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탑의 도시, 프라하로 떠나는 가족여행 #4
여행 둘째 날의 목적지는 프라하 성이었다.
거대한 중세 시대의 성을 떠올리기 쉬운 명칭이지만 프라하 성은 단일 건축물이 아니라 언덕 위 성채 단지를 의미한다. 성채는 궁전과 미술관, 성당, 정원, 승마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왕과 왕실의 보물도 보관되어 있다. 프라하 성의 일부는 현재도 대통령 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성은 9세기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Přemysl) 왕조의 보르지보이(Bořivoj) 대공에 의해 처음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프르셰미슬의 시조인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보헤미아 최초의 그리스도교 국가를 탄생시킨 인물이다. 프라하 성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성(Ancient castle)으로 기네스 북에 올라 있다.
성채 안에서 꼭 가봐야겠다고 맘먹은 곳은 체코의 중요한 문화유산 중 하나이자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명한 성 비투스 대성당(Katedrála Sv. Víta, 영어로 St. Vitus Cathedral)이다.
성 비투스 대성당은 프라하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다.
성 니콜라스 성당에서 나온 우리는 프라하 성으로 길을 잡았다. (프라하의 숨겨진 화려함, 성 니콜라스 성당)
언덕길과 계단을 약 10여분 간 걸어 올라가면 되면 가까운 거리였으나, 아내와 아이들은 '당이 떨어져' 이대로는 갈 수 없다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더니 옆에 보이는 맥도널드 맥카페로 무작정 나를 이끌었다. 여행에서 식도락을 중시 여기는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이미 분위기는 넘어가 버린 후였다.
골목 안쪽 작은 정원의 분수대까지 갖춰진 야외 테이블은 패스트푸드점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근사했는데, 이왕 들어선 카페인지라 가볍게 요기를 하고 일어섰다.
카페인과 당 충전이 끝난 후 프라하 성곽을 끼고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길은 넓은 데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서 등산을 극도로 싫어하는 아내도 여유롭게 올라갈 수 있었다. 금세 도착한 프라하 성의 광장은 긴 왕궁 건물과 성당, 미술관 등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가운데 성 비투스 대성당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족히 50미터도 넘게 줄 서 있었다.
성 비투스 대성당은 보헤미아 공국의 대공 바츨라프 1세에 의해 930년에 건설된 로마네스크 교회(Romanesque Rotunda)를 기원으로 한다. 바츨라프 1세는 할아버지인 보르지보이 대공과 할머니인 성 루드밀라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데,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헨리(Henry the Fowler - 오토 1세의 후임)로부터 제국의 수호성인인 성 비투스의 성해(聖骸) 중 어깨를 기증받고, 이를 헌정하기 위하여 프라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원형 홀 모양의 교회를 지었던 것.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기독교 수호자임을 공인받은 지 얼마 안 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더욱 열심히 포교해야 할 책임이 있었고, 당시 성인의 유골은 중요 성물이어서 그 무덤 위에 교회를 짓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츨라프 1세는 동생에게 암살을 당했다. 대공은 동프랑크 왕국의 하인리히 1세에게 봉신 서약을 하고 조공했는데, 그의 동생인 볼래슬라프 1세는 그런 ‘굴욕’의 이유가 그리스도교 때문이라고 앙심을 품고 미사에 가던 형을 죽여버렸던 것.
후에 바츨라프 1세는 프라하 성 내의 교회에 안치되었고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으로 시성 되었다.(성 바츨라프 ; Svatý Václav, 영어로 St. Wenceslas)
그 후 프라하 성으로 몰려드는 기독교 순례자를 감당할 수 없던 왕실은 11세기에 기존 성지를 허물고 70미터 크기의 바실리카로 다시 건축했는데, 시간이 흘러 1344년에 프라하 주교령이 대주교령으로 승격되는 중요한 변화를 맞게 된다.
중세 가톨릭에서 대성당(Cathedral)이라 함은 대주교좌를 의미하기 때문에 대주교의 숫자만큼 대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 보헤미아의 왕 얀(King John of Luxemburg)은 대주교좌에 걸맞은 새로운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짓기로 하고 왕세자 카를(카를 4세)과 함께 주춧돌을 놓았다.
얀에 이어 즉위한 카를 4세는 대성당 건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첫 번째 건축가였던 프랑스 출신의 마티아스(Matyáš of Arras)가 1352년에 죽자 23살의 천재 건축가 피터 팔러(Peter Parléř)에게 맡겨 성당의 건축을 이어가게 하였다. 피터 팔러는 카를교를 건설한 건축가이기도 한데, 그의 설계 덕에 비투스 대성당이 후기 고딕 건축사에 한 획을 긋게 되었다.(예술과 낭만의 완벽한 조화, 프라하의 상징 카를교)
그러나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웅장한 고딕 양식이었던 탓에 1399년, 피터 팔러가 죽기 직전에야 주 탑의 공사가 시작되었고 이후 전쟁과 전염병 등으로 짓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그의 사후 500여 년간 성당은 현재 대비 절반 크기의 미완성인 상태를 유지되게 되었다. 피터 팔러는 본인이 죽고 나면 건축이 중단될 것을 예감했던지 내진(제단부 ; Choir) 부분에 임시 벽을 세워 장미 창(로제트; Rosette)으로 마감했었다고 한다.
19세기 유럽에 들어선 낭만주의 풍토에 힘입어 중세 이후 방치된 중요 건축물을 완성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졌다. 수백 년간 건설이 중단되었던 독일의 쾰른 대성당도 이 시대에 완성되었던 것처럼, 프라하에서도 1861년에 요셉 크래너(Josef Kranner)의 감독 아래 대성당의 개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지부진했던 대성당의 개보수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들어선 20세기에 들어서야 국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속도가 붙었고, 1929년 카밀 힐베르트(Kamil Hilbert)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었다. 여전히 수백 년째 짓고 있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다 파밀리아 대성당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성 비투스 대성당도 완성까지 엄청난 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대성당에 입장하는 줄은 길었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보안 검색을 끝내고 코흘의 분수대가 있는 광장을 통과했더니, 고개를 있는 힘껏 뒤로 젖혀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고딕 양식의 파사드가 나타났다. 성 비투스 성당은 주변이 그다지 넓지 않아서 성당의 전체적인 모습을 담기 버거운데, 파사드 앞은 공간이 더욱 좁다. 전면 파사드만 보면 고딕 건축의 본거지 프랑스의 여느 성당 못지않다.
대성당의 내부에 들어섰다.
하늘 높이 수직으로 올려 상승감을 극대화한 데다 많은 창으로 빛의 연출에 신경을 썼다. 본당 입구에서 내진의 제단부 방향으로 보니 동쪽 끝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눈에 띄었다. 본당 중앙에서 파사드 방향으로 돌아보면 들어올 때 본 장미 창도 매우 화려했다. 장미 창은 고딕 양식 파사드의 특징이다.
성 비투스 대성당은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대성당 입구 왼편 예배당에 있는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의 작품이 눈에 띈다. 중앙 위에는 슬라브 민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던 비잔틴의 성직자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 형제(St. Cyril & St. Method)'가 묘사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성 바츨라프와 그의 할머니 성 루드밀라 등 보헤미아 성인들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감과 화풍이 다른 어떤 성당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이유는 장식 예술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였던 무하의 감각적이며 이상적인 화풍과 함께 직접 유리에 그림을 그려 몇 번씩 구웠던 새로운 제작 기법 때문이다.
알폰스 무하는 슬라브 민족의 자부심이 남달랐던 아르누보 예술의 거장이자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이다. 1895년, 파리에서 전화 한 통을 받고 제작했던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의 ‘지스몬다(Gismonda)' 공연 포스터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명성을 얻게 된 그는 미국에서도 활동을 했고, 심지어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하는 지스몬다 포스터의 성공 이후 각종 포스터와 책의 삽화, 광고 등에 걸쳐 많은 상업 활동을 했는데, 좀 더 ‘고상한’ 예술을 하고자 고향인 체코로 돌아와 '슬라브 서사시'와 같은 민족주의 작품을 남겼다.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그 와중에 제작된 것이다.
알폰스 무하의 작품 외에도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들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사실 보헤미아는 베네치아와 더불어 중세부터 유리 공예로 손꼽히는 나라였다. 보헤미안 글라스는 King of Glass라고 불리기도 할 만큼 체코의 유리는 유명하며 공예 장인들도 많았다.
대부분 19세기에 제작된 스테인드 글라스를 자세히 보면 좀 더 색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성당건축위원회에서 기업과 유력 가문들로부터 기부를 받으며 스테인드 글라스 별로 어디서 후원했는지 표시했는데, 그로 인해 대성당의 창들이 광고판이 되어 버렸던 것.
알폰스 무하의 스테인드 글라스도 아랫부분에 보면 은행명으로 보이는 광고가 새겨져 있다.
1929년에 만들어진 The Thunov Chapel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시편 126-5의 구절인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자 기쁨으로 거두리로다(Who sows in tears, will harvest in joy)'라는 장면을 묘사했다고 하는데, 이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 부분의 붉은 박스 속 글을 번역해 보니 체코어로 '최초의 체코 보험 회사,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며'라는 뜻이었다.
프라하의 귀족 슈바르젠베르그(Schwarzenberg) 가문에서 기증한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왼편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과 오른편에 하갈이 광야로 추방된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의 하단부에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남쪽 트랜셉트(수랑, 주 제단부 앞에서 본당을 가로로 교차하는 부분)의 The High Alter에는 마지막 심판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막스 스바빈스키(Max Švabinský)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눈에 띈다. 중앙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 세례자 요한과 성 야곱이 묘사되어 있고, 아래쪽에 카를 4세 등 보헤미아 왕들이 멋지게 차려입고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있다.
중앙 제단의 오른쪽에는 낯이 익은 얼굴의 은빛 동상이 보였는데, 이 곳이 바로 성 얀 네포무츠키가 안치된 곳이다. 성 얀 네포무츠키는 소피 왕비의 고해성사 비밀을 발설하지 않아 바츨라프 4세의 미움을 사 순교한 체코의 수호성인이다. (예술과 낭만의 완벽한 조화, 프라하의 상징 카를교)
이 묘에는 은이 2톤이나 들어갔다고 하며, 성 얀 네포무츠키가 천사들에 의해 천국으로 올려지는 장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 얀 네포무츠키의 묘 옆에는 대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성 바츨라프 예배당(St. Wenceslas Chapel)이 있다. 예배당은 피터 팔러가 지은 곳으로 하단부의 벽은 1300개가 넘는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고, 상단부는 성 바츨라프의 생애가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예배당이 보헤미아 왕관이 보관된 보관소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성 비투스 대성당은 보헤미아의 왕과 왕족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유럽의 다른 대성당들처럼 성직자와 특권층의 납골당 역할을 했기 때문인데, 그중에 눈에 띄는 석관묘가 있었다. 성당의 본당(신랑) 위에 있는 이 묘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는 최초의 보헤미아 왕인 페르디난트 1세와 왕비 및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가 합장되어 있는 묘라고 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세는 조부와 부모로부터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방대한 영토를 물려받아 통치했던 황제로, 스페인부터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이르기까지 외형상 거의 전 유럽을 다스렸던 황제였다. 그가 퇴위하면서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는 신성 로마 제국을 물려주었고(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는 스페인 왕국을 물려주었다(스페인 합스부르크).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왕조의 전성기를 보냈던 인물로, 그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를 아우르는 왕국들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군림했다.
밖으로 나와 성당의 측면부 광장으로 나갔다. (블타바 강 쪽을 바라보는 쪽이다.)
수직의 첨탑이며 종루와 예배당, 아치형 창문 등 고딕의 건축미를 뽐내던 성당은 갑자기 종탑의 꼭대기 부분만 청록색의 부드러운 바로크 양식으로 마무리되어 있어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20세기 초 성당이 완공되었을 때도 디자인이 어울리지 않아 상당히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럴 만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오늘날 성 비투스 대성당은 약간 어색한 이 종탑 덕에 오히려 랜드마크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관람객은 종탑 위에 올라가 프라하 성과 시내를 조망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당연히 아이들의 반대로 올라가지 못했다.
발걸음을 성당의 동쪽으로 옮겨 보았다.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 공중버팀벽)와 첨탑 등 고딕 건축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안쪽의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도 밖에서 보면 검은색 거대한 창으로 보일 뿐이다. 버트레스와 기둥들이 측벽의 하중을 버텨주기 때문에 무거운 석재로 쌓아 올린 성당임에도 창문을 크게 낼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고딕 양식이란 무엇인가 침을 튀겨가며 열심히 설명을 이어가 보려 했지만, 다들 쌀쌀한 날씨 탓에 따뜻하게 마실 것이 없는지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옆에 작은 카페에서 핫도그와 커피를 팔았는데 생각보다 줄이 길지 않아서 밖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피는 따뜻해서 좋았지만 날이 쌀쌀해서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차 한잔을 마시고 맞은편에 보이는 성 이르지 바실리카로 들어갔다. 성 이르지(조지) 바실리카는 프라하 성 내에 두 번째 성당으로 세워졌다. 920년에 이 성당을 처음 세운 사람은 성 바츨라프의 아버지인 브라티슬라프 1세(Vratislav I.) 대공이었으나, 화재 등으로 재건을 반복했었다.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에 따라 성 얀 네포무츠키 예배당과 연결하여 재건했었으나, 후에 군대가 점거하여 훼손하였고 20세기에 들어서야 현재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성 이르지 바실리카의 전면부 기둥 위에도 성 얀 네포무츠키 동상이 세워져 있다. 가는 곳마다 있는 성인의 동상으로 보건대 체코에서 얼마나 추앙받는 수호성인인지 알 수 있었다. 바실리카 내부에도 출구 근처에 단출한 성 얀 네포무츠키 예배당이 있다. 예배당의 제단 아래에는 섬뜩한 느낌을 주는 실제 유골이 있는데, 이 유골은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의 유골로 추정된다고.
교회는 매우 소박해서 한 바퀴 돌아보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음향 효과가 좋아서 연주회 등의 공연도 열린다고 하며, 매년 스메타나 기념일(5월 12일)부터 열리는 '프라하의 봄' 음악 축제의 주 연주회장이라고 한다. 소박하지만 아늑한 교회 안의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교회 중앙 회랑에는 보헤미아 프르셰미슬(Přemysl) 왕가의 묘비들이 안장되어 있고, 제단 오른쪽에는 아주 단출한 성 루드밀라(St. Ludmila)의 예배당이 있다. 성 바츨라프의 할머니인 성 루드밀라는 그가 왕자일 때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교에 반대했던 성 바츨라프의 어머니(자신의 며느리) 드라호미라(Drahomíra)에게 살해당했다.
앞서 이야기했 듯 성 바츨라프(바츨라프 1세)는 동생에게 살해당했는데,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살해당했던 것. 그리스도교가 퍼지기 시작한 보헤미아 왕국 초기에 나라에 얼마나 큰 혼란이 있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던 조선 후기에 한반도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했던가.
드라호미라는 시어머니를 살해한 후 바츨라프 1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을 펼쳤다. 성 루드밀라는 후에 순교자로 인정받아 시성 되었다.
한편, 성당의 천장을 보면 목조로 복원되어 있는데, 원래 브라티슬라프 1세 대공이 처음 세웠을 때 목조 성당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그때와 가깝게 복원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성 이르지 바실리카에서 나오면 왼쪽에 아주 작은 골목길이 나온다. 화려해야 할 성 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뒷골목인데 여기가 Golden Lane 즉, 황금 골목이다. (공식 명칭으로는 '황금 소로(小路)'로 번역되어 있다.)
골목길은 15세기에 북쪽 성곽을 새로 지으면서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성 방어를 위한 병사, 하인, 장인, 건설 노동자 등 일반 백성과 금은 세공사들이 들어와 살았다.
황금 소로라는 이름은 16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루돌프 2세가 연금술사들이 들어와 살도록 한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으나, 문서에 따르면 원래는 금세공 소로로 불리다 나중에 황금 소로로 바뀌었다고 한다.
루돌프 2세는 16세기 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대패한 것을 시작으로 실정을 거듭했던 황제였다. 병약하고 무능하여 모든 권한과 작위를 빼앗기고 말년에는 프라하 궁전에 유폐되어 지내다가 사망했다. 그는 실제로 과학과 연금술에 엄청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황금 소로의 집들은 우리나라 민속촌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데,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웅장한 성당이나 조각품에는 별 관심이 없던 아이들은 이 황금 소로의 집들을 구경하면서 유난히 즐거워했다.
황금 소로에는 2차 세계 대전까지는 실제로 사람이 살았는데, 체코 1 공화국(1918년 건국)부터는 소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존하기 위하여 개조를 금했다고 한다. 황금 소로가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1916년에 천재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이다.
'머물렀다'는 말은 실제로 이 곳에서 살지는 않았고 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해 집필 활동을 여기서 했다는 의미이다. 카프카는 사후에 실존주의의 선구자이자 세계적인 작가로 재조명되었지만, 생전에는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것은 아닐까?
황금 소로의 또 다른 유명한 일화는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이 곳에 살았다던 타로 카드의 예언가, 마틸다 프루쇼바(Matylda Průšová)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2차 대전시 나치 제3 제국의 멸망을 예언했다가 나치의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황금 소로까지 둘러보고 났더니, 배고픈 아이들이 민란 조짐을 보여 성곽 앞 쪽의 정원로를 통해서 다시 입구 광장으로 나왔다. 프라하 성의 광장 앞에는 프라하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스타벅스가 있다. 터키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 앞에는 유럽에서 아시아를 바라보는 위치에 스타벅스가 있다. (내 생각에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에 있는 스타벅스이다.) 하지만 프라하 성 앞의 스타벅스도 그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왜 미국 자본은 이렇게 목 좋은 곳에 자리도 잘 잡는 것인지.
프라하 성과 성 비투스 대성당은 보헤미아 천 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다만, 역사에 대한 배경 지식 없이 가면 별다른 감흥을 받기 어럽다. 대성당만 해도 수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을까? 아름답고 화려한 유럽의 문화유산 뒤에 숨겨져 있는 긴 스토리를 알면 알수록 이 고색 찬연한 도시의 한걸음이 더욱 설렐 것이다.
대성당을 방문한 기념으로 이날 저녁 식사는 가장 전통적인 보헤미아 레스토랑으로 낙점했다. 여행은 그 지방의 음식으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어야 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