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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Nov 13. 2019

대항해시대에 대한 동경, 리스본으로 가자

대항해시대의 중심, 리스본으로 떠나는 가족여행 #1

'우리 리스본에 가자'

'응? 거기가 어딘데? 왜 리스본에 가자는 거죠?’

유럽에 온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던 어느 봄날, 아이들의 중간 방학을 맞아 나는 대뜸 리스본행을 주장했다. 로마도 있고 파리도 있는데 왜 리스본부터 가자고 하는지 아이들이 되물었다.

'그냥... 아빠가 가보고 싶어서'

'에잉? 아빠 마음대로 정하고 우리는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건가요?’


어릴 때, 나는 아버지를 조르고 졸라 산 아카데미 '프라모델(Plastic Model)' 범선을 만들고 해적에 대한 책을 읽으며 대항해시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었다. 시골에서 자랐던 나에게 대양을 항해하고 세계를 탐험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일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마음은 여전했고, 큰 바다를 누비는 범선과 해적이 등장하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이다.

가슴 깊은 곳에 묻혀있었던 내 어린 시절의 낭만을 아이들에게 모두 이해시킬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냥 아빠가 가보고 싶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커티 삭 프라 모델의 박스 그림만 봐도 즐거웠던 어린 시절이었다. (사진 출처 : 인터넷 쇼핑몰)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배, 블랙 펄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유럽의 서쪽 끝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14세기까지만 해도 해상 무역의 중심인 지중해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고, 척박한 토지에서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는 변방 중의 변방이었다. 스페인과 프랑스 등에 막혀 지중해나 중부 유럽으로 진출할 수 없었던 포르투갈이 갈 수 있는 방향은 대서양과 아프리카 뿐이었는데, 궁즉통(窮則通)이란 여기에 해당되는 말인가 보다.

당시는 지중해 해상 패권을 쥐고 있던 베네치아가 인도와 통하는 이슬람과의 무역로를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추와 같은 동방의 향신료는 유럽에서 최고가의 사치품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유럽에 적대적인 오스만 제국(오늘날의 터키)이 강력하게 부상하여 무역로를 차단하면서 향신료를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몰랐으면 모를까, 이미 유럽인들은 향신료의 신비로운 맛과 일확천금의 기회 그리고 동방에 대한 환상에 빠져버린 뒤였다.

'이슬람을 통하지 않고 빙 돌아서 인도로 가면 향신료를 싸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퍼졌고, 이것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선두로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The age of discovery)가 시작된 큰 원인 중 하나였다.


포르투갈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항해왕'이라 불렸던 엔히크 왕자(Infante Dom Henrique, o Navegador)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서아프리카 연안을 탐사하고 황금과 흑인 노예를 들여오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해 눈을 떠 가고 있던 참이었다.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서 인도까지 항로를 개척하려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달리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빙 돌아 동쪽으로 가는 루트를 개척했고, 1498년에 드디어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에 도착하면서 베네치아와 이슬람으로 이어지던 무역의 독점 루트가 깨지게 된다.

포르투갈을 해상 제국으로 이끈 선구자, 엔히크 왕자(좌)와 유럽과 인도의 직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우; 사진 출처는 위키피디아)


이후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경쟁하며 아프리카와 동남아, 브라질 등으로 신항로와 식민지를 개척하는 대항해시대를 이끌었다. 그리고 여기 자극받은 영국과 네덜란드 등이 뛰어들면서 유럽인이 지구 위 대부분 땅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많은 민족들을 힘으로 제압하며 착취했던 제국주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리스본은 해상 제국으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포르투갈의 출발지였고 중심지였다. 대항해시대의 심장부에 가보고 싶다는 이유가 가장 크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접근성이 떨어져 쉽게 가볼 엄두가 안 났던 도시였기 때문에 유럽에 오자마자 방문지로 낙점했던 것.

더구나 포르투갈에는 별다른 IT 산업이 없어 서유럽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비즈니스 출장으로도 가볼 기회를 만들기 어려운 곳이었다.


리스본 구시가 숙소까지 가는 험난한 여정

런던에서 2시간 반 남짓 비행기를 탔을까, 우리는 이내 리스본 공항에 내렸다. 유럽의 다른 대도시와는 달리 공항은 매우 한적한 시골 느낌을 주었다.

공항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는데, 운행한 지 20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택시 운전대 앞에 머리가 희끗한 60대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영어는 전혀 통하지 않는 기사에게 얼른 구글 지도를 열어 리스본의 구시가지 알파마(Alfama) 지구 안쪽의 골목에 잡아둔 에어 비앤비 숙소의 주소를 보여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택시기사는 호기롭게 출발했고, 창 밖으로는 따뜻한 햇살 아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남쪽에 위치한 리스본은 봄인데도 햇살이 생각보다 따가웠다.

'역시 남유럽 여행은 봄이나 늦가을이 제격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눈 앞에 판자촌 같은 알파마 구시가가 나타났다. 알파마 지구는 250여 년 전 리스본을 폐허로 만들었던 대지진 때도 건재했던 지역으로, 옛날 서민들의 거주지 모습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지역이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은 재개발하지 않았을 것 같은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난 편도 1차선의 좁디좁은 언덕길을 택시 기사는 마치 자기 집 안방인 양 이리저리 핸들을 꺾어가며 지나갔다. 그는 이따금 속도를 줄여 가며 골목 벽 위에 쓰인 작은 도로 주소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운전기사가 자꾸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었다. 두어 번 가량 주소를 보여달라고 하던 기사가 주소지 근처로 생각되는 어느 골목길 한쪽에 차를 세우더니 다짜고짜 내리라고 했다. 내가 여기가 맞느냐고 물었지만 영어는 통하지 않았고, 그는 연신 '어딘지 모르겠다'며 짜증을 냈다.

자기가 먼저 문을 열고 내린 기사는 차 뒷트렁크 안에 있던 우리 짐들을 모조리 길 옆에 꺼내 놓은 후, 뒷좌석에 앉아 있던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막무가내로 내리라고 소리치고는 돈을 달라고 하더니 휭- 하고 가버렸다.


먼지가 휘날리는 좁은 판자촌의 언덕길 같은 곳에 잠시 동안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영문을 모르던 아내와 아이들도 사태를 파악하더니 이럴 수가 있느냐며 짐을 추스르며 흥분을 했다.

여행 전에 '제발 숙소는 제대로 된 곳에 잡자'라고 신신당부하던 아내에게 걱정 말라고 큰 소리를 쳐 두었는데 이만저만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호텔이 있어야할 주소지 골목. 여간 당황스러운 곳이 아니다.


정신을 차린 나는 숙소 주인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 설명을 했다.

여주인은 금방 도착한다며 우리가 기다려야 할 위치를 다시 알려주었다. 나는 가족들을 달래며 좁고 울퉁불퉁한 골목길을 따라 짐을 끌고 5분가량을 더 들어갔다. 주소는 분명히 맞는데 호텔처럼 보이는 건물은 찾을 수가 없었고, 주위는 온통 오래된 주거지 동네여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


'주인이 여기가 맞데. 오고 있다고 하니 우리 저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 먹으며 기다리자.'

불안하고 짜증이 깃든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내가 조심스럽게 권했다. 햇빛이 따갑고 날이 더웠지만 당장 기다리는 것 말고 할 게 없었다.

아내는 뭐 이런 이상한 동네에 숙소를 잡았느냐며, 딸은 호텔도 아니고 여인숙을 잡은 거 아니냐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에 정신이 팔려 아무 말도 안 한 아들에게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즐겨야 한다는 나는 오히려 현지 동네의 푸근한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가 아내로부터 ‘당신이 어려서 살던 시골 동네 같아서 그런 거냐?'라는 핀잔을 한번 더 들어야 했다.

골목 안 구멍가게에 앉아 하염없이 숙소 주인을 기다렸다.


인터넷으로 예약할 때 봤던 숙소의 내부 모습은 5성급 수준으로 깔끔해 보였고, 이용자들의 후기 평점도 매우 높았기 때문에 어쨌거나 조금 이상하긴 했다. 잠시 후, 선한 인상의 리스본 아가씨가 골목길에서 웃으며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주인장에게 설명을 듣고서야 이 상황의 수수께끼가 풀렸는데, 알고 보니 숙소의 주소지가 예약 사이트에 이상하게 등록되어 있었던 것.  손님마다 비슷한 일을 겪었는지 주인장은 자기도 구글 지도에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며 갸웃거리면서 옆 골목의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베네치아나 그라나다, 세비야나 리스본 같은 수백 년 된 도시들은 좁은 골목길의 주소 체계가 구글 지도의 GPS와 연동이 제대로 안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남유럽과 동유럽을 다닐 때는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핸드폰에 의존하여 쉽고 빠르고 효율적으로만 하려던 마음을 잠시 버리고 종이 지도를 보며 이리저리 헤매는 여행을 할 때, 고도(古都)의 골목길을 구석구석 더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있다. 오히려 이럴 때 나는 옛날 배낭여행 때의 감성이 살아나 인간미를 느낀다.


리스본의 유명한 28번 트램길 바로 옆에 위치한 우리 숙소는 겉에서는 허름해 보였지만 내부 시설은 5성급 호텔 뺨치는 수준으로 깔끔했다. 무엇보다 창 밖으로 테주 강을 내려다보는 뷰가 환상적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와! 좋다!'라고 환호성을 지른 아이들은 저마다 소파로, 침대로, 창가로 달려갔고, 10분 전만 해도 폭동이 일어날 것 같았던 분위기는 어느새 180도 바뀌어 나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나도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숙소 내부.
숙소 창 밖으로 보이는 리스본의 풍경
숙소의 현관에서 서서 본 28번 트램길.


세뇨라 두 몬테 전망대 (Miradouro da Senhora do Monte)

숙소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방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첫날 별다른 일정을 잡아두지 않았던 나는 석양이 아름답다고 알려진 세뇨라 두 몬테 전망대 아래 레스토랑에 저녁 식사만 예약해 두었다.

숙소에서 세뇨라 두 몬테 전망대까지는 걸어서 20분 남짓한 거리여서, 저녁 식사 전에 리스본의 전망을 둘러보고 석양을 보며 저녁을 먹으면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았다.


한 가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는 리스본 '구시가지'는 계단과 언덕이 반복되는 좁은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어, 태양이 따가운 시간에 걸어 다니기에는 난이도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우리가 가는 곳은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라는 것. 봄이라고는 해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 가까운 남쪽 나라이다.

흔한 리스본 구시가의 골목길 계단


오랜 역사가 느껴지는 구시가의 골목길은 생각보다 한적했다.

길을 따라 이어진 건물들은 낡을 대로 낡았지만 원색으로 칠해진 곳이 많았고, 작은 발코니들이 골목길을 따라 튀어나와 있었다. 보도블록은 지중해 스타일의 작은 타일로 장식된 곳이 많았고, 건물의 벽들도 옛 이슬람 스타일의 기하학적 문양의 타일로 장식된 곳도 많아 도시는 마치 오래전에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다만, 구시가를 걸으면서 자꾸 신경이 쓰였던 점은 곳곳에서 보이는 반려 동물들의 배설물이었는데, 유럽의 그 어떤 도시보다 배설물이 길에 많았다. 처음에는 기겁을 하다가도 하도 많아서 나중에는 둔감해지긴 했는데, 어차피 비가 오면 언덕 아래로 씻겨 내려가니 사람들이 치우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리스본 구시가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에서.

 

숙소에서 약 20분가량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더니, 나지막한 언덕 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세뇨라 두 몬테 전망대였다. 전망대에 서니 왼쪽에 산 호르헤 성과 그 너머 바다와 같은 테주 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자신들은 대양(Ocean)을 바라보고 있어 작은 바다(Sea; 지중해를 의미)는 모른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데, 재미있게도 리스본은 대서양에 면한 도시가 아니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가르고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테주 강변에 있는 도시이다.

서북쪽으로 뻗어있는 리스본에는 10여 개 이상의 언덕이 있어 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 시내 전망을 감상해 볼 수 있는 언덕이 많다. 둘째 날도 우리는 한두 개 언덕에 더 올라가 보았다.


전망대 오른쪽의 대서양 방향을 바라보니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 브리지를 연상케 하는 현수교가 보였다. '4월 25일 다리'라는 특이한 이름의 이 현수교는 리스본과 건너편 알마다 지역을 잇는다.

4월 25일이란 1974년에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무혈 혁명(카네이션 혁명)을 의미하는데, 이 혁명으로 40년 이상 지속된 포르투갈의 독재 정권이 막을 내렸고 포르투갈은 해외의 모든 식민지를 포기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제국주의의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세뇨라 두 몬테 전망대에서 늦은 오후에 남서쪽을 바라본 모습.
세뇨라 두 몬테 전망대에서 늦은 오후에 남동쪽을 바라본 모습


석양이 아름다운 전망대라고 했지만 봄날의 리스본은 해가 무척 길다. 30분가량 머물렀지만 해는 여전히 중천에 떠 있었고, 석양까지 두어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아내도 아이들도 어느 누구도 그걸 기다릴 인내심은 없었다.


'이럴 줄 알고 아빠가 전망 좋은 곳에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지!'

나는 시원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자면서 의기양양하게 가족들을 이끌고 전망대 바로 아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숙소에 도착해 급하게 전화를 해서 마지막 한 자리를 겨우 예약했던 터라 석양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지는 못했지만, 산 호르헤 성과 테주 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저렴하고 근사한 저녁으로 낯선 곳에서의 피로를 풀었다.

음식은 수수했지만 해산물과 육류 등 재료가 신선했고 소스의 간도 괜찮았다. 맛없는 음식으로 유명한 영국 살이 일 년 만에 비로소 식도락을 즐길만한 남유럽에 온 것이 실감 났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걸어오는 길에는 상쾌한 밤바람이 불었다. 길거리 개똥은 여전했지만.

웃음기가 모두 돌아온 가족들
대구를 얹은 리조또와 수수한 햄버거.
레스토랑에서 본 리스본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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