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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Sep 30. 2019

영국에서는 몸이 아프면 골치가 더 아프다

영국에서 경험한 선진국 의료 서비스의 실상

해외에 살아본 한국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중의 하나는 우리나라 의료보험 제도가 매우 훌륭하다는 것이다.

온 국민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되 소득에 비례하여 보험료를 납부하고 공평하게 의료 서비스를 받는 제도,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야 말로 다른 나라에 살아보지 않았다면 공기나 물의 존재처럼 그 고마움을 깨닫기 어렵다.

이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벤치마킹하여 '오바마 케어'를 실시하지 않았던가.(오바마 케어는 미국에서도 수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우리나라만큼 성공적이고 훌륭하게 의료보험을 운영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고 본다.)


해외살이를 하면서 초반에 부딪히는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의료 서비스이다. 영국에 온 지 불과 두어 달이나 지났을까, 전쟁터 같은 사무실의 문제들도 아직 해결이 요원하고 입주한 집에는 한 달 만에야 겨우 인터넷이 들어왔던 영국 살이 초반에 드디어 걱정했던 문제가 터졌다.


추운 가을로 접어들면서 둘째가 열감기에 걸렸는데, 40도 고열이 며칠째 내려가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동네에 이사를 오면 먼저 카운슬(Council ; 구청)과 동네 주치의(General Practitioner ; GP)에 등록을 해야 하는데, 아직 GP 등록도 하지 않았던 때였다. 급한 대로 한국에서 가져온 해열제를 먹여봤지만 열은 떨어지지 않았고, 급기야 아이가 청각 기능에 이상이 생겼는지 소리를 질러도 못 듣는 상황이 벌어졌다. 아이는 한국에서도 중이염을 몇 번 앓았던 터라 덜컥 겁이 났다.

한국의 지인들에게 여기저기 전화를 해 본 아내는 이미 '초등학생이 그렇게 오래 열이 안 떨어지면 다른 병일 수 있고, 엑스레이도 찍어봐야 하고...' 등 가뜩이나 오만가지 안 좋은 상상을 하고 있던 터였다.


5일째 새벽, 아이를 밤새 돌보던 아내가 아무래도 응급실을 가야겠다고 하여 24시간 운영 중인 병원을 찾아보고 911에 전화를 걸었다. 911 쪽에서 '앰뷸런스를 보내줄까?'라고 물었으나, 돈이 얼마가 나올지 가늠이 안되어 'No'라고 말한 후 우버를 불러 타고 30분 거리에 있는 종합병원 응급실로 무작정 내달렸다.


아직 NHS(National Health Service)에 등록이 안되어 있었는데 일단 리셉션에서 아이만 등록하고 기다렸더니 간호사가 불렀다. 간호사는 아이가 예방 접종은 했는지, 약에 대한 알레르기는 있는지 세세하게 물어봤다. 문진 시간만 한 10여 분 걸린 것 같은데 간호사는 연신 'Lovely'를 해대며 체크리스트를 쓴 후, 우리 앞에 4명의 대기 환자가 있다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한참을 기다렸더니 젊은 아시아계 여자 의사가 불렀다. 그리고, 아까 간호사가 했던 질문을 똑같이 시작했다. '어떻게 왔니?'로 시작해서 예방 접종은 했는지, 약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지까지 질문이 똑같았다.


문진을 끝낸 의사는 청진기를 대보고 귓속과 입 안을 들여다보더니 목이 많이 부었다며 자기 시니어와 상의하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면서 나갔다.

기다렸다. 두세 번을 와서 뭔가를 물어보고, 기다리기를 반복한 끝에 받은 것이 작은 항생제 한 병이었다. 새벽 6시에 도착한 병원에서 작은 항생제 하나 받아 들고 집에 오니 오전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독한 열감기에 중이염을 앓고 있던 아이

그러나 문제는 이 항생제가 전혀 듣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틀이 지나도 낫기는커녕 열은 그대로인 데다 아이는 이제 귀의 통증까지 호소하기 시작했다. 다시 온갖 수소문을 한 끝에 동네에 사설 GP(Private General Practitioner)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전화를 해봤더니, 친절한 리셉션 간호사가 바로 당일 저녁으로 예약을 잡아주었다.


사설 GP의 담당의는 나보다도 10살은 족히 많아 보이고 왠지 신뢰가 가는 차분한 비주얼의 인도계 의사였다. 의사는 잠시 검진을 하더니 중이염은 좀 심한데 다행히 폐는 깨끗하며 신종 플루도 아니고 난청도 염증이 잡히면 없어질 것이라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이틀 전 종합병원에서 받은 저렴한 '페니실린'은 잘 듣지 않을 테니 투약을 중지하고 본인이 처방하는 '제대로 된' 항생제를 7일간 복용하라고 해 주었다. 페니실린이라니,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 약은 2차 세계대전 때나 쓰던 약이 아니던가? 영국이 자랑하는 '무상 의료'의 실상을 깨닫고 기가 막혔다.


사설 GP에서 처방받은 항생제는 바로 근처의 약국에서 의사 처방전으로 쉽게 살 수 있었다. 새 약을 처방받은 지 하루 만에 아이는 열이 떨어지고 3일 만에 거의 다 나았다. 아내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보험이 안되어도 좋으니 앞으로는 무조건 사설 GP만 가겠다고 선언했었다.

 

문제는 비용인데, 일반 GP와 NHS 산하의 종합 병원이 모두 무료인 반면, 사설 GP는 감기로 5분만 진료를 해도 비용이 180 파운드(약 30만 원) 가량 청구가 된다. 사설 GP는 웬만한 좋은 보험이 아니면 커버가 안되기 때문에 가난한 서민들은 이용할 엄두를 내기 어려워 보였다.




둘째 아이 감기 전쟁 후 우리는 동네 GP에 등록도 하고 이후에 감기나 자잘한 증상이 있으면 가끔 예약해서 가보고는 했으나, 무상 의료의 최전선인 동네 GP는 불친절할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건강 관리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어느 정도는 체념하면서 살았다.  


그로부터 약 1년 반 가량이 지난 어느 날,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점심 무렵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첫째 딸이 체육수업 시간에 넘어졌는데 무릎을 다쳤으니 학교에서 아이를 데려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넘어져서 다친 거라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동네 GP에서는 아이를 보더니 엑스레이도 찍어봐야 해서 자기가 치료할 수 없다고 큰 병원을 가보라며 근처 종합병원 응급실 주소를 쪽지에 적어 주었다.

영국에서는 법적 책임소재가 무섭다. 학교도 혹시나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보호자를 불러 데려가라 하고, 동네 GP도 본인이 책임질 상황은 절대 만들지 않는다.(이런 건 일반 직장인들도 몸에 배어 있다.)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GP에 들렀다가 일반 병원 응급실(A&E; Accident & Emergency)을 찾은 시간이 오후 3시였고 내가 사무실에서 일찍 나와 병원으로 찾아간 시간이 저녁 6시였는데, 아내와 아이들은 그때까지도 응급실 한쪽에 앉아 있었다. 기본적인 소독과 처치는 했으나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


슬쩍 둘러보니, A&E에는 성인들이 십 수미터는 줄을 서 있었고, 온통 시장통 같았다. 어린이와 약자 전용 응급실로 갔기 때문에 그나마 덜 복잡했는데, 점심때 무릎 부상을 입은 아이가 저녁에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니 말문이 막혔다.

엑스레이를 찍고 드레싱을 하고 결과를 보느라 또 기다렸는데,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만난 의사는 엑스레이 상으로는 뼈에는 이상이 없고, 무릎에 덮은 거즈는 방수 기능이 있는 '비싸고 좋은' 거니 일주일 정도 두면 될 거라고 했다. 그렇게 치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밤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체육시간에 다친 무릎 치료에 9시간이나 허비한 것이다.


정작 문제는 그 후에 일어났다. 나는 그다음 날로 출장을 갔다가 이틀 후에 돌아왔는데, 아이의 무릎은 며칠이 지났어도 아물기는커녕 자꾸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딸이 계속 통증을 호소하는 데다 아내는 거즈 밑으로 뭔가 거무스름한 게 비친다며 한번 봐 달라고 했다.

흥건한 거즈를 걷어내고 핀셋을 소독해서 만져보니 딱딱한 느낌이 돌 같았다. 미끄러웠지만 힘들게 살 아래 박혀있던 검은 물체를 잡아당겼더니, 새끼손톱만 한 시멘트 조각 같은 게 살 속에 있다가 쑤욱- 하고 뽑혀 올라왔다. 이런 이물질이 상처 속에 있는데 아물 리가 있나. 도대체 종합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은 의사들은 무엇을 본 것인가?

아이의 무릎 상처 속에서 빼낸 돌멩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던 나는 또다시 수소문을 한 끝에 한인들 사이에서 '런던의 화타'라고 불리는 또 다른 사설 외과 GP를 찾아 아이를 데리고 갔다. 돌조각 사진과 아이 무릎을 보던 외과 의사도 황당해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의사는 간호사와 함께 재빨리 드레싱을 다시 하고, 무릎에 혈액순환이 잘 되어야 한다며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다리 전체에 압박 붕대를 씌웠으며, 상처에 염증이 매우 심각하다며 항생제를 처방했다.

이 사설 GP 역시 한번 가서 치료를 할 때마다 200 파운드(약 35만 원)를 청구했지만, 3번가량 가서 치료를 받으니 상처가 나았다. 까진 무릎 치료에 100만 원이 들어간 셈이었다. 하지만, 중학생 딸아이의 무릎에는 커다란 흉터가 남았다.




한국인으로서 나는 영국의 의료 체계에 대해 실망도 많이 하고 불신이 높지만, 학자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경제학자였던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가 쓴 '베버리지 보고서(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를 현대 사회복지 제도의 바이블로 친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희망을 잃은 영국 국민을 위해 강력한 복지 국가 건설을 기치로 내걸었고, 상대 정당인 노동당 소속이었던 베버리지를 각료로 임명해 공공 교육과 의료를 모두 국가가 책임지도록 설계했다.

유명한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그때 유래한 말이다.

윌리엄 베버리지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많은 유럽의 국가들이 복지국가의 '원조' 영국을 벤치마킹했고, 이후 유럽은 30여 년간 경제적 호황을 누리며 발전을 이루었다.

1970년 대 전 세계 경제에 타격을 준 석유 파동 이후, 1980년대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영국의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는 신자유주의에 입각하여 '작지만 강한 정부'를 표방하면서 방대했던 국가 주도의 복지 정책을 대폭 폐지하였다. 그럼에도 NHS로 대표되는 국가 책임의 보건 서비스 제도는 지금까지도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

영국 NHS 홈페이지 캡처

국가가 책임진다는 말은 좋으나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는 탓에 정부의 예산 사정에 따라 서비스의 품질이 달라지는 데다(페니실린을 처방하지 않았나), 병원이나 의사들은 준공무원이라 경쟁이 없어 현대 영국의 의료 서비스 수준은 너무나 형편없다.

실제로 내가 살던 동네의 GP는 엄청나게 불친절한 데다 서비스 수준은 우리나라 보건소에 비할 바도 아니다. 지역 신문에는 늘 GP 배치 의사에 대한 처우 문제, 의사당 과도하게 많은 환자 수 등과 같은 수많은 이슈들이 지면을 도배했었다.


영국과 같은 국가 의료 서비스의 장점 중 하나는 암과 같은 큰 병에 걸렸을 때 개인의 부담 없이 국가가 치료해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위급한 병이 확인되면 프로세스도 빨라지고 치료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소수의 위급, 중증 환자가 받는 혜택에 비해 절대다수의 경증 환자가 받는 의료 서비스는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영국이나 유럽의 회사에서는 사람들이 일을 하는 태도가 아시아와 다르다. 여기서는 조금만 몸이 좋지 않아도 병가(Sick Leave)를 내거나 재택근무(Work from Home)를 일상적으로 한다. 몸 상태가 100%가 아닐 때 쉬는 것은 휴가를 쓰는 것이 아니라, 매니저에게 이야기하고 그냥 쉴 수 있는 것이다.

유럽 사람들과 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만 해도 이런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영국에 온 첫해 겨울에 내가 지독한 감기에 걸려 보니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GP 처방은 '차 마시고 쉬라'는 게 다였고, 나는 온몸이 아파 움직일 수도 없어 거의 일주일을 침대에 꼼짝없이 끙끙대고 누워있었다. 그 후로는 누가 아프다고 하면 '빨리 가서 쉬라'고 하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론적으로는 NHS에서 의료를 책임져 주니 의료보험에 들 필요가 없으나,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사설 의료보험에 많이 가입한다. 비싸고 좋은 의료보험에 가입하면 수준이 떨어지는 일반 GP나 NHS 지정 병원이 아니라, 사설 GP나 질 좋은 독립 병원에서 보다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저렴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설 보험이라 종류가 많고 지원 수준이 천차만별이며, 의료 문제가 생겼을 때 처리 프로세스도 다 다르다.


영국에서 ‘국가가 의료를 책임진다'라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부는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사람이 없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국민 개개인은 본인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최상의 Private 서비스부터 '죽지 않을 만큼만’ 조치 받는 수준까지 다양한 의료 서비스 중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영국에 사는 한 친구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었다.

‘여기서는 아프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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