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탑의 도시, 프라하로 떠나는 가족여행 #1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사랑하는 곳이다. 유럽에서도 몇 안 되는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낭만적인 도시로 유명하다.
유럽에서 ‘프라하 Praha’라고 하면 못 알아듣는 사람이 많다. 영어로는 ‘프라그 또는 프락 Prague’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취리히라고 하면 못 알아듣고, ‘쮸릭 Zurich’이라고 해야 알아듣는 것과 비슷한 이치.
가을에 며칠간 다녀올 곳을 찾다가 저가 항공 이지젯으로 인당 10만 원가량에 가볼 수 있는 프라하를 찍었다. 이지젯에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어서 이번에는 새벽이 아닌 느지막한 오전 비행기로 잡았고 비행기 취소에 대한 보험도 들었다. (참고로, 이놈의 저가 항공은 툭하면 취소되는데 보험을 들어놓지 않으면 보상이 안된다.) 프라하는 런던에서 1시간 반이면 닿는 곳이다.
유럽살이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가 저렴한 비행기로 1-2시간만 가면 다른 나라, 다른 문화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마음만 먹으면 차를 몰고 몇 날 며칠을 다녀볼 수 있다. 휴전선으로 막혀 섬과 다름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육로를 통해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비행기로도 일본이나 중국, 대만, 극동 러시아 정도만 2-3시간 안에 닿을 수 있으니 참 다른 환경이다.
전설적인 밴드 퀸(Queen)의 명작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보헤미안의 뜻은 ‘자유분방한(having informal and unconventional social habits)’으로 풀이된다. 원래 이 단어는 보헤미아 왕국이 있던 체코 지방을 이르는 말이었다.
유럽에서 집시(Gipsy)들은 유랑민족으로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며 차별을 받았고 자유와 방종의 아이콘이었다. 보헤미아 지방 출신의 집시들이 많아 프랑스인들이 이들을 부르던 이름에서 유래되어 ‘보헤미안’이라 함은 집시와 같이 자유롭고 방종하는 사람들, 특히 예술가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변화되었다.
프라하는 중세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이자 카를 4세 때는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지로 전성기를 구가한 도시이다. 2차 대전 때 초토화된 폴란드 등 이웃나라와 달리, 일찌감치 나치에 항복하는 바람에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아 천년이 넘는 도시의 문화유산은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다.
첨탑이 많아 ‘백탑의 도시’라 불리는데, 자잘한 탑까지 합치면 수백 개의 탑이 있다고 한다.
프랑크 왕국은 카를루스 대제가 세상을 떠난 후 서기 843년에 세 개로 쪼개졌고, 오늘날 독일의 기반이 된 동프랑크 왕국이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등을 포함한 중부 유럽에 자리를 잡았다.
서기 962년,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는 교황령을 침략한 이탈리아 왕국을 정벌한 공로로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대관을 받아 '로마인의 왕'이 되었는데, 이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제국은 16세기 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 5세 때 가장 강력했으나, 17세기 종교개혁과 30년 전쟁 이후 각 지역들의 독립성이 커져 느슨한 연합체로 변했다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었다.
프라하는 1085년부터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였다.
14세기 중반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카를 4세는 프라하를 제국의 중심으로 삼았고, 보헤미아 왕국을 선제후국(황제 선출 권한이 있는 나라)으로 확정함으로써 제국 내에서 보헤미아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이후 프라하는 크게 번영하였고, 문화와 예술, 건축에 있어서도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 15-16세기 고딕, 17-18세기 바로크 등 유럽의 모든 사조가 번성하였다. 이런 역사 때문에 프라하 역사 지구는 1992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프라하(Prague) 시가지의 건축물들은 중세시대에 건축학적·문화적 중심지였던 프라하의 영향력을 잘 대변해 준다. 프라하에는 11~18세기에 건축된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 있다. 하라드차니 성(Hradčany Castle), 성 비투스 성당(St Vitus Cathedral), 카를 다리(Charles Bridge) 등 세계유산에 등록된 많은 건축물은 대부분 14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4세 황제 시대에 축조된 위대한 기념물들이다." (출처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여행의 숙소는 일찌감치 프라하 역사 지구 안 올드 타운 광장 옆에 잡아뒀다. 다행히 이지젯이 우리를 별 사고 없이 프라하에 내려 주었으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바람에 우버를 잡아타고 광장 근처까지 가야 했다.
좁은 골목길 안쪽에 자리한 호텔을 찾기 위해 약간은 헤매야 했는데, 언뜻 지나치기 쉬운 골목 한가운데 작은 간판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날씨도 안 좋은데 울퉁불퉁한 길을 캐리어를 끌면서 돌았다간 가족들로부터 어떤 항의가 몰아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파트 안은 생각보다 깔끔했고, 꽃으로 장식해 둔 계단과 위층 복도의 엔틱한 탁자와 거울이 주인장의 성품을 이야기해 주는 듯했다. 꼭대기 층이라 비스듬한 천장이 벽이나 마찬가지여서 내부는 약간 좁았지만, 어차피 거의 잠만 잘 요량이었다.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골목길 안쪽에는 레스토랑의 야외 테이블이 아기자기하게 차려져 있었다. 따사로운 햇빛이 내려쬔다면 브런치라도 하고 싶어 질 것 같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오후에 간단히 올드 타운 광장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광장은 80미터에 달하는 2개의 첨탑으로 유명한 대표적 고딕 양식의 틴 성당(Chrám Matky Boží před Týnem),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진 국립 미술관 골츠 킨스키 궁전(Palac Golz Kinskych),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 니콜라스 교회(Kostel sv. Mikuláše), 그리고 유명한 천문 시계탑이 있는 구시청사 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루터보다 100년 먼저 종교개혁을 부르짖다 순교한 얀 후스의 동상이 광장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이 광장은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군의 탱크가 진주했던 곳이기도 하고, 1989년 민주화 운동인 '벨벳혁명'이 일어난 곳으로 체코의 현대사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4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건립된 틴 성당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변형되어, 내부의 인테리어는 17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마감되었다. 정식 명칭을 영어로 풀면 '틴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 Church of Our Lady before Týn'라는 뜻인데 줄여서 틴 성당이라고 부른다. 여러 개의 작은 첨탑으로 장식된 두 개의 뾰족한 쌍둥이 첨탑이 후기 고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두 개의 탑은 프라하 시내 어디서도 보여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두 개의 첨탑 사이에는 황금빛 후광이 빛나는 성모 마리아상이 부착되어 있다. 틴 성당은 원래 종교개혁을 이끌던 후스파의 중심으로 이 자리에는 원래 황금 성배와 왕의 형상이 부착되어 있었다고 한다. 기존 가톨릭의 성찬식에서 성직자와 특권층에게만 빵과 와인을 나누어 주는 것을 비판하며 만인에게 빵과 와인을 나누어준다는 의미였던 것.
프라하가 다시 가톨릭화 된 후에 성모 마리아 상으로 교체되었는데, 그때 황금 성배를 녹여 성모 마리아의 후광으로 붙였다고.
가톨릭이 사회의 모든 가치관을 지배하던 중세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려는 르네상스 운동이 알프스 이남에서 활발했다면 보헤미아에서는 15세기 후스 전쟁을 시작으로 17세기 30년 전쟁에 이르기까지 로마 가톨릭과 끊임없는 종교적, 정치적 대립이 있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리 둘러보아도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내부에 들어가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아이들은 성당에 안 들어간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고딕 건물 안의 장식이 바로크 양식이라니, 과연 잘 어울렸을까? 아쉬움에 사진으로 찾아본 내부 모습은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된 말라 스트라나 지구의 성 니콜라스 성당과 비교가 된다.
광장 한가운데는 체코의 종교 개혁가 얀 후스(Jan Hus)의 군상이 있다. 신학자였던 얀 후스는 로마 가톨릭 지도층의 부패, 특히 면죄부를 비판하다가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보헤미아 인들이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든 후스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고, 후스는 마틴 루터 등 많은 종교 개혁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군상은 후스의 서거 500주년을 기념하여 1915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이 돋보이는 거대한 성 니콜라스 성당(Kostel sv. Mikuláše)은 1737년에 건립되었으며, 내부의 보헤미아의 유리공예를 자랑하는 샹들리에가 매우 유명하다. 역시 시간이 맞지 않아 내부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프라하에는 성 니콜라스 성당이 2개가 있는데, 화려한 내부 바로크 장식을 자랑하는 곳은 이 성당보다는 강 건너편 말라 스트라나 지구의 성당이다.
다음날 우리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바로크식 인테리어의 진수를 보게 된다.
광장에서 서쪽으로 가면 블타바 강 방향으로 가게 되는데, 골목길 입구에는 유명한 천문 시계탑 프라하 오를로이(Pražský orloj; Prague Astronomical Clock)가 있다. 이 천문시계는 1410년에 최초로 설치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작동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시계라고 한다.
시계는 크게 3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의 큰 원(칼렌다륨)은 해와 달, 천체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아래의 큰 원(플라네타륨)은 12개 동그라미 안에 보헤미아의 농경생활을 담은 달력 눈금판이다. 제일 위에는 벨을 울리는 황금닭과 사도들이 행진하는 2개의 작은 문이 있다.
한참을 들여다봐도 시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약간 답답했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아날로그 시계를 읽지 못한다는데, 이 시계를 만든 사람이 나를 본다면 비슷한 기분일까?
매시 정각이 되면 천체판 오른쪽에 모래시계를 들고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시작해 각각 거울과 주머니, 비파를 든 사람들(각각 허영과 탐욕, 유흥을 상징한다)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죽음을 외면하고, 그 위에서 12 사도가 지나가는 가운데 맨 위에서 황금 닭이 벨을 울리는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이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매시 10분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든다.
생각보다 짧게 끝나서 처음에는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했는데, 해골이 까딱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근처를 지날 때는 자꾸 시간을 확인해 보게 된다.
올드 타운 광장은 프라하 역사 지구의 랜드 마크답게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이 곳에서부터 구시가의 거미줄 같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고딕 양식의 주택 및 건물 아케이드를 지나가게 되고, 블타바 강 쪽으로 가면 유명한 카를교에 이르게 된다.
한편, 이 천문 시계탑도 올라가 볼 수 있는데 위에서는 올드 타운 광장뿐 아니라 블타바 강까지 훤히 내려다 보인다고 한다. '탑 위에 올라가 볼까?'라고 한 마디만 해도 이구동성으로 '아니~!!' 라는 답이 돌아오기 때문에 아예 권하지 않았다.
광장뿐 아니라 구시가 골목길 곳곳에는 분장을 하고 마임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처음에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이나 템즈 강가처럼 길거리 예술가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들 중 많은 사람은 길거리 예술가가 아니고, 옆에 누군가가 오면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 다음 돈을 갈취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다음날 어린 둘째가 이들의 꼬임에 넘어가 작은 해프닝이 일어나게 되는데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프라하의 구시가 골목을 거닐다 보면 코믹하게 생긴 꼭두각시 인형을 파는 기념품 가게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마리오네트'라고 부르는 유명한 체코의 꼭두각시 인형극 덕분이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신성 로마 제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보헤미아의 상류층은 독일어로 된 오페라를 즐길 수 있었으나, 그 문화에 접근할 수 없었던 서민들은 가족 극장이나 떠돌이 극단이 공연하던 마리오네트 인형극을 보는 것으로 문화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프라하에는 지금도 국립 마리오네트 극장에서 오페라를 각색한 인형극을 공연하며,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Don Giovanni) 오페라를 각색한 인형극이 성공적으로 공연되고 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지오반니는 실제로 1787년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골목길을 걷는데 참기 어려운 고소한 냄새가 풍겨서 보니, 프라하의 유명한 길거리 음식 뜨르들로(Trdlo)를 굽는 가게였다. 뜨르들로는 반죽을 원통형에 돌돌 말아 구운 후 설탕을 뿌리고 계피나 초콜릿, 아이스크림 등을 안에 바르거나 넣어 먹는 굴뚝 모양의 빵으로 올드 타운 광장에서 카를교로 가는 골목길을 걸으며 뜯어먹기에 딱이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아이들이 좋아해서 하루에 하나씩 먹었던 것 같다.
올드 타운 광장에서 고딕 양식의 아케이드가 줄지어 있는 골목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블타바 강 앞에 도착했다.
서서히 석양이 내려오기 시작했고, 눈 앞에는 보헤미아와 프라하의 상징 카를교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