이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법 정의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눈가리개를 한 정의의 여신상은 중세 봉건 시대를 벗어나 개혁 시대의 베른을 잘 나타내는 동상이었을 것이다.  아쉽게 1986년에 반달(vandal) 족에 의해 원본이 크게 파손되어 지금은 복제품이 서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삼손이 사자를 죽이는 분수대 동상(Simsonbrunnen) 등 크람가세 길에는 역사적인 분수대 동상이 여러 개 세워져 있다.

정의의 여신상 분수대


크람가세 길을 따라서 서쪽으로 계속 걸어가다 보면 정면에 높은 시계탑을 마주치게 된다. 이 탑이 바로 베른에서 가장 유명한 지트글로게(Zytglogge;Clock Tower) 즉, 기계식 천문 시계탑이다(지트글로게는 베른 독일어로 Time Bell, '시간의 종'이라는 뜻).

원래 이 탑은 베른의 서쪽 방어를 담당하던 게이트이자 방어탑으로 1220년에 세워졌다. 위의 1638년 베른 지도를 다시 살펴보면 왼쪽부터 큰 교차로가 세 개 보이고 각 교차로의 가운데에 높은 방어탑이 하나씩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트글로게는 도시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첫 번째 게이트 타워였던 것. 초기 방어탑일 때 높이는 불과 16m였으나 1700년대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탄생했으며, 현재 탑의 높이는 54m에 이른다.

크람가세 길을 가로 막고 서 있는 지트글로게(천문 시계탑). 앞에 서 있는 체링겐 분수대와 잘 어울린다.


방어탑으로 세워진 후 감옥과 화재 감시용으로도 사용되었던 탑은 15세기 초부터 천문 시계가 설치되면서 시계탑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작동하는 시계는 1530년에 카스퍼 브루너(Kaspar Brunner)가 새로 설치한 것으로 당시 배른의 표준 시간을 가리키는 기준이었다고 한다.

시계는 지금도 1시간에 한 번씩 꼭대기에 있는 황금색으로 도금된 종 치기 동상(시간의 신인 크로노스가 형상화된 것이지만 베른에서는 한스 폰 탄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린다.)이 커다란 해머로 황금색으로 도금된 종을 후려쳐서 시간을 알린다.


상단의 로마자로 표기된 시계는 바깥의 큰 바늘은 시간을 나타내고 안쪽의 작은 바늘은 분을 가리킨다. 시침에 새겨진 해는 늘 똑바로 서서 웃고 있도록 틸팅이 되고 있다. 현재의 탑 디자인은 여러 차례 다양한 양식으로 증개축을 거친 후 1770년대의 디자인으로 1980년대에 보수를 마친 것이다.

매시 정각 전후로 천문 시계탑에서 타종 퍼포먼스가 벌어진다.


탑에 설치된 천문 시계는 체코 프라하의 천문 시계탑과 매우 비슷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보였다.(보헤미아의 천년 고도, 프라하를 가다) 프라하의 천문 시계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허무함이 드러나는 퍼포먼스인데, 베른의 천문 시계는 닭과 곰, 그리고 광대가 등장하는 퍼포먼스로 다른 재미를 준다.

매시 정각 4분 전부터 닭은 미리 울고 곰들이 춤을 추면 광대는 정각보다 빨리 시간을 알린다.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가 모래시계를 뒤집고 난 후에 비로소 종 옆의 한스 폰 탄(Hans von Thann)이 종을 치면서 시간을 알린다.

아이들도 재촉하고 주변이 어수선해 프라하 때와 달리 이번에는 퍼포먼스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


시계 위에 있는 그림은 일주일의 각 요일을 나타내는 신이다. 토요일을 나타내는 새턴(Saturn)을 시작으로 목요일의 주피터(Jupiter), 화요일의 마르스(Mars), 금요일의 비너스(Vinus) 그리고 수요일의 머큐리(Mercury)라고 한다. 하루의 시간뿐 아니라 계절과 요일, 절기까지 나타내 준다고 하는데 나는 여전히 천문시계를 읽지는 못하겠다.

지트글로게의 천문 시계와 시계 퍼포먼스 인형들.


한편, 베른의 크람가세 길 천문 시계탑 근처에는 20세기 물리학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천재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살았다. 1900년대 초반에 베른 특허청 근무를 시작으로 베른 대학에서 강의하며 이 곳에 살았던 그는 지트글로게를 지나가는 버스를 보며, 버스가 빛의 속도로 가면 어떻게 될까?라는 상상을 했고 이것이 결국 상대성 이론으로 발전해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연구 업적들은 그가 베른에 살았던 시기 전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시계탑 근처 크람가세 49번지에는 그가 살았던 집이 복원되어 있어 방문할 수 있다.

베른의 특허청 근무 당시 20대의 아인슈타인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12세기부터 도시로 발달하기 시작한 베른은 처음에는 아레 강 옆에 있던 작은 마을이었으나 인구가 늘면서 점차 서쪽으로 팽창해 갔다. 처음에는 지트글로게를 중심으로 양쪽에 도시의 방어벽이 구축되어 있었지만 그로부터 70년이 채 지나지 않아 팽창하는 도시의 규모에 맞게 서쪽에 2차 타워를 건설해야 했다.

크람가세 길을 따라 서쪽으로 지트글로게를 지나 약 500미터 앞쪽에 두 번째 방어탑이 나타나는데, 바로 베른 감옥 탑(Käfigturm; Cage Tower)이다.


탑은 1255년에 방어용으로 처음 건설되었는데, 1405년 베른을 삼켰던 대화재 이후 지트글로게에 있던 감옥 기능이 이 탑으로 이전되었다. 현재의 탑은 원래 있었던 탑을 허물고 1640년부터 새로 지어 올린 것이며, 1644년에 완성된 후로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멋진 탑의 이름이 왜 감옥탑일까 의아할 수 있는데 중세 유럽에서는 방어 목적으로 지은 탑처럼 고립된 곳에 감옥을 설치하여 죄수들을 가두는 경우가 많았다.


49m 높이의 감옥탑 아래에는 5m 높이의 터널이 있는데 그 사이로 트램이 지나다니는 것이 재미있다. 감옥탑을 등지고 왼쪽의 아레 강 방향을 보면 청록색 지붕 위에 스위스 국기가 유난히 눈에 띄는 스위스 연방 의회 건물이 이 도시가 수도 역할을 한다고 알려주고 있다.

베른 감옥탑과 그 아래로 지나가는 트램. 뒤로 연방 의회 건물이 보인다.


감옥탑이 서 있는 건물의 라인이 1255년부터 건설된 도시의 방어벽이었는데 그 건물들 사이에 약간 재미있는 탑이 있어 찾아보니 이름이 더치 타워(Holländerturm)이다. 타워의 양식도 주변과 약간 이질적인 모습인데, 추측하기로 이 탑의 윗부분을 새로 개축했던 사람이 네덜란드에서 용병 생활을 했던 베른의 공직자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름도 '네덜란드 탑'인가 보다.

감옥탑 옆의 더치 타워(Holländerturm)


스위스 호텔의 융통성

두세 시간 가량 구시가지를 걷다 보니 어느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계획했던 베른 대성당은 아이들이 극렬히 반대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악천후 아래서 굳이 무리하고 싶지는 않아 숙소로 복귀하기 위해 지하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주차비가 무려 18프랑이나 나와서 깜짝 놀랐는데 정작 이 비용이 아까웠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 체크인을 했더니 리셉션에서 다음날까지 24시간 동안 베른 시내를 무료로 다닐 수 있는 대중 교통권을 주는 것이 아닌가.


기대하지도 않았고 별로 큰 혜택은 아니었지만 이왕 줄 교통권이었다면 아까 낮에 로비에 짐을 맡길 때 왜 미리 물어보지 않은 걸까? 체크인은 못했지만 리셉션에서 1박만 하는 것을 확인한 데다 리셉셔니스트도 낮에 봐서 얼굴이 익은 사람이었다.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체크인 전이라도 ‘무료 교통권 서비스가 있는 데 사용하겠느냐?’고 미리 물어봤을 것 같다.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유럽의 서비스 정신이여.


시내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 터라 가족들 어느 누구도 밥 생각이 없어, 저녁은 호텔 방에서 커피포트로 물을 끓여 컵라면으로 때우기로 했다. 그런데 방에는 아무리 둘러봐도 과일용 작은 포크 하나가 없어 몇 개 빌리기 위해 카운터로 내려갔다.

‘혹시 포크 4개만 빌릴 수 있을까요?’

‘여기는 리셉션이라 줄 수 없고 레스토랑에 문의하세요.’


레스토랑과 카운터의 거리는 팔을 뻗으면 닿을 5미터 남짓이고, 이 직원이 방금까지 레스토랑에 물병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봤던 나로서는 헛웃음이 났다. 더구나 리셉션에는 우리 말고 손님이 아무도 없단 말이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처럼 노동력이 비싼 나라는 서비스 마인드가 매우 약하다.

그래도 호텔인지라 레스토랑에 있던 '리셉션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작은 일회용 포크를 내 주어 컵라면을 무사히 먹을 수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첫날이 그렇게 지나갔다.

호텔 로비에서 여유를 부리는 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