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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Oct 11. 2020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세 마을, 딩켈스뷜

역사와 낭만의 독일 로만틱 가도로 떠나는 가족여행 #3

로만틱 가도 2일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가로이 거닐었던 로텐부르크에서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 시간까지 뇌르틀링(Nördlingen) 근처의 숙소까지 가기 위해서는 더 이상 미적거릴 수 없어 아쉬움을 뒤로한 채 가도의 남쪽을 향해 다시 시동을 걸었다. 로텐부르크에서 가도를 타고 남쪽으로 약 30분을 더 달리다 보면 그와 비슷한 모습의 작은 도시에 들어서게 된다.

바로 딩켈스뷜(Dinkelsbühl)이다.

전체 여정 중의 딩켈스뷜. 로만틱 가도 여행 2일차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호헨스타우펜(Hohenstaufen) 왕조에 의해 12세기 초에 본격적인 도시로 발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딩켈스뷜의 실제 역사는 8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웬만한 사람들에게 낯선 이름의 도시겠지만 딩켈스뷜은 중세부터 남북으로는 이탈리아와 북부 유럽을 잇는 길과 동서로는 보헤미아(체코)와 서부 유럽을 잇는 길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서기 1274년에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Habsburg) 왕조의 황제 루돌프 1세에 의해 로텐부르크와 함께 자유 제국 도시(Free Imperial City)로 지정된 딩켈스뷜은 17세기에는 종교 전쟁에서 신,구교의 갈등을 극심하게 겪기도 했으나 19세기에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특별한 지위를 유지했다. (자유 제국 도시에 대해서는 동화 속 중세의 마을, 로텐부르크 참조)   

1586년 경의 딩켈스뷜 모습. (출처 : www.dinkelsbuehl.de)


인구 약 1만 명의 작은 도시 딩켈스뷜은 우리가 전날 갔던 뷔르츠부르크나 오전에 갔던 로텐부르크와 달리 2차 대전 때 폭격을 당하지 않아 15세기 이후의 중세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마을이다. 더구나 이 곳에는 전통적인 독일의 목조 건축물이 상당히 보존되어 있어 건축 역사의 보고(寶庫)라고 알려져 있으며, 형형색색으로 가꾸어진 건물과 아름다운 풍경으로 독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중세 도시로 손꼽힌다.


걸어서 한두 시간이면 도시를 모두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동쪽 성벽 밖을 흐르는 뵈르니츠(Wörnitz) 강가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 바로 앞을 흐르는 작은 강은 돌로 포장된 왕복 1차선 다리가 가로지르고 있고 그 위로 높이 솟은 주황색의 도시 방어탑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쌍두 독수리 문장과 딩켈스뷜의 문장이 기둥 중간에 선명한 이 탑은 딩켈스뷜의 동서남북에 위치한 4개 관문 중 동쪽을 맡고 있는 뵈르니츠 탑(Wörnitztor)이다. 이 탑은 13세기에 성문으로 처음 건설된 후 15세기에 탑의 모습을 갖추었고, 상단부는 17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딩켈스뷜의 동쪽 관문 뷔르니츠 탑


도시의 주요 도로 중 하나임에도 돌 포장길은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아, 안에서 차가 나오려면 반대 편 차량은 한쪽으로 비켜서서 기다려야 한다. 불편할 수 있지만 느릿느릿한 삶의 여유가 느껴지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성문 안으로 들어간 딩켈스뷜의 길거리는 화려한 색의 경연이었다. 주황색 지붕들은 로텐부르크와 비슷했지만 각각의 건물들은 벽뿐만 아니라 창문의 덧문마저 저마다 노란색, 보라색, 연두색, 살구색 등 다양한 색으로 칠해져 있어 동화 속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파스텔 톤 집들은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뵈르니츠 탑 안쪽의 사자 분수대(Löwenbrunnen) 앞


뵈르니츠 탑 안쪽으로 좀 더 걸어서 들어가 보았다.

딩켈스뷜에는 로텐부르크의 마켓 스퀘어와 같은 커다란 광장은 없다. 다만, 중세 이후 도시의 랜드마크로 자리를 지켜온 장크트 게오르그스 성당(St.-Georgs-Münster) 앞의 넓은 삼거리가 그 역할을 대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성당 주위의 길을 따라 가죽이나 식료품 등 다양한 시장이 발달했었다고 한다.

성당 앞에서는 우리가 들어온 동쪽 외에 서쪽과 북쪽, 남쪽으로 메인 도로가 모두 갈라져 나가는데, 어느 방향을 보더라도 오랜 전통의 독일식 반목조 건물들이 도시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어 감탄사를 부른다.


로텐부르크와 마찬가지로 딩켈스뷜에도 상당히 보존되어 있는 독일의 전통적인 반목조 건물을 파흐베르크(Fachwerk)라고 부른다. 파흐베르크는 오늘날의 트러스(Truss) 공법을 떠올리면 되는데, 목재로 건물의 뼈대를 올리고 그 사이사이를 진흙이나 벽돌로 채운 건축 방식이다. 로만틱 가도를 따라가는 옛 마을에는 이런 전통 가옥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성당 바로 앞에서 북쪽으로 볼 때 나란히 서 있는 5채의 건물은 16세기경에 지어진 모습 그대로라고 하는데, 각 건물에서 성당 앞 광장을 모두 볼 수 있도록 성당에서 멀어짐에 따라 건물이 앞으로 약간씩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당 앞 광장에서 바라본 도시의 북쪽 방향


너무 다채로운 색깔 때문인지 길거리 인상이 로텐부르크와 비슷하면서도 다소 인공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도시 구석구석을 이렇게 깔끔하고 예쁘게 꾸며 놓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로텐부르크는 2차 대전 당시 40% 가까이 파괴되어 복구된 데다 유명세 탓에 방문객도 많고 관광지 같은 인상이 짙었다면 딩켈스뷜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덕분에 한적한 민속촌 느낌이다. 이건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있을 듯.

성당 앞에서 본 도시의 남쪽 방향. 뾰족한 첨탑은 성 바오로 교회이다.


도시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장크트 게오르그스 성당(St. Georgs Münster)은 1448년에 착공되어 1499년에 완공된 후기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이다. 그런데 정면의 높은 종탑과 둥근 아치 모양의 입구는 차라리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까워 전통적인 고딕 양식과 차이가 커 보인다. 원래 이 자리에는 12세기경에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있었으나 이를 기반으로 15세기에 새로운 교회로 지어졌으며, 8 각형의 지붕이 얹힌 현재 높이의 종탑 상단부는 16세기에 증축된 것이다.

19세기에는 네오고딕 양식으로 내부의 예배당을 개축하는 등 이후로도 지속적인 리모델링을 거친 이 교회당은 현재 가톨릭의 교구 성당이자 도시의 랜드마크이다.

성 게오르그스 성당(좌측 전경 사진의 출처는 www.tourismus-dinkelsbuehl.de)


내부로 들어갔더니 고딕 양식 특유의 상승감이 압도적이어서 저절로 고개를 들어 둘러보게 된다. 회랑을 따라 서 있는 11쌍의 수직 기둥은 높은 천장의 볼트를 떠 받치고 있고 정면의 주제단은 조각과 그림이 조화를 이룬 독특한 형태이다.  17세기에 처음 세워졌다가 19세기에 후기 고딕으로 리모델링된 내부의 주 제단은 예수 십자가상 위로 백마를 타고 드래곤을 무찌르는 성 조지(St. George)에 관한 성화가 걸려 있어 이 성당이 성 조지에게 봉헌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성 게오르그 성당의 내부. 정면의 주 제단이 보인다.


로마의 군인 출신으로 사납고 악독한 용을 무찔렀다는 전설의 보유자 성 조지는 초기 기독교 14 성인 중 한 명으로 로마 제국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순교한 후 시성(諡聖) 되었다. 통상 백마를 탄 기사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하는 성 조지의 상징은 흰색 바탕에 붉은색 십자가로 중세 십자군의 상징이자 잉글랜드와 조지아(옛 소련의 그루지야)의 수호성인으로 받아들여져 그들 나라의 국기에 쓰이고 있다.


딩켈스뷜이 있는 이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 시절부터 슈바벤(Schwaben)이라 불렀는데, 중세 이탈리아 제노아(Genoa)의 수호성인이었던 성 조지를 이 지역에서도 수호성인으로 받아들였다. 슈바벤은 남부 독일과 북부 스위스 지역까지 아우르는 영역으로, 30년 전쟁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로부터 독립한 스위스의 국기(적색 바탕의 흰색 십자가) 역시 그 기원은 성 조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 조지 십자가가 사용된 잉글랜드 국기와 조지아 국기


성 조지의 성화는 성당 내부 뒤편 파이프 오르간의 하단부에도 걸려 있다. 오래된 교회와 어울리는 듯 아닌 듯 성당 입구 위에 보이는 높이 10여 미터의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은 1997년에 설치된 것으로 3,939개의 파이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잠시 성당의 미사석에 앉아 고풍스러운 고딕의 회랑에 울려 퍼지는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상상해 보았다. 높고 긴 스테인드 글라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빛은 내 눈 앞에서 사선으로 뿌려지고 있고, 이따금 들리는 말소리 외에 고요한 성당 안의 모습은 스스로 몸가짐을 경건하게 만든다.


잠시 눈을 감고 명상을 한 나는 아이들에게 혹시 성당의 종탑 위에 한번 올라가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오전에 로텐부르크에서 올라갔던 탑을 끝으로 이번 여행에서 더 이상 등반은 없을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성당 문을 나섰다. 나도 허탈하게 웃으며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성 게오르그스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딩켈스뷜에는 전통의 파흐베르크 건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도이체 하우스(Deutsches Haus)'가 있어 눈길을 끈다. 성 게오르그스 성당에서 나와 북쪽 방향으로 난 길을 바라보면 중세 이후로 보존된 5개의 건물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데, 그 가운데 핑크색 전면부가 화려한 전통 주택이 도이체 하우스이다.

1440년에 귀족의 집으로 지어진 후 1600년에 확장된 이 건물은 남부 독일의 대표적인 후기 르네상스 건축물로 현재는 50년 넘게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왼쪽으로 보이는 화려한 파흐베르크 건물, 도이체 하우스


도시의 북쪽 성문인 로텐부르크 게이트(Rothenburger Tor)를 향해 나 있는 바인마크트(Weinmarkt) 길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바인마크트 길은 곧장 닥터-마틴-루터 길(Doktor-Martin-Luther-Straße)과 연결되어 있다. 길을 따라 서 있는 고풍스럽고 예쁜 가옥들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각각의 건물들은 베란다의 화분이며 작고 귀엽지만 아름다운 동상들로 장식되어 있거나, 옛날의 돌출 간판들이 줄지어 있어 그 길을 따라 걷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다.

닥터-마틴-루터 길에서는 걷다가 어느 방향으로 돌아보아도 한 폭의 그림 같다.

누가 독일 사람들은 낭만이 없고 건조하다고 했나? 이 마을에서만큼은 로만틱 가도가 '로마로 가는 길'이 아니라 '낭만의 길'이라고 해야 어울린다.

바인 마크트와 닥터-마틴-루터 길의 풍경
로텐부르크 게이트 근처에서 본 장크트 게오르그스 성당 방향


길을 따라 감탄하며 조금 걷다 보니 북쪽의 성문인 로텐부르크 게이트에 도착했다. 14세기에 건설된 높고 견고한 도시의 방어탑이지만 여기에는 중세 후기 독일의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흑사병으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줄고 이상 기후에 종교 개혁 등으로 가톨릭이 위기에 몰렸던 중세 후기, 유럽을 중심으로 마녀 사냥이 나타났다. 타락하고 부패했던 가톨릭 교회는 예수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마녀를 인정했고,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수만 명의 무고한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화형에 처해진 후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는 종교적 광기였을 뿐 아니라, 소수의 희생양을 찾아 썩고 문드러진 사회의 위기를 모면해 보겠다는 다수 남성들과 세속 권력의 잔인한 횡포였다.

로텐부르크 게이트의 2층에는 마녀사냥 당시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이 갇혔던 감옥과 고문실이 있었다. 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마녀 사냥의 흑역사를 간직한 로텐부르크 게이트

로텐부르크 게이트까지 걸었다가 도시의 좀 더 안쪽 즉, 뵈르니츠 강의 반대쪽 골목길을 따라 도시의 속살을 들여다보듯 걸었다. 골목길 구석구석은 다채로운 파스텔 톤의 건물들로 아름답다.

우리가 도착해 도시로 진입했던 뵈르니츠 탑이 동쪽 끝이라면 서쪽 끝에 해당하는 바이서 탑(Weißer Turm)까지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


딩켈스뷜에서는 채 2시간을 머무르지 않았다.
한적하고 작은 민속촌 느낌이었고 식사 때도 아니었던 데다 쇼핑할 곳도 거의 없어 전체적으로 둘러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대신 뇌르틀링 근교에 잡아둔 숙소로 출발하기 전에 대형 마트 리들(LIDL)에서 간단히 장을 봤다.


약 1시간가량 달린 독일의 시골길은 아름다웠다. 추수가 끝난 듯 누렇게 펼쳐진 들판과 구릉 사이 구불구불한 길을 석양이 내려앉는 순간에 달리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들판 저 멀리 삼삼오오 늘어선 주황색 지붕들의 시골 마을은 아기자기했고, 달리다 차를 세우고 들른 시골길 옆의 성당은 독특했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도 ‘그래, 이거지! 처음부터 이런 길로 왔어야지!’ 라며 끊임없이 감탄 중이었다.

시골 길 옆 성당에 잠시 차를 세우고 둘러본다
로만틱 가도를 따라 딩켈스뷜에서 뇌르틀링으로 가는 길에 만난 풍경


우리는 해질 무렵 뇌르틀링 근교의 아파트형 호텔에 도착했다. 도시에서 차로 15분 이상 떨어진 곳의 숙소라 4성급이라고는 하지만 가격은 저렴했다. 리셉션의 주인장은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그녀는 신분증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당신이 솔롱고스입니까?'라고 묻더니 이런저런 설명과 함께 바로 별채로 안내해 주었다. 신분증 확인도 안 할 만큼 사람을 믿는 시골 인심인가 싶었다.

새로 지은 건물에 방도 깔끔하고 다 좋았지만, 이 고급스러운 아파텔에는 우리가 몰랐던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테라스가 딸린 아름다운 2층 숙소의 모습


방 소개를 하면서 주인장이 '모기가 많으니 나가고 들어올 때는 꼭 문을 닫으라'라고 했었는데, 방 시설에 정신이 팔려 이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숙소 뒤에 넓은 정원도 있어 아들이 드나들며 놀았는데, 그때부터 테라스의 문이 두어 시간가량 열려 있었던 것.


아들과 나는 인간 에프킬라이다. 우리의 피를 모기들이 정말 좋아하는지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모기에 물리지 않고 우리만 죽어라 물리기 때문에 내가 붙인 별명이다.

이건 보통 비상 상황이 아니다. 모기가 거의 없는 나라에서 오래 살아서 모기에 대한 개념이 사라져 버린 거냐고 자책하며 나는 재빨리 리셉션으로 뛰어가서 혹시 모기약이 있는지 물었다.


물어보나 마나 답은 뻔했다. 주인장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런 건 없다고 일갈한 후 종이를 말아 쥐고 모기를 잡으라는 '멋진' 조언을 해 주었다. (그러게 문을 잘 닫으라니까...라고 말끝을 흐렸다.)

유럽에 살면 이런 건 포기가 빠르다. 아내와 나는 즉시 종이 신문을 말아 쥐고 모기 퇴치에 나섰고, 아내가 발견하면 내가 내리치는 팀 플레이로 거의 두어 시간 동안 숙소 안을 샅샅이 뒤져 20-30 마리의 모기를 잡아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낮에 슈퍼에서 사 온 프랑켄 와인을 한병 따서 축하주를 나누었다. 술을 마셨는데도 모기에 물리지 않았으니 성공이었다.

그렇게 길었던 하루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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