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낭만의 독일 로만틱 가도로 떠나는 가족여행 #2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기대하면서 로만틱 가도 여행 2일 차에 담아둔 일정은 로텐부르크를 거쳐 딩켈스뷜까지 돌아보는 것이지만, 전날 강행군으로 다리가 아프다는 청소년 고객님들을 모시고 두 도시를 모두 다닐 수 있을지 적잖이 걱정이 되는 아침이 밝았다.
뷔르츠부르크(Würzburg)의 낡은 호텔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모두가 정신을 차린 시간은 느지막한 오전 9시경이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방의 시설에는 상당히 실망했지만 엔틱한 분위기의 식당에서 제공하는 10유로짜리 아침식사는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아이들도 맛있다며 두어 번 씩 가져다 먹었고, 아내도 요거트를 두 접시나 비웠다. 호텔과 제휴한 옆 건물 주차장의 주차료도 24시간에 8유로라는 훌륭한 조건이어서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근처 DM(마트)에 가서 몇 가지 필요한 물건을 사는 등 여행의 모든 준비를 마치고 차에 올랐더니 어느새 시간이 오전 11시를 넘기고 있어 약간 마음이 급해졌다. 아침에 너무 여유를 부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목적지 로텐부르크의 정식 명칭은 로텐부르크 옵 데 타우버(Rothenburg ob der Tauber) 즉, '타우버 강 위의 붉은 요새’라는 뜻이다. 뷔르츠부르크에서 남쪽으로 약 6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인구 1만 명의 이 작은 도시는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동명(同名)의 도시들이 있어서 내비게이션으로 길을 잡을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로텐부르크는 중세 유럽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 제국 도시(Free Imperial City) 중 하나였다.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자유 도시라니, 생소함을 넘어 호기심이 인다.
강성했던 프랑크 왕국을 다져 '유럽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를루스 대제(Charlemagne)가 세상을 떠난 후 왕국은 서기 843년에 세 개로 쪼개졌다. 그중 오늘날 독일의 기반이 된 동프랑크 왕국은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등을 아우르는 중부 유럽에 자리를 잡았다.
서기 962년,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가 교황령을 침략한 이탈리아 왕국을 정벌한 공로로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인정을 받아 '로마인의 왕'이 되었는데, 학자들은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약 200년 후이다.)
제국의 가장 큰 특징은 통일 국가가 아니라 게르만 민족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제후국들의 연합체라는 것으로 이는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과 같은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와는 확연히 달랐다.(후작, 공작, 백작, 성직 제후 등 수많은 귀족들과 영주들이 통치하는 영토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12세기경에 최대 판도에 다다랐던 제국은 17세기 종교개혁과 30년 전쟁 이후 각 나라들의 독립성이 커져 더욱 느슨한 연합체로 변했다가 1806년에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는 운명을 맞는다.
제국의 황제는 12세기까지 로마 교황으로부터 대관(戴冠)했던 전통이 있었으나, 13세기 이후로는 독일계 선제후(選帝侯)들에 의해 선출되는 형태로 변했고, 나라의 중요한 일들은 제국의회(Imperial Diet)를 통해 논의되었다. 따라서 황제는 권위는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명예직에 가까웠고, 제국은 수백 개의 제후국들과 황제 직할령 등으로 분권화된 체제였다.
로텐부르크와 같은 자유 제국 도시들은 복잡한 제국 안에서 영주나 제후들에게 종속되지 않고 황제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던 도시 국가들의 집단이었다. 17세기경에 그 수가 약 50여 개 정도로 유지되었던 이 도시 집단은 다른 제후국들에 비해 힘이 약해 중세 후기나 되어서야 제국의회에 대표를 보낼 수 있었는데, 이 마저도 도시마다 대표를 보냈던 것이 아니라 크게 서부의 라인(Rhine) 그룹과 남부의 슈바벤(Schwaben) 그룹으로 나뉘어 대표자를 파견했다고 한다.
라인 그룹에 포함된 대표 도시들은 대도시로 발달한 쾰른,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도르트문트 등이었던 반면, 슈바벤 그룹의 도시들은 아우크스부르크나 뉘른베르크와 같이 대부분 중소 도시로 남아 있다.
로만틱 가도는 슈바벤 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첫날 여행했던 뷔르츠부르크가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의 폭격으로 도시의 90%가 파괴되는 큰 피해를 입었던 데 비해 거기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로텐부르크는 동북쪽 일부를 제외하고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2차 대전 때 미국의 전쟁부 차관은 존 맥클로이(John McCloy)였다. 로텐부르크의 역사적 가치를 이해했던 맥클로이는 당시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던 미군에게 포격을 피하라고 지시했다. 미군은 병사들을 뽑아 적진으로 보내 항복을 권유했고, 히틀러로부터 끝까지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은 독일군도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미군에 투항함으로써 로텐부르크는 전쟁의 포화로부터 지켜질 수 있었다.
어차피 승패가 결론난 전쟁에서 양쪽의 현명한 선택으로 인류의 유산뿐 아니라 수많은 생명도 살렸으니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맥클로이는 전쟁 후에 로텐부르크의 명예 시민증을 받았다고 한다.
뷔르츠부르크를 출발한 지 1시간쯤 지났을까, 차 앞에 높은 성벽 위로 우뚝 솟은 방어탑이 나타나 색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탑 아래로 뚫린 길을 따라 들어간 로텐부르크는 짙은 오렌지색 지붕의 집들이 여기저기 창가 베란다에 꽃단장을 하고 손님을 반기고 있었다.
'우와, 진짜 예쁘다!'
'이런 도시가 있었어?!'
우리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창 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만큼 엽서 사진에서나 봄직한 아기자기한 풍경이 기대 이상의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40여 개에 이르는 탑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로텐부르크는 사실 그 독특함과 아름다움 덕분에 중세 후기에 이미 "프랑코니아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나는 도시의 중심부터 시작해 외곽 성벽으로 걸어 나올 생각에 중심부 광장(Kapellenplatz)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하늘마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펼쳐져 있어 주황빛 도시의 색채는 더욱 두드러졌다. 주차장 옆으로 이어진 골목길을 나오자마자 바로 앞에 높은 탑이 보였고 그 아래는 자갈로 포장된 길이 관통하고 있었다.
바이서 탑(Weißer Turm; 백색의 탑)이라 불리는 이 탑은 도시의 중심을 지키는 2차 방어탑으로서, 여기서 직선으로 난 길은 300미터 앞의 1차 방어탑인 갈겐 게이트(Galgentor)를 지나 도시 밖으로 이어진다.
바이서 탑과 갈겐 게이트를 잇는 길 양쪽으로 독일 전통의 반 목조 가옥들이 베란다마다 화려한 화분으로 장식하고 늘어서 있어 마치 내가 동화 속 마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바이서 탑 바로 아래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본 아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야외 테이블에 놓인 오렌지 색 화분 속의 빨간 꽃은 우리 보고 앉으라고 손짓했다. 누군들 이런 유혹을 참을 수 있겠는가? 시원한 그늘 아래 앉아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으니 어린 시절 놀이동산에 간 것 마냥 들뜨는 기분에 골목길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마저 싱그럽다.
바이서 탑을 뒤로하고 동쪽의 갈겐 게이트 방향으로 걸었다. 타우버 강을 끼고 있어 방어가 상대적으로 용이했을 서쪽과 달리 평야 지대로 뚫려있는 동쪽은 둥글게 반원형의 성벽이 감싸고 있다. 사실 2차 대전 당시 피해를 본 부분이 도시의 동북쪽이어서 갈겐 게이트 주변의 성벽은 대부분 전후에 복구된 것이다.
갈겐 게이트(Galgentor; Gallow Gate)는 도시의 방어탑이자 7개 성문 중 하나이다. 양쪽으로 높은 성벽과 연결된 이 탑은 마치 어느 누구도 허락 없이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듯 위풍당당하다. 탑의 이름이 '교수대로 가는 문'이라 조금 살벌한데, 시 외곽에 있는 교수대로 죄수들을 이동시키는 데 사용된 데서 유래한다고. 조선 시대에 서울에서 시체들을 실어 날랐다는 '시구문(屍口門)'이 생각난다.
탑 가까이 가서 양쪽으로 이어진 성벽을 올려다보니 그 높이가 족히 건물의 3층 높이는 되는 것 같았다. 주변이 평야지대이므로 웬만큼 높고 튼튼한 성벽이 아니라면 전투에서 지키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로텐부르크의 성벽을 보니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같이 걸었던 수원의 화성(華城)이 떠올랐다.
‘우리 성벽 위로 올라가 보자'라고 말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아들은 이미 계단 위를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가꾸어진 로텐부르크의 중심부도 아름다웠지만 외곽을 둘러싼 옛 성벽 위의 길을 따라 걸으며 도시를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다는 점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유명한 관광지라 그런지 성벽 아래 깨끗하게 정비된 모습이 약간은 인위적으로 보였으나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벽 길을 걷노라면 느릿느릿 변하는 성 안의 풍경과 함께 개와 산책하는 사람이며 길에 서서 수다를 떠는 노파들의 모습까지 모두 정겹게 보인다. 시간마저 멈춘 곳이다.
전체가 목조 지붕으로 덮인 성벽길은 두 사람이 마주치면 몸을 돌려 지나가야 할 만큼 좁았지만 성 바깥을 향해 뚫린 구멍들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마침 햇살도 따가워진 시간대여서 가능한 한 오래 성벽길 위에 머무르고 싶을 정도였다.
수십 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탑을 통해 연결되어 있는 성벽은 무척이나 견고해 보였다. 바깥쪽으로는 돌담으로 막혀있고 안쪽으로는 나무 난간으로 이어진 성벽 위를 걸으니 미드 '왕좌의 게임’ 속 장벽(The Wall) 위를 걸어가는 착각마저 든다.
성벽길을 따라 걷다 보면 중간중간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긴 벽돌을 볼 수 있다. 로텐부르크는 2차 대전 후 파괴된 성벽을 복원하면서 각지에서 기부를 받았는데 그때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을 벽에 새겨둔 것이다. 전쟁에서 패한 후 독일인들은 폐허가 된 주요 도시들을 눈물겨운 노력으로 복구했다. 전쟁 시 남자들이 많이 죽어 복구 작업에는 여성들의 힘이 컸다고 한다.
전후 20여 년만에 다시 일어난 서독을 두고 '라인 강의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나. 물론, 동서독이 다시 하나가 되기까지는 반세기가 걸렸고 통일 독일이 진정한 강대국으로 통합되기까지는 거기서 수십 년이 더 걸렸다. 독일을 다니다 보면 이따금 '한반도는 언제쯤 다시 한 나라가 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젊을 때는 막연히 언젠간 통일이 될 거라고 믿었는데, 지금은 내 생에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우리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통일은 더욱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어가는 듯 아득하다.
갈겐 게이트에서 성벽길을 따라 약 400미터가량 걷다 보니 성벽과 연결된 또 다른 탑이 나타났다. 로텐부르크 성벽의 탑 중에서 유일하게 전망대 위로 올라가 도시를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뢰더 탑(Röderturm)이다.
12세기에 건설된 이 탑은 도시가 확장되면서 새롭게 방어 라인으로 건설된 탑이며 2차 대전 때 상단의 지붕 부위가 파괴되어 복구되었다고 한다. 아직 아이들에게는 아이스크림으로 충전된 에너지가 있어 다 같이 탑 꼭대기의 전망대로 올라가 보았다.
성벽길로 올라 걸을 때만 해도 즐거워했던 아이들은 뢰더 탑 꼭대기까지 도전한 후 체력이 급 방전되었는지 약속과 다르다며 빗발치듯 항의를 했다. 전망대처럼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들인데, 내가 전망대까지 얼마나 높은지 말하지 않은 채 성벽길과 연결된 계단 몇 개만 올라가 보면 된다고 꼬드겼기 때문에 아이들이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뢰더 탑 꼭대기에서 바라본 로텐부르크의 환상적인 풍경은 아이들의 모든 불평, 불만을 잠재워 주었다. 도시 안쪽으로는 멀리 지평선에 닿은 초록 들판과 어우러진 주황색 삼각형 지붕의 물결이 인상적이었던 데다, 아래 길게 이어진 성벽과 뾰족한 탑들은 마치 우리가 중세의 성 위에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전망대의 창문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올라오느라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마저 풍경 속에 날려 버렸다. 프라하나 피렌체보다 아름다운 마을 풍경에 아이들은 모두 말을 잊은 채 연신 카메라 셔터만 눌러댔다.
한편, 뢰더 탑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약간 독특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다른 곳과 달리 성벽 밖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 건물 한 채가 올려져 있고 길 양쪽으로는 방호벽이 덧대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건물은 도시의 중요한 길목인 뢰더 탑의 방어를 보강해 주는 역할을 했다.
뢰더 탑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 라인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탑으로 늘 보초가 상주하며 매일 밤낮으로 성 밖의 상황을 시내 중심부로 보고했다고 한다. 탑의 아래층에는 보초들의 숙소도 있었는데 그 바깥쪽에 보조 성벽과 아치 문을 2개 더 두어 적들이 성문으로 접근하기 어렵게 만든 것.
수원 화성의 팔달문도 성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2중 구조로 된 성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뢰더 탑도 개념적으로는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뢰더 탑에서 내려와 성문 밖으로 나가 보았다. 밖에서 본 보조 방어 시설은 생각보다 성벽 밖으로 길게 나와 있는 데다 방어벽은 두텁고 진입로는 좁아 위압감마저 든다. 옛날에는 이 건물과 뢰더 탑 및 성벽 사이에 해자도 있었으므로 성으로 허락 없이 들어가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성벽 밖에서 본 뢰더 탑은 훨씬 높고 견고해 보였다. 탑을 올려다 보고서야 아이들도 자기들이 아파트 7-8층 높이까지 걸어 올라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차 대전 당시 폭격의 영향인 듯 검게 그을려 있는 탑 기둥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노란 문장과 로텐부르크 시의 붉은 문장이 유독 눈에 띄었다. 탑을 통과해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왕복 1차선이라서 밖에서 차량이 들어가려면 안쪽에서 나오는 차가 있는지 눈치껏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것으로 유명한 로텐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는 어디일까? 크리스마스 카드나 엽서 속 사진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전형적인 유럽의 모습으로 수많은 동화 마을의 모티브가 되었던 길거리가 로텐부르크에 있으니 바로 플뢴라인이다.
1940년 월트 디즈니의 피노키오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며 알려지기 시작한 플뢴라인은 최근에도 유명한 뮤직 비디오 릴 디키(Lil Dicky)의 Earth에 등장했다(4분 지점). 플뢴라인은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귀엽고 예쁜 마을을 상징한다.
뢰더 탑에서 내려온 우리는 성벽길을 뒤로한 채 도시의 남쪽 방향으로 걸었다. 로텐부르크의 골목길은 구석구석 아름다웠고 화분과 담쟁이로 화려하게 장식된 파스텔 톤의 집들이 골목을 따라 길을 안내해 주었다. 아이들이 나에게 '플뢴라인이 뭔데요?'라며 몇 번이고 물었으나 일단 가보자고 앞장섰다.
도보로 10여 분 만에 도착한 플뢴라인.
오후 시간이라 남쪽에 떠 있는 해가 역광을 만드는 바람에 색감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플뢴라인은 두 갈래 길 위에 각각 서 있는 방어탑을 배경으로, 갈림길 한가운데 우뚝 선 독일식 반 목조 건물과 길 양쪽에 늘어선 전통 가옥들이 짜임새 있게 어우러져 한 장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여기야'
'여기? 여기서 뭘 보라는 건데요?'
아이들이 나에게 물었고 뢰더 탑 등반 후 햇빛 아래 걷느라 짜증이 난 둘째는 진작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허탈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사실, 플뢴라인은 보는 각도에 따라 뷰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쉽다. 실제로도 이 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른 채 지나가는 사람도 많다. 양쪽으로 자동차도 다니기 때문에 타이밍을 잘 보고 길 가운데 포인트에서 서서 봐야 특유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모르겠니? 잘 봐봐. 어디 엽서나 그림, 만화 영화 같은 데서 본 것 같지 않니? 여기가 예쁜 유럽 마을의 모티브가 된 곳으로 유명해.’
그제야 건성으로 알았다고 대답해 주는 아이들과 달리 아내만큼은 진심으로 감탄해 줘서 고마웠다.
마음 같아서는 플뢴라인의 왼쪽 길로 더 내려가 도시 최남단 성벽에 구축되어 있는 방어 요새(Spital Bastion)까지 보려고 했으나 오후 일정과 가족들의 컨디션을 감안해서 이내 마음을 접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으니 가족 모두가 만족할 때가 멈춰야 할 때라는 것쯤은 이미 경험으로 터득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플뢴라인을 등지고 직선으로 길게 뻗은 언덕길을 따라 시내 중심부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으로 로텐부르크의 남은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로텐부르크는 아기자기하고 좁은 골목길로 유명하지만 도시 한가운데 의외로 넓은 광장이 있다. 좁은 골목길 한편에 있는 작은 이태리 음식점에서 시원한 필스너 맥주와 함께 점심을 먹고 난 후 도시의 유일한 광장인 마켓 스퀘어(시장 광장)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켓 스퀘어 건너편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는 광장을 내려다 보고 서 있는 거대하고 독특한 건물이 눈길을 끈다. 2개의 건물이 붙어있는 형태의 이 건물은 로텐부르크 타운 홀(Rathaus)이다.
서쪽(뒤쪽)의 고딕풍 건물이 13세기에 처음 지어진 후 동쪽(앞쪽)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16세기에 건설되었으나 화재로 무너져 17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증개축되었다고 한다.
타운 홀은 독일식 반목조 주택이 빼곡히 들어찬 로텐부르크에서 화려하고 웅장하게 서 있어 중세 시대 로텐부르크 정부의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타운 홀의 탑은 높이 약 60미터에 이르며, 뢰더 탑 외에 로텐부르크 시내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전망대가 있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타운 홀 건물의 계단 그늘에 모여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이 광장이 마켓 스퀘어 즉, 시장 광장으로 불리는 중요한 이유는 크리스마스 시장 때문이다. 로텐부르크에는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 관련 소품을 파는 곳이 있을 정도로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도시로도 유명하다.
특히, 11월 말부터 크리스마스까지 약 한 달가량은 광장에서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시장이 열리고 다양한 이벤트가 벌어진다. 언젠가 눈이 적당히 오는 겨울이 되면 중세 동화 속 마을에 크리스마스 시장을 보러 와 봐야겠다.
여름도 아름답지만 눈 덮인 중세 마을은 더욱 낭만적일 것 같다.
갑자기 아내가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며 30분만 시간을 달라고 하고 딸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동안 같이 여행을 다녀도 기념품을 거의 사지 않는 사람이라 약간 의아했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여행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여자끼리, 남자끼리 짝지어 흩어지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 흔한 일이다. 딸과 아들, 남녀의 관심 분야가 확연히 다르다 보니 여행 중의 여행 시간을 따로 가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 와중에 아들은 내 손을 잡아끌고 한 기념품 가게로 무작정 들어갔다. 중세의 무기나 갑옷, 방패, 코스튬 관련 기념품을 파는 곳에서 아들은 실제와 유사한 모형 단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것저것 한참을 둘러보던 아이는 자신에게 허락된 용돈 안에서 최고가 제품을 잡는 노련함을 과시했다.
시장 광장 주변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다양한 소품과 미술품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해서 관광지로서 로텐부르크가 얼마나 발달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골목길에서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한데, 무뚝뚝하고 낭만이 없다는 독일에 대한 고정관념은 로텐부르크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한편, 로텐부르크에는 축제 때 먹기 시작했다는 이 도시의 유명한 특산물 과자가 있다. 슈니발렌(스노우볼)으로 불리는 이 과자는 밀가루를 반죽해 끈처럼 길게 늘여 돌돌 말아 튀긴 후에 초콜릿을 입히고 설탕을 뿌린 과자이다. 로텐부르크가 원산지인지라 꽤 유명하다. 슈니발렌과 기념품 사이에서 고민하던 아이들은 과감하게 슈니발렌을 포기했다. '그래 봐야 초콜릿 맛 과자겠지머' 하면서 말이다.
잠시 사라졌던 아내는 작은 비닐봉지를 흔들며 나타났다. 아내가 산 것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수놓아진 식탁보였다. 손으로 직접 수놓은 장식이 화려한 초록색과 백색의 식탁보였는데, 아까 지나치던 길에 보았던 레이스 가게가 계속 눈에 밟혔나 보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궁금했는데 레이스 가게 주인아주머니와 꽤나 흥정을 한 모양이다.
유명 백화점에서 비싸게 파는 고품질의 식탁보를 크리스마스 소품으로 유명한 마을에 와서 싸게 득템 했다며 아내가 웃었다. 그녀는 강인한 한국의 가정 주부이다.
이 날 우리는 로텐부르크를 거쳐 딩켈스뷜까지 둘러본 후에 저녁에 뇌르틀링 근처에 잡아둔 숙소까지 가야 했다. 이렇게 빡빡한 일정이 아니라면 가족들은 로텐부르크에서 저녁까지 느긋하게 있었을 것이다. 중세 고문 박물관이나 성 야곱 교회 등 이 도시의 다른 랜드마크들은 다음에 또 와야 할 이유로 남기기로 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로텐부르크에서 시간은 참 빨리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