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의 중심, 리스본으로 떠나는 가족여행 #2
어제만 해도 흐리고 어둡고 비 오던 런던에 있었는데, 창 밖에서 들어오는 햇살과 봄바람 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리는 리스본의 둘째 날이 밝았다. 햇빛도 좋으니 아침은 숙소 근처의 아무 카페라도 가서 해결하자며 길을 나섰다.
리스본 구시가 알파마(Alfama) 지구의 골목길에는 트램 외에 차가 다니지 않는다. 사람 몇 명이 나란히 서기도 어려운 좁은 골목이 많고, 트램 레일이 골목길 구석구석 놓여 있어 차를 몰고 잘못 들어섰다가는 오도 가도 못하고 낭패를 보기 쉬워 보였다.
한가로운 골목길 언덕을 올랐더니 상 조르제 성(Castelo de S. Jorge)이 보이는 삼거리에 야외 테이블이 놓인 조그만 카페가 보였다. 가게 앞에는 보라색 꽃이 화사한 나무 한 그루가 노랗고 빨간 벽을 배경으로 서서 발길을 잡아당겼다.
수수한 주인 아주머니가 내어준 갓 구운 빵은 구수한 커피 향과 어우러져, 내가 낯선 여행자가 아니라 마치 오래전부터 여기서 어울려 살고 있는 것 같은 포근함을 안겨 주었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 한잔을 놓고 신문을 읽거나 햇빛을 쬐는 사람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이따금 오래된 트램이 카페 앞 정거장에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느릿느릿 간다.
아침식사 후 행선지로 잡은 벨렝 지구(Belém)는 대항해시대를 주름잡았던 포르투갈의 영웅 엔히크 왕자와 바스쿠 다 가마에 관한 역사 유산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리스본 구시가에서 서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다. (왜 리스본에 가는데요?)
벨렝은 알파마 구시가 언덕을 내려가 광장에서 메트로를 타고 리스본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우리는 여유 있게 둘러보자며 트램길을 따라 걸었다. 이따금 한 량짜리 작고 귀여운 트램이 '딸랑' 종을 치며 우리 옆을 지나갔다.
알파마 구시가지는 1755년,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도시의 85%를 파괴했던 리스본 대지진 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아 옛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지역이다. 오늘날 리히터 기준으로 진도 8.5에서 9로 추정되는 최악의 대지진이 리스본을 강타하여 도시는 대부분 지역이 불에 타거나 쓰나미에 쓸려가는 등 한 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고 한다.
18세기 후반이면 이미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였는데, 대지진이 결정타를 날려버린 셈이 되었다.
당시 홍등가가 있고 하층민들이 살던 알파마 지역은 별 피해가 없던 반면 고위층과 중산층 이상이 살던 도시 대부분의 지역과 수많은 성당들이 무너져 내림으로써, ’대지진은 하느님의 천벌’이라고 강변했던 성직자들이 할 말을 잃었고 독실한 기독교 국가인 포르투갈에서 신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벨렝 지구는 대서양의 입구이자 테주 강 삼각지 끝부분에 위치한 곳으로 대항해시대 당시 포르투갈 선단의 출발지였다.
리스본 대지진으로 찬란한 영화를 자랑했던 도시는 대부분 폐허가 되고 불타서 없어졌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지역도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수도원과 벨렝 탑 등의 유적이 옛 포르투갈의 영광을 현세에 전해주고 있다.
후기 고딕 시대에 지어진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고딕 양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세밀한 장식을 뽐내고 있어 이를 마누엘(Manuel) 양식으로 따로 구분하는데, 해상 탐험과 관련된 여러 가지 주제와 물건들을 형상화하여 흰색 석회암에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한 포르투갈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수도원은 1498년 인도 직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를 기리기 위하여 국왕 마누엘 1세의 지시로 착공했으며 100년에 걸쳐 지었다.
엔히크 왕자 이래 유럽의 변방이 아닌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는 국가의 염원이 실현되었다는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실제로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는 기존의 세계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었고, 포르투갈은 이후 제국주의 시대에서도 세계 최강대국의 대열에 서게 되지 않았던가.
돌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마치 하얀 레이스를 떠 놓은 것 같은 장식이며 상아를 세밀하게 조각한 것 같은 첨탑과 동상들을 보고 있자니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벨렝 탑과 함께 1983년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리스본 항구 입구에 서 있는 제로니무스(이에로니미테스, Hieronymites) 수도원은 포르투갈 예술의 백미로 꼽히는 건축물로서 1502년에 건설되었다. 수도원 부근에 있는 벨렝(Belém) 탑은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의 원정을 기리는 기념탑이며, 현대 항로 발전에 기여한 위대한 발견을 기념하는 건축물이다. (출처 :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
마침 이 날은 부활절 당일 오전.
가톨릭 신자인 아내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기 위해 나와 아이들만 밖에 두고 성당으로 들어갔다. 날도 이미 매우 더워서 나도 같이 들어가려고 했으나 아이들 특히, 둘째가 완강히 반대하여 입장을 하려다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종교 행사로 사람이 많이 몰리기도 했고, 일반인의 관람 시간이 제한적인 데다 따가운 햇살에 아이들이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없어 수도원을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없었던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특히, 화려함의 극치로 알려진 수도원 안쪽으로는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아이들이 크고 나면 꼭 다시 와서 둘러보리라 다짐했다.
아쉬움은 다음에 또 와야 할 핑계로 두는 법이다.
한편, 수도원의 주 성당 안에는 포르투갈 영웅의 묘가 안치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바스쿠 다 가마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만큼 그의 석관 묘가 눈에 띄는 가운데, 다른 쪽에는 포르투갈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국보 시인 루이스 데 카몽이스(Luís de Camões)의 석관 묘가 있다. 카몽이스는 대항해시대를 노래했던 시인이었으니, 그야말로 바스쿠 다 가마와 어울려 보인다.
각각의 석관들은 마누엘 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탐험가인 바스쿠 다 가마의 묘는 범선이 새겨져 있고 카몽이스의 관에는 펜과 악기, 책이 새겨져 있어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근처에는 에그타르트(포르투갈어로 나따; Nata)의 원조로 유명한 '빠스떼이스 드 벨렝(Pasteis de Belem)'이라는 빵집이 있다. 이 집은 1837년부터 5대에 걸쳐 지금까지 에그타르트 한 길만 걸었다는 장인의 빵집이다. 더운 날씨에 수도원에서 기다리고 걷느라 지친 아이들에게 '반드시 먹어야 할' 포르투갈의 디저트라고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고 손을 잡아 이끌었다.
원래 에그타르트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이 원조였지만 이 빵집이 비법을 전수받았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매년 수도원에 기부를 한다고 한다.
매장 안은 넓고 테이블도 많았지만 부활절 주말인지라 안쪽의 홀은 만원이었고, 빵집 앞에는 따가운 햇빛에도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족히 50미터는 넘어 보였다. 기겁을 하는 아이들을 옆 스타벅스의 빈자리에 잠시 앉혀두고, 20여 분 가량 줄을 서 기다린 끝에 나따를 포장해 살 수 있었다.
계란 노른자와 생크림, 바닐라향이 진하게 어우러진 파이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나따는 커피와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예전에 마카오에서도 에그타르트에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원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다만, 비수기에 여유롭게 앉아 즐기는 게 더 나을 듯하다.
벨렝 지구 테주 강변에는 아프리카 방향을 바라보는 거대한 탑이 하나 서 있다. 이 탑은 포르투갈과 유럽을 대항해시대로 이끌었던 선구자, 항해왕 엔히크 왕자(Infante Dom Henrique, o Navegador)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60년에 세워진 발견 기념탑으로, 포르투갈이 발명한 캐라벨(Caravel) 범선 모양을 형상화했다.
탑의 조각 군상을 보면 엔히크 왕자가 제일 앞에서 범선을 앞세워 미지의 세계로 군중들을 이끌고 있고 그 뒤로 탐험가, 기사, 과학자, 선교사 등이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조각상들의 표정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 기대를 느낄 수 있다. 탑은 제로니무스 수도원 방향에서 보면 거대한 칼이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3개 면의 보는 방향마다 디자인이 다르다.
엔히크 왕자는 포르투갈 아비스 왕조 주앙 1세(João I)의 아들로, 15세기 초에 지브롤터 해협 건너 아프리카 모로코의 세우타 점령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그의 위대한 여정을 시작했다. 세우타를 확보하여 이슬람 상인을 통하지 않고 동방의 향신료와 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 그는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아프리카 탐험과 신항로 개척을 지원하게 된다.
엔히크 왕자가 탐험대에 대한 막대한 지원과 부를 약속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아프리카 탐험에 도전했으며, 15세기 중반에 포르투갈은 사하라 남단의 시에라리온까지 진출하여 식민지 건설을 하게 되었다.
왕자가 뿌린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그의 사후 28년 만에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도달하였고, 1497년에는 드디어 바스쿠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함으로써 포르투갈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발견 기념탑 주위는 넓고 강바람은 시원했다. 탑의 뒤쪽으로는 리스본과 알마다를 연결하는 4월 25일 다리가 강을 가로지르고 있고, 탑 앞으로 테주강을 따라 닦아놓은 산책로를 걷는 기분은 상쾌했다.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별다른 감흥 없이 외우기만 했던 포르투갈 시대의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니 남다른 기분이 들었다.
발견 기념탑을 등지고 대서양 방향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강변을 걸었다.
10분 남짓 걷다 보니 크고 요트들이 정박한 마리나를 지나 뒤로 벨렝 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탑은 제로니무스 수도원처럼 '포르투갈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대항해시대에 마누엘 1세의 지시로 지어졌는데, 수도 리스본의 하구에서 배의 출입을 관리하고 적을 감시하던 요새이자 출항 기념식을 하던 게이트웨이 역할을 했다.
애초에 탑은 테주 강의 북쪽 강둑에서 가까운 강 위 작은 섬에 지어졌는데,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강북지역이 점점 강 쪽으로 확장되면서 현재는 땅과 거의 붙어 있는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처음 보면 강변의 탑에서 대항해 선단이 출발했다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16세기만 해도 이 지점이 강의 한가운데였던 셈이다.
탑은 해안선 방어를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16세기 말과 19세기에도 증개축이 이루어졌는데, 탑에 건물이 확장되면서 세관과 던전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 특히, 아래층의 감옥에는 스페인 지배 당시 저항군과 19세기 미구엘 1세 집권 당시 자유주의자 등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물이 들어오고 나갈 때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했다고 전해진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앞바다 위의 악명 높은 알카트레즈 감옥이 생각나는 탑이다.
요새 아랫부분은 북아프리카 무어 스타일의 감시탑(Watch Tower)이 네 귀퉁이를 지키고 있고 아래 포대에는 17문의 대포가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다. 탑 윗부분에는 마누엘 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발코니 창문이 눈에 띈다.
내부는 하루에 150명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며, 관람시간도 매우 제한적이다. 기다리는데 익숙지 않은 아이들 덕에 내부에 가볼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이 날은 관람이 제한되어 있는지 진입로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벨렝 탑은 16 - 17세기 전 세계를 주름잡았던 포르투갈 카라벨 선단의 기항지였다. 사람들은 저 탑에서 먼바다로 나가는 선원들의 무사 안녕을 빌었을 것이고, 엄청난 금은보화와 향신료, 노예들을 끌고 돌아온 탐험가들을 환영했을 것이다.
화려한 탑만큼 영광스러웠을 포르투갈의 르네상스 시대가 또 올 수 있을까?
그런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그저 벨렝 탑 아래로 밀려드는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