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탑의 도시, 프라하로 떠나는 가족여행 #3
구시가 광장 옆 틴 성당 뒤의 조그만 에어 비앤 비의 숙소는 생각보다 아침식사가 근사했다. 가볍게 모닝커피를 한잔 하려다 아이들과 같이 토스트와 요구르트, 과일로 여유 있게 아침을 먹고 다시 시내로 나섰다.
비가 흩뿌리고 우중충했던 첫날과 달리, 하늘은 더없이 파랗고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문득, 오래전 처음으로 해외에 나갔을 때, 캐나다의 하늘을 보며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푸르다고 배웠던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면서 혼자 피식 웃었던 게 생각났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군사 독재 시절, 우리는 그렇게 '나라 사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배웠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는 미세먼지와 황사 때문에 지구에서 가장 공기 질이 안 좋은 땅에서 지내게 되었는지. 눈부시게 푸른 프라하의 하늘을 보니 온갖 생각이 스쳐갔다.
상큼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길을 나선 우리 가족이 구시가 광장을 지나 골목길에 들어섰는데, 빙긋 웃으며 서 있던 '은색 동상'이 둘째 아이에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엄청 졸라댔다. '인간 동상'이 말을 거니 반갑고 신기했던 아들이 원했으므로 한 장을 찍어주고 나서 50 코루나(약 2500원)를 그 앞 상자에 넣어 주었다. 런던에서 하던 대로 난 어디까지나 호의로 '팁'을 준 것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동상 친구의 표정이 변하더니 사진값은 100 코루나라며 돈을 더 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난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친구 표정을 보니 상황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기가 막혀 아이들을 보고 '빨리 가자'며 재촉해 돌아서는 순간, 이 친구가 내 옷깃을 잡고 돈을 달라고 시비를 걸었다.
내가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소리치고 더 강하게 휙- 하고 돌아섰더니, 뒤에서 한참 동안 나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을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일정도 있는 데다 즐겁고 상쾌했던 아침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유럽에서 이와 같은 불쾌한 경험을 할 가능성은 남쪽과 동쪽으로 갈수록 커진다.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나 스위스 또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는 보기 어려운 관광객 등쳐먹기 수법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그리스나 체코와 같은 남유럽이나 동유럽에서 유독 자주 만나게 된다. (참, 파리도 몽마르뜨 언덕은 동유럽 같다.)
웬만하면 웃으며 넘어갈 만큼 익숙한 일도 많지만 유럽을 잘 모를 것처럼 보이는 ‘아시아인 관광객’을 타겟으로 사기를 치려할 때는 나도 참기가 어렵다.
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줄 알고 겁에 질려하는 아들에게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며 안심시키느라 아내가 진땀을 흘렸다.
겁에 질린 아이들을 안심시키고, 다시 정신줄을 부여잡으며 조용한 아침의 구시가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내 전날 밤에 걸었던 카를교가 나타났다. 잔뜩 찌푸렸다가 화창하게 갠 날씨 덕분인지 다리 위는 더욱 활기차 보였다. 곳곳에서 길거리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고 화가들은 더 많이 나와서 그림을 팔거나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었다. (예술과 낭만의 완벽한 조화, 프라하의 상징 카를교)
전날 잘 몰라서 그냥 지나쳤던 많은 조각상들도 간밤에 인터넷으로 공부한 만큼 다시 한번 자세히 둘러보았고, 어제 없었던 음악가들의 공연도 감상하는가 하면 성 얀 네포무츠키 석상 앞에서 각자 소원도 빌어 보았다.
파란 하늘 아래 카를교는 더욱 역동적이었다.
카를교를 지나 Lesser Town에 이르렀더니, 프라하 성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작은 광장이 보였고 청록색 로코코 양식의 종탑이 선명한 성당이 나타났다.
단독 건물이 아니라 옆에 ㄷ자 모양의 대학 건물과 이어져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알프스 북쪽 바로크 인테리어의 정수’라고 일컬어지는 성 니콜라스 성당이다.
프라하 구시가 광장에도 ‘성 니콜라스 성당’이라는 동일한 이름의 성당이 있어 헷갈리기 쉽다. 실제로 인터넷을 찾아보면 여행 사이트 같은 곳에서도 사진이나 설명이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해서 봐야 한다.
한편, '어린이의 수호성인'인 성 니콜라스는 우리에게 산타 클로스로 더욱 친근한 이름이다. 산타 클로스는 성 니콜라스의 별칭으로, 270년 경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태생으로 남몰래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는 대주교 성 니콜라스에서 유래한다. 12세기 초 프랑스 수녀들이 성 니콜라스의 축일(12월 6일)을 기념하여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고, 이것이 유럽으로 퍼져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터키 남쪽의 유명한 휴양지 안틸리아에 가면 성 니콜라스 성당 및 어린이들과 서 있는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지금도 12월 5일이 되면 씬타클라스(SinterKlaas)라고 해서 회사에서도 직원들에게 작은 선물 꾸러미를 나누어주고,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준다. 네덜란드에 왔던 첫 해 겨울, 왜 이 나라는 크리스마스가 아닌 12월 초에 이런 이벤트를 하는지 궁금했었는데 사실은 이게 '제대로 된' 전통이었던 것.
산타 클로스가 전 세계로 퍼졌던 계기는 17세기에 북미 신대륙으로 이주했던 네덜란드 사람들에 의해 SinterKlaas 전통이 북미로 이어져 영어로 산타 클로스가 된 것이었고, 19세기 이후 크리스마스와 함께 산타 클로스도 전 세계로 퍼졌다.
현재의 붉은색 산타 클로스 복장은 코카 콜라사가 1931년 겨울에 콜라의 판매량이 크게 줄어들자 크리스마스 캠페인으로 붉은색 산타 클로스 복장을 히트시킨 후에 굳어져 오늘에 이르렀다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 대주교였던 성 니콜라스도 붉은색 가운을 입었으므로 100% 코카콜라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아니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아무튼, 마케팅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가 코카 콜라의 산타 클로스이긴 하다.
당초 계획에 따르면 오늘의 핵심 일정은 프라하 성에 올라가는 것이었고, 가족들에게도 성으로 가는 길에 가볍게 한번 들러보자고 했었는데 여기에 생각보다 큰 반전이 있었다.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져 있다고는 하나, 수없이 많은 유럽의 성당 중 하나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웅장한 예술품으로 여행의 즐거움을 안겨준 것. 성 니콜라스 성당이 이번 여행에서 준 의미였다.
원래 이 성당 자리에는 1283년에 프라하의 대주교가 고딕 양식으로 성당을 지었으나, 1700년대에 들어 예수회의 결정으로 이탈리아의 건축가 지오반니 도미니코 오르시(Giovanni Domenico Orsi)가 1673년에 설계한 방식대로 재건축하게 되었다고 한다. 1703년부터 여러 단계에 걸쳐지어 올렸는데, 종탑이 완성된 후에도 20여 년간 인테리어를 위해 시간과 돈을 쏟아부었고, 1775년에 마침내 이 지역 교구의 성당이 되었다.
당시 탑은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기 때문에 원래 종탑으로 쓸지 화재 감시탑으로 쓸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화재 감시탑으로 쓰였다고.)
체코슬로바키아 공산 시절에는 성당의 종탑이 미국과 옛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을 내려다보고 있는 데다 서독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국가 정보국의 감시 타워 역할도 했었다고 한다. 돔의 지름은 20미터, 종탑의 높이는 79미터에 이른다.
성 니콜라스 성당은 특이하게 유료라서 1인당 70 코루나(약 3천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성당 관람을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바로크 장식의 웅장함과 화려함은 봐야 한다며 달래서 들어갔는데, 모두들 입구에서부터 입이 쩍 벌어졌다. 성당은 내부의 화려함이 극에 달했는데, 유럽의 웬만한 성당들에 가봤지만 이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된 성당을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파리 근교의 베르사유 궁전이나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바로크의 대표 건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성 니콜라스 성당을 일컬어 왜 알프스 북쪽 바로크 건축의 대표라고 하는지 고개가 끄떡여졌다.
시큰둥하며 따라 들어왔던 아이들도 갑자기 조용히 천장의 그림들과 화려한 제단들, 성상들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성당 자체는 그다지 큰 성당은 아닌데, 내부의 경건한 분위기에 저절로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특히, 유료 관람이라서 그런지 방문객이 많지 않아 분위기가 더욱 정숙했던 것 같다.
회랑 천장의 그림이 인상적이었는데, 성 니콜라스가 승천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서 유럽에서 가장 큰 프레스코화라고 한다.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의 화가 얀 루카스 크래커(Jan Lukas Kracker)가 1761년에 완성했다.
성 니콜라스 성당의 내부는 모두 인공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있고, 모든 장식들을 화려하고 과장된 모습에 금도금이 되어 있다. 바로크 양식은 원래 포르투갈어의 '비뚤어진 진주(Pérola Barroca)'가 어원이다. 16-17세기부터 이 양식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18세기 들어 새롭게 등장한 신고전주의를 따르는 예술가들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과장된 양식에 대해 다소 멸시하는 시선으로 붙였던 이름이었다.
고딕 양식도 그랬듯 결국 멸시의 의미는 사라지고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졌다.
주 제단은 금도금한 성 니콜라스의 동상을 중심으로 양쪽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t. Francis Xavier )와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St. Ignatius of Loyola)가 장식되어 있다. 십자가의 예수상 외에도 하늘의 천사와 성인, 군대가 모두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눈이 부셨다.
성당 돔의 지름은 20미터이고 내부 높이는 57미터에 이르는데, 이 인테리어는 프라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프레스코화로 프란츠 사비에르 팔코(Franz Xaver Palko)가 그렸다고 한다.
성 니콜라스 성당은 내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 볼 수 있다.
이렇게 위층까지 올라가 볼 수 있는 성당도 처음이어서 신기했는데, 2층에는 다양한 성화(聖畫)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뜻하지 않게 그림 감상도 할 수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성당은 그 화려함이 더욱 돋보였는데, 햇빛이 황금빛 장식을 더욱 화사하게 만들었다. 빛을 활용하는 것 역시 바로크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성당은 모차르트가 1787년에 방문하여 오르간 연주를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며, 1791년 12월에 모차르트가 서거했을 때 이 곳에서 처음으로 추모 미사가 열렸다고 한다. 2층에 올라가서 성당의 정문 쪽을 보면 모차르트가 연주했다는 오르간이 최대 6미터 길이에 이르는 4천여 개의 파이프를 뽐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라하에서는 곳곳에서 저녁 콘서트가 많이 열리는데, 성 니콜라스 성당에서도 홈페이지를 통해서 오르간 연주를 포함한 콘서트 이벤트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런 아름다운 성당에서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의 콘서트를 볼 수 있다면 색다른 경험이 될 텐데 참 아쉬웠다.
성 니콜라스 성당은 프라하 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고, 성 비투스 대성당의 그늘에 가려 많은 사람들이 외관만 보고 지나가는 곳 중의 하나이다. 바로크 건축의 화려함도 밖에서 보면 잘 느껴지지 않으므로, 성 비투스 대성당만 생각하고 지나치는 사람들에게는 프라하의 평범한 성당 중 하나 정도로 보이기 쉽다.
바로크 양식의 특징이 화려함이라고는 하나, 나 역시 이 정도로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성당인 줄 몰랐었는데 프라하에서 뜻밖의 발견을 해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된 기분이었다.
성당 밖으로 나왔더니, 주차장 건너편 작은 티켓 오피스에서 프라하의 음악회 티켓을 팔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연주했던 곳 앞이라 그런지 은근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프라하 성과 성 비투스 대성당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언덕 위의 프라하 성은 많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