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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Oct 12. 2019

예술과 낭만의 완벽한 조화, 프라하의 상징 카를교

백탑의 도시, 프라하로 떠나는 가족여행 #2

600년을 이어온 예술의 다리

블타바 강을 가로질러 프라하 성이 있는 말라 스트라나(Malá Strana) 지역과 반대편 구시가를 연결하는 카를교(Karlův most; Charles Bridge)는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돌다리’로 꼽힌다.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4세는 프라하를 제국의 중심지로 삼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다리는 그의 명에 따라 1357년 착공되어 1402년에 완공되었다. 원래 카를교가 있던 자리에는 12세기에 지어진 블타바 강 최초의 돌다리 유디스교 Judith Bridge가 있었는데, 1342년 홍수로 무너져 내려 왕이 재건축을 지시한 것이었다.

다리의 건축은 프라하 성의 비투스 대성당 건축을 이끌었던 피터 팔러 Peter Parler가 맡았는데, 팔러의 집안은 중세 시대에 매우 유명한 건축가 집안으로 팔러는 쾰른, 뉘른베르크 등 많은 도시의 건축에 관여했었다.

카를교 건축. (사진 출처 : easyrideprague.com)

카를교는 1800년대까지 블타바 강의 유일한 다리였기 때문에 중부 유럽의 동서를 잇는 교역도시로 프라하가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래는 그냥 ‘돌다리’ 또는 '프라하 다리'로 불렸는데, 1870년 이후 ‘카를교’라는 명칭이 붙어 오늘까지 프라하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다리에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버스나 트램이 다녔으나, 다리 손상으로 붕괴 위험이 커지면서 대대적인 보수공사 후 지금 같은 보행자 전용 다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카를교는 프라하 역사 지구의 양쪽을 이어주는 유일한 보행 전용 다리이기 때문에, 로컬 사람들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하루 종일 붐비는 곳이다.

프라하 성이 있는 말라 스트라나 지역과 구시가를 연결하는 카를교 (구글 위성 사진 캡처)
말라 스트라나 지구의 페트린 타워에서 본 카를교 전경.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카를교의 교탑 Bridge Tower

아이들과 함께 길거리 음식인 뜨르들로(굴뚝 모양의 빵)를 먹으며 구시가 골목길을 걸어 나왔더니 눈 앞에 카를교의 구시가 교탑(Old Town Bridge Tower)이 나타났다. 교탑 사이로 보이는 다리와 건너편의 풍경만으로 이미 설레는데, 되도록 천천히 걸어보고 싶어서 다리 옆 강가로 먼저 내려가 보았다.

우중충하게 색이 바랜 돌다리의 아치가 다리의 역사를 말없이 이야기해 주는 듯했고, 600년 넘게 지켜온 웅장한 모습은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는 듯했다.
다리의 철제 난간에는 수많은 연인들의 이름과 하트가 새겨진 자물쇠들이 채워져 있었다. 파리의 퐁네프 다리나 쾰른의 철교처럼 프라하의 카를교도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곳인가 보다.

구시가에서 바라본 건너편. 저 멀리 프라하 성이 보인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카를교 옆의 난간

구시가 교탑은 유료로 올라가 볼 수 있는데, 아이들이 거부 의사를 밝혀둔 터라 탑 위의 풍경을 상상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다리 반대쪽 말라 스트라나 쪽에도 교탑이 있고 다리 양쪽의 탑들은 예전에 통행료를 받았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전망대인 구시가 쪽 탑 꼭대기에서 보는 뷰가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가족들의 반대로 올라가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교탑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검은 독수리 문장과 보헤미아 왕국의 사자 문장이 선명하게 장식되어 있다.

구시가 쪽의 카를교 교탑(Old Town Bridge Tower). 전망대의 뷰가 프라하에서 가장 유명하다.
교탑에 선명하게 장식된 신성 로마 제국의 문장과 보헤미아 왕국의 문장. 이튿날 촬영.

한편, 반대쪽 말라 스트라나 지구의 교탑은 모양이 좀 특이한데, 탑이 2개로 이루어져 있고 구시가 쪽 교탑과 달리 다리 뒤의 거리와 건물들과도 이어져 있다. 사실은 말라 스트라나의 교탑이 먼저 지어진 것으로 구시가 교탑이 이 탑의 디자인을 따른 것인데, 둘 중 작은 탑이 카를교 전에 있었던 유디스교의 교탑이었다.

카를교는 유디스교가 있었던 곳 바로 옆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를교 옆 강 속에는 예전 유디스교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말라 스타라나 지역의 레서 타운 브리지 타워.
유디스교의 원래 외치를 카를교와 비교해볼 수 있다. (사진 출처 : easyrideprague.com)


길거리 화가와 음악가들

인파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다리로 걸어 올라가 보았다. 저 멀리 프라하 성이 한눈에 올려다 보이는 가운데, 다리 양쪽으로 시야가 탁 트이며 옛 시가지 풍경이 펼쳐졌다. 주황 지붕으로 덮인 노란색 옛 주택 및 건물들 사이로 솟아있는 첨탑들이 중세 도시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프라하 시내를 다니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카를교를 지나가게 된다. 구시가지 어디든 걸어서 다닐 수 있기도 하고, 프라하 성이나 성당 등 관광지가 대부분 구시가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카를교는 프라하의 시작이자 끝이다.  

카를교 위에서 바라본 구시가 방향
카를교 위에서 바라본 석양의 말라 스트라나

북적북적한 곳이 얼마나 낭만적이겠느냐 싶겠지만, 다리 위에서 보는 프라하의 아름다운 풍경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되는 데다 다리 난간을 따라 서 있는 30개의 조각상이 예술에 대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넓은 다리 위에는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며 진열되어 있고 다리 곳곳에는 길거리 음악가들이 공연을 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길이 621미터(2,037 피트)의 다리는 앞만 보고 걸어가면 건너 가는데 10분도 안 걸리겠지만, 한발 한발 옮길 때마다 바뀌는 풍경 속에 어우러지는 조각상과 그림, 음악, 사람들의 모습에 빠져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는 곳이다.

참, 카를교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모두 허가를 받아야 한단다.

길거리 음악 밴드. 다음날 화창할 때 만났다.


카를교 위의 석상(石像)

카를교 위에는 다리 장식을 위하여 1683년부터 1928년까지 무려 300년에 걸쳐 30개의 조각상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었는데, 현재 진품은 모두 국립 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다리 위의 작품들은 레플리카라고 한다.

가장 유명한 석상은 1683년에 다리에 최초로 세워진 성 얀 네포무츠키(Svatý Jan Nepomucký ; 성 요한 네포무크) 석상으로, 이 조각상에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이다.


성 얀 네포무츠키의 전설이란 무엇일까.

교황의 정통성 문제로 보헤미아의 왕 바츨라프 4세와 프라하 대주교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을 때, 왕의 2번째 왕비인 소피 왕비에게 정부(情夫)가 있었다. 죄책감을 느낀 왕비는 고해 신부이자 프라하 대교구 총대리인 얀 네포무츠키에게 고해성사를 바쳤고, 왕비의 외도를 눈치챈 왕이 얀 네포무츠키 신부를 불러 왕비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려 했다.


얀 네포무츠키 신부는 고해성사의 내용은 발설할 수 없다며 대답하지 않았다. 왕은 자신에게 말할 수 없다면 생명이 있는 누구든 한 명에게 말해 보라고 했고, 얀 네포무츠키 신부는 왕의 옆에 있던 개에게 귓속말로 이야기하는 바람에 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게 된다.


이후 베네딕토 수도원 선거에서 대립 교황을 지지하던 바츨라프 4세의 바람과 달리 대주교 측을 지지하던 얀 네포무츠키는 앙심을 품은 왕에게 체포되어 혀를 잘리는 고문을 당하고 카를교에서 강물로 생매장당하여 순교했다.


죽음의 순간에도 고해성사를 지킨 성 얀 네포무츠키는 교황에 의해 시성(諡聖)이 되었고,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오늘날 체코의 수호성인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다리에서 처형되기 직전에 ‘이 자리에서 소원을 비는 자는 모두 이루어지리라’라고 했단다.

다리 위 성 얀 네포무츠키 석상 아래는 소원을 비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석상의 기단부에는 사람들이 손을 대고 소원을 비느라 반짝반짝해진 2개의 부조가 있는데, 부조는 위의 일화를 묘사하고 있다.

왼쪽의 부조는 얀 네포무츠키 신부에게 고해성사하는 왕비를 배경으로 바츨라프 4세와 그의 충견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카를교에서 처형되는 얀 네포무츠키 신부와 그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왕비가 새겨져 있다.

카를교에 최초로 세워진 성 얀 네포무츠키 석상. 소원을 비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성 얀 네포무츠키 석상에서 소원을 비는 우리 가족. 왼쪽과 오른쪽에 성 얀 네포무츠키의 일화를 묘사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한편, 성 얀 네포무츠키가 처형되었던 곳은 석상의 위치와 조금 다른데, 다리 중간에 따로 십자가와 함께 표시되어 있다. 낮에는 인파에 휩쓸려 다른 석상들을 보느라 그 위치를 무심코 지나쳤는데, 밤에 다시 다리를 걷다가 십자가와 함께 표시되어 있는 처형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예언에 따르면 실제로는 동상이 아닌 이 곳에서 소원을 빌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성 얀 네포무츠키가 처형된 장소. 카를교 중간에 있다.

카를교에는 또 남다른 의미가 있는 석상이 있는데, 바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히브리어로 적혀있는 '예수 수난상'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목재로 된 십자가 상이 1361년에 세워졌는데, 1419년 후스파(종교 개혁파)의해 파괴되는 등 몇 번에 걸쳐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현재의 석상으로 교체되어 세워진 시기는 1861년이라고 한다.


이 수난상의 황금 글씨는 히브리어로 적혀 있는데 여기에 일화가 있다. 1696년, 한 유대인 지도자가 신성 모독 혐의로 고발이 되었는데, 그에게 형벌로 예수상의 십자가 주위에 두를 황금 도금 히브리어 문자를 구매할 기금을 모으게 하여 제작했다고 한다. 히브리어로 이샤아서에서 유래한 '신성하고 거룩하며 거룩한 만주의 주'라고 쓰여 있다고.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에게는 모욕적으로 보이는 희귀한 예수 수난상이다. 십자가 양 옆에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의 조각상이 서 있는데, 이 조각상은 1653년에 제작된 것으로 카를교에 있는 석상 중 가장 오래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세계 유일의 히브리어가 적혀있는 예수 수난상

다리에는 이 외에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예술적 완성도가 높고 섬세한 작품들이 많았다. 30개나 되는 석상들을 하나하나 감상하다 보니 금방 다리 끝에 다다랐다.

성모 마리아와 성 베르나르도 석상
성모 마리아와 성 도미닉,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 석상

카를교의 야경

프라하와 카를교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

다리 주변의 보헤미아 전통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카를교 주변으로 나갔더니, 낮과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양쪽의 교탑은 조명을 받아 더 화려했고, 강 너머 프라하 성도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블타바 강에는 끊임없이 유람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카를교도 밤이 되니 비교적 한산해졌고, 은은한 노란 불빛 아래서 석상들은 더욱 우아한 자태를 보였다.

우리는 한참 동안 카를교 위에서 말없이 야경을 바라보며 프라하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말라 스타라나 지구의 카를교 교탑인 레서 타운 브리지 타워 야경
카를교에서 바라본 블타바 강
다리를 건너 돌아오면서 본 프라하 성과 카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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