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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Oct 30. 2019

자유의 상징, 존 레넌 월에서 생각한 프라하의 봄

백탑의 도시, 프라하로 떠나는 가족여행 #5

천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낭만적인 프라하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이 나라가 반 세기 동안 공산국가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폴란드, 벨라루스와 같은 구 소련 국가들의 도시에 가보면 거대한 선전용 건물 등에서 여전히 공산 시대의 잔재를 볼 수 있는데, 프라하에는 수백 년 전 중세의 모습은 강렬하게 남아있을지언정 그런 모습은 보기 어렵다.

구시가 뒤쪽 화약탑에 올라가서 본 프라하의 전경. 틴성당과 프라하 성이 보이는 중세 도시의 모습 뿐이다.


체코는 2차 세계 대전 때도 나치에 일찌감치 항복해 버린 탓에 전쟁의 포화를 피했고,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의 침공에도 피해를 우려해 군사적 저항을 하지 않아 프라하는 보존될 수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냉전의 시대가 반 세기 만에 종료되고, ‘적성국’의 수도로 우리에게 금단의 땅이었던 아름다운 프라하를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나 싶다.


프라하의 말라 스트라나 지구(프라하 성 언덕 아래 지역)에서 카를교 쪽으로 걷다 보면 한 좁은 골목 안쪽에 '존 레넌 월(John Lennon Wall)'이라고 불리는 작은 담장이 하나 있다.

동서 냉전 시대를 살았던 영국 출신 전설적 아티스트 비틀즈의 존 레넌과 공산주의 국가였던 체코의 프라하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존 레넌 월에서는 굴곡진 체코의 현대사가 와 닿는다.

프라하 작은 골목 안에 있는 존 레논 월.


세계대전 후 체코의 역사는 우리나라와 묘하게 닮아 있다. 우리에게 '4.19 혁명'이 있었다면 체코슬로바키아에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민주화 개혁 운동이 있었고, 우리에게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있었다면 이 나라에는 1989년 '벨벳 혁명’이 있었다.

각 역사적 사건은 결과마저 우리와 비슷해서 놀라울 정도인데, 우리가 독재의 그늘에 있었다면 그들은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어두운 터널 안에 있었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이 아닐까.


너무 일렀던 민주화 운동, 프라하의 봄

제2차 세계 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전쟁 이전에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산업이 발달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화 이후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겪게 되고 지속적으로 경제 침체를 겪게 된다.

집권에 성공한 공산당은 정치적 보복을 일삼으며 야당을 탄압하거나 숙청을 일삼았고, 수십만 명이 일자리를 잃는 등 비효율적인 소비에트식 통제로 경제는 갈수록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냉전시대 유럽의 지도. 체코는 바르샤바 동맹의 최전선이었다. (지도 출처 https://www.britannica.com)


1960년대 중반 체코 공산당은 스탈린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체제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공산주의의 맏형인 소련이 이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프라하를 직접 방문하였고, 체코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안토닌 노보트니(Antonín Novotný)를 불신임한다.

러나, 1968년 초 소련의 지지로 신임 공산당 서기장이 된 알렉산데르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는 소련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전보다 더 개혁적이고 개방적인 자유주의를 밀어붙였으니 브레즈네프가 느꼈던 배신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집권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그해 4월, 두브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모토로 개혁 방향을 제시했는데, 이는 다당제를 허용하고, 언론과 출판, 여행과 이동의 자유뿐 아니라 공산당에 대한 비판도 허용하며, 비밀경찰의 권한을 축소하고 서방과의 친선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민주국가로 가는 방향이었다.

중세에 부패했던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후스의 종교 개혁을 이끌었고, 30년 전쟁 도화선에 불을 붙였던 나라로 민주적 전통이 살아있던 체코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스탈린 공산주의를 탈피하여 프라하에 봄이 오는가 싶었다.


안 그래도 이런 개혁 노선 노선이 공산권에 영향을 줄까 봐 심기가 불편했던 브레즈네프는 수 차례에 걸쳐 주변 국가 및 체코슬로바키아와 회담을 벌여 공산주의 노선을 재확인하고 위성국가들의 '반동'적인 움직임을 통제하려고 했다.  

이런 정책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에 기반하는데, 그 내용은 반 공산주의 세력이 소비에트 공산 국가의 체제를 바꾸려 한다면 그것은 해당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산권 전체에 문제가 된다는 것으로, 소련의 공산권 위성국들에 대한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는데 밑받침이 된 정책이었다.


두브체크의 '반동적인' 움직임에 더 이상 말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소련은 그 해 8월, 동독,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등 바르샤바 조약기구 동맹국들과 함께 탱크, 장갑차와 특수부대를 포함한 중무장 병력 20만 명을 동원하여 체코를 침공하였다.

체코에 주둔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와 체코의 시위대 (사진 출처 : https://www.britannica.com)


국경을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산 연합군은 프라하를 중심으로 주요 공항, 도로, 방송국 등 시설을 점거하고 유력 민주화 인사들을 감금, 살해했으며 저항하는 시민들을 짓밟았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침공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려 했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미국이 소련과 유럽을 나누어 지배하려는 의사가 여전함을 확인했던 브레즈네프는 마음 놓고 체코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던 것.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이 명확해지자, 두브체크는 큰 희생을 막고자 국민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소련군에 투항하고 만다.

프라하를 장악한 소련의 전차부대. (사진 출처 : chosun.com)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침략군에 눈물겨운 저항으로 맞섰다. 소련의 탱크에 맨 몸으로 맞서고, 길의 표지판들을 죄다 뽑아 탱크 부대가 헤매게 만들거나 지하 방송국을 만들어 전국에 시시각각으로 상황을 알리는가 하면 침략군에게는 음식 팔기를 거부하는 등 말 그대로 비폭력, 맨손 저항 운동이 프라하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채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이 저항의 10 계명으로 곳곳에 내다 건 표어의 마지막 계명을 읽는 순간, 그들의 절절한 심정이 느껴져 마음이 아렸다.

거리로 나선 체코의 젊은이들 중에는 소련의 무력 침공에 항의하며 분신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 한 달 새 차례로 분신한 얀 팔라흐(Jan Palach)와 얀 자이츠(Jan Zajíc)가 있는데, 그들이 산화했던 자리에는 훗날 민주화 혁명(벨벳 혁명)이 성공한 뒤 그들을 기리는 십자가가 세워졌다.

얀 팔라흐의 분신을 그린 HBO 미니시리즈 "Burning Bush"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한겨레)
소련 침공에 항의하며 분신한 얀 팔라흐(Jan Palach)와 얀 자이츠(Jan Zajíc), 그리고 그들을 기리는 바츨라프 광장의 십자가 조형물 (사진 출처 : 참여 사회)


우리나라도 민주화의 과정 속에 얼마나 많은 청년들의 희생이 있었던가. 4.19의 도화선이 되었던 고등학생 김주열, 80년 광주의 수많은 희생자들,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 이한열... 자유에 대한 인간의 의지는 얼마나 공통적이고 강하길래, 서로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젊은이들 목숨이 이렇게 꺾여야 했는지 모르겠다.


젊은이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두브체크는 강제 해임되어 소련으로 강제 연행되어 끌려갔고, 친 소련 소비에트 공산정권인 구스타우 후사크(Gustáv Husák)가 권력을 잡아 강력한 공산 '정상화' 정책을 펴면서 개혁과 민주화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폴란드 등 위성국의 군대는 철수했지만 소련군은 그 뒤로 체코에 주둔하게 된다. 봄은 너무 일렀고 이를 시샘하는 세력은 너무나 강했다.

그렇게 체코 사람들은 암흑 속에서 다시 20년을 기다려야 했다.


존 레넌 월과 벨벳 혁명(Sametová Revoluce ; Velvet Revolution)

제5 공화국 군사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87년 여름 서울, 당시 중학교에 다니던 나는 건국대와 세종대 사이를 걸어서 등하교했었는데, 대학생들의 엄청난 시위와 전경들이 쏘아댔던 최루탄의 지독한 냄새에 늘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으며 집으로 뛰어오곤 했었다.

6월 항쟁. 어린 나에게는 '박종철을 살려내라'라는 대규모 시위와 TV 속 넥타이 부대 장면으로 남아 있지만, 우리나라가 30년 가까운 군부 독재를 끝내고 민주주의 국가로 한 발자국 더 움직였던 그 해의 여름은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87년 서울, 이한열 범국민장례식. (사진출처 : 한겨레)


한편, ‘프라하의 봄’이 실패로 돌아가고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소련의 공산 위성국가 처지였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시민들이 우리나라보다 더 엄혹한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1960 ~ 70년대 전 세계를 휩쓸었던 비틀즈의 음악은 체코의 젊은이들에게도 많은 위로가 되었나 보다.

비틀즈의 존 레넌이 1980년 뉴욕에서 암살을 당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프라하에서 익명의 아티스트가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존 레넌의 노래 가사와 그의 초상화를 조그만 담장에 그래피티로 그렸는데 그 후로 자유를 열망하는 젊은이들의 그래피티가 담장에 계속 덧칠되었다.


1988년에는 구스타프 후사크(Gustáv Husák) 공산 정권에 대한 저항의 글이 이 담장에 쓰였는데, 이는 개혁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대학생 시위대와 경찰이 크게 충돌하는 계기가 되었다. 체코 정부의 입장에서 문제는 이 담장이 치외 법권 지역인 몰타 대사관의 벽이어서 지우거나 담장을 허물 수 없었고, 몰타 정부는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그냥 두었다고 한다.

프라하 존 레논 월에서 버스킹 중인 이름 모를 아티스트


그 뒤로 이 담장에는 공산 정권에 대한 불만과 저항에 대한 글이나 자유와 평화, 민주화를 지지하고 선동하는 글들이 적히며  민주화 운동의 불씨는 조금씩 횃불이 되어갔다.

서서히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는 불길이 퍼져가던 1989년, 평화적인 대학생 시위를 경찰이 폭력으로 진압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에 저항하는 체코의 국민들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면서 그 해 겨울에는 최대 80만 명이 참여하는 민주화 시위가 프라하를 뒤덮었다.


시대는 이미 베를린 장벽도 무너지는 등 다른 동구권의 국가들도 변화와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공산주의의 실험이 종말을 고하던 때였다. 마침내 후사크와 집권 공산당은 전후 처음으로 비 공산당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주며 물러났고,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에 의해 끌어내려진 후 강제로 은퇴당했던 두브체크가 연방의회 의장으로 복귀하면서 마침내 프라하의 봄이 실현되었다.

비폭력적이며 평화적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이 사건을 두고 체코에서는 '벨벳 혁명'이라고 부른다. 벨벳(Velvet)은 '평화로운'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서 체코의 무혈 혁명을 부르는 말로 굳어졌다.


냉전이나 공산주의를 책에서만 보고 배운 우리 아이들, 비틀즈도 '1960년대의 BTS'라고 설명해야 어느 수준의 아티스트였는지 이해할 정도로 불과 수십 년 전의 과거도 이미 오랜 역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이들도 담장을 걸으며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힘들게 지켜질 수 있는지는 어슴푸레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수십 미터 남짓 되는 작은 담장에 수도 없이 덧칠되어 있는 그래피티며 낙서와 그 앞에서 버스킹 중인 이름 모를 아티스트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민주화만큼 자유와 평화에 대한 치열한 열망이 이 곳에 있었음을 새겼다.


자유와 평화가 이 곳에도 늘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3박 4일에 걸친 프라하 여행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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