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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Dec 29. 2020

동화 속 화려함 뒤의 비극, 노이슈반스타인 성

역사와 낭만의 독일 로만틱 가도로 떠나는 가족여행 #5

실제로 존재하는 동화 속의 성

독일어를 모르는 사람이면 한 번에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 노이슈반스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은 누구나 한 번쯤 사진으로라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노이+슈반+스타인이란 글자 그대로 '새로운 백조의 돌(石)'이라는 뜻으로 로만틱 가도가 끝나는 독일 최남단의 슈방가우(Schwangau) 지역 산 중턱에서 서북쪽 바이에른의 평야지대를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는 성이다.

한 눈에도 군사적인 용도나 거주 또는 통치를 위한 용도로 보이지 않아 왜 이런 성이 건설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면에서 본 노이슈반스타인 성 (사진 출처 : neuschwansteintickets.com)


이 성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월트 디즈니(Walt Disney) 때문일 것이다. 디즈니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에 방문한 후 영감을 받아 디즈니랜드 안에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성을 디자인했고, 디즈니 성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도 디즈니의 상징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덕분에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연간 150만 명이 방문하는 독일 최고의 관광지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된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성(사진 출처 : visitcalifornia.com)


대부분의 산업에도 적용되는 말이지만 관광이나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스토리 라인이 갖는 중요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이런 스토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오리지널리티의 진정성과 사실성이 인정받을 때 빛이 난다.


얼마 전 인천 소래 마을에 새우 타워가 세워졌다는 뉴스와 중국 형주(荊州)에 수십 미터 크기의 관우 동상이 세워져 논란이라는 뉴스를 보고 쓴웃음이 났었다. 소래 포구에 새우가 유명하고 중국 형주라면 삼국지의 관우가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나, 이렇게 어울리지 않게 급조된 건축물로 스토리가 더 잘 만들어질까? 공무원들의 욕심이 빚은 무리수라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소래포구의 새우타워와 중국 형주의 관우 동상(사진 출처 : 각각 연합뉴스, 조선일보)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를 거쳐 슈방가우로

여행 3일째 오후, 뇌르틀링(Nördlingen)을 출발했으나 남쪽 끝의 슈방가우(Swangau)까지 곧바로 내려가기에는 시간 여유가 있어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옛 로만틱 가도(街道) 위로 차를 몰았다. 가도 중간에 있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 잠깐 들르기 위해서였다.


축구 국가대표였던 구자철 선수나 지동원 선수가 활동했던 곳이라 한국에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아우크스부르크는 원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티베리우스가 기원전에 세운 군사기지가 시초였다.

도나우강과 알프스 산맥 사이에 자리 잡은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진가가 2천 년 전에 이미 빛을 발했던 것인데, 도시의 이름도 아우구스투스에서 유래한다. 중세 역사 속에서 아우크스부르크는 1555년 종교개혁 당시, 신교와 구교 간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화의(和議, 아우스크부르크 화의)가 있던 곳으로 종교개혁의 중심지 중 하나이기도 했다.


햇빛이 따가운 더운 여름날 오후, 뇌르틀링을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차에서 내려야 해서 아이들의 짜증은 극에 달했다.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알면서도 내가 아우크스부르크에 들른 이유는 시청사(City Hall)에 있는 '황금의 방(Goldener Saal)' 때문이었다. 이 방은 말 그대로 천장과 벽이 황금으로 장식된 방으로 화려함이 웬만한 궁전에 뒤지지 않는다. 도대체 이런 방이 왜 시청사에 있는지 궁금했다.


17세기에 건설된 아우크스부르크 시청사는 당시 후기 르네상스 시대 건축물 중 종교 건축을 제외하고 가장 장대하게 건축되어, 건물 양쪽에 타워가 없다면 최근에 지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세련되어 보인다.

아우크스부르크 역시 로텐부르크나 뇌르틀링처럼 자유 제국 도시의 하나였고, 지리적 중요성 덕분에 무역도시로 크게 발달했으며 왕자-주교(Prince-Bishop)를 통해 황제의 통치를 받은 도시였다.

제국 내에서의 위치 때문에 시청사의 2층에 있는 황금의 방은 원래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의회를 위한 용도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레겐스부르크(Regensburg)가 제국의회의 중심지가 되면서 이 곳에서는 18세기에만 의회가 몇 차례 열렸다고 한다.

아우스크부르크 시청사. 17세기 대표적인 남부 독일의 후기 르네상스 양식이다


마침 우리가 도착했을 때 시청사 내부 공사 중이어서 시청 앞 광장에 있는 Information 센터에서 티켓을 살 수 있었다. 어른 2.5 유로, 18세 미만은 1 유로씩만 냈더니 작은 종이쪽지 한 장에 ‘4명’이라고 펜으로 써주었다. 황당한 시스템이지만 이 ‘티켓’을 황금의 방 입구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냈더니 입장이 가능했다.(2020년 현재는 공사가 완료된 후라 다를 것이다.) 방문객도 적고 한적한 데다 층고가 높다 보니 에어컨이 없어도 건물 안은 비교적 시원했다.


높고 커다란 문을 통과해 들어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쩍 벌렸다. 화려한 금장식 가운데 타원형의 아름다운 그림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어 눈을 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천장으로 고개를 들고 쳐다보느라 목이 아플 지경으로, 10미터는 족히 되는 높은 천장과 거기서 이어지는 상단부 벽의 장식이며 그림들이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듯하다.


17세기에 지어진 이 방은 2차 세계대전 때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후로 방치되었다가 1985년 도시 건립 2천 주년을 맞아 복원이 완료되었다.(복원시 사용된 황금의 양이 2.6킬로그램이라고.) 원래 황금 천장은 체인을 통해 들보에 매달려 있었으나 복원 과정에서 내벽과 연결된 현대식 천장으로 마감되었다고 한다.

아우크스부르크 시청사의 황금의 방


재미있는 점 하나. 마룻바닥에 바퀴 달린 카트가 하나 놓여 있어서 궁금했는데 확대경이자 거울이 카트 윗면에 붙어 있다. 목 아프게 고개를 쳐들고 천장을 쳐다보지 않아도 편하게 그림과 장식을 감상할 수 있어 무릎을 쳤다. 천장 한가운데 있는 타원형의 그림은 지혜(Sapientia)를 상징하는 것으로 "통치자는 나를 통해 통치한다(Rulers rule through me)"라는 문구가 그려져 있다. 이 방에 어울리는 그림이다.

황금의 방 한 가운데 있는 주 그림


입구를 등지고 볼 때 왼쪽 천장의 그림은 아우크스부르크 건설에 대한 이야기이다. 건설 중인 시청사를 배경으로 청사의 건축가였던 엘리아스 홀(Elias Holl)이 설계도를 가리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타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4명의 여성은 각각 지식, 다산, 근면, 경건함을 상징한다.

황금의 방 왼쪽 천장의 그림과 장식


같은 방식으로 볼 때 오른쪽 천장의 그림은 도시 방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그림에는 적을 물리쳤다는 문구가 쓰인 중앙의 그림을 둘러싸고 4명의 여성이 보인다. 이들은 각각 치유, 정직, 정의 그리고 번영을 상징한다.

황금의 방 오른쪽 천장의 그림과 장식


30여 분을 둘러본 후 시청사를 나서며 시간을 보니 오후 4시를 지나고 있었다. 날도 덥고 1시간 반 가량을 더 운전해서 내려가야 했으므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광장 옆의 카페로 향했다. 유럽 사람들은 아이스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아 기대도 안 했는데 이 곳 카페에는 콜드 브루가 있어 반가웠다. 시원한 음료와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이 있는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확 트여 여유로운 독일의 들판과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시간 가량 달리다 보니 문득, 주변 풍경이 크게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야 지대가 사라지고 높은 산들이 많아진 것이다. 멀리 차창 앞으로 만년설로 덮인 알프스 산들이 나타났고 도로변 호수며 색다른 건물 풍경은 마치 우리가 스위스의 지방도를 달리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켰다.

무심히 창 밖을 보던 딸이 알프스는 스위스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의아해한다.

‘알프스 산맥은 스위스 말고도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까지 걸쳐 있어.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오스트리아야.’
아는 체 설명을 했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 접경 지역은 나도 처음이고 이렇게 갑자기 바뀌는 풍경은 생경했다.

슈방가우 호텔방에서 내다본 풍경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뜻하지 않게 우리 눈 앞에 나타났다.

호텔에 도착하기 몇 분 전, 도로 옆에 넓게 펼쳐진 평야 뒤로 높은 산이 보여 인상적이었는데 그 산 중턱에 우아하게 서 있는 하얀색의 탑과 성채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운전을 하느라 긴가민가하던 내가 곁눈질을 하다가 확신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얘들아 왼쪽에 봐봐. 저게 노이슈반스타인 성이네!'

아내와 딸이 환호성을 질렀다. 얼른 호텔에 짐을 푼 우리는 혹시 먼발치에서도 성이 보이는지 뒤쪽의 들판으로 나가 보았다. 구름 낀 파란 하늘 아래 구불구불 이어진 알프스의 산맥을 배경으로 홀로 서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흰색의 성, 노이슈반스타인이 보였다. 성이 서 있는 위치도 정말 절묘하다.  

숙소 뒤로 보이는 노이슈반스타인 성


다음날 일정이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성 방문이지만 하루 종일 비가 예보되어 있어 걱정이 앞섰다. 스위스 여행에서도 비와의 싸움이 어려움이었던 만큼 산악지대에서 날씨는 가늠하기 어렵다. 맑고 화창하며 더웠던 아우크스부르크로부터 불과 1시간 반 떨어진 곳에서 이토록 다른 날씨를 만나게 될 줄이야.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보며 걷는 저녁 산책길


저녁 산책을 할 때부터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결국 밤부터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나는 ‘제발 내일 성을 관람하는 데는 지장이 없게 해 달라'라고 빌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격동의 19세기 유럽과 바이에른 왕국

뮌헨을 주도(州都)로 하는 남부 독일의 바이에른(Bayern) 주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選帝侯)국(황제 선출권을 가진 제후의 나라) 중 하나였던 바이에른 공국에서 유래한다.

유럽을 휩쓸던 나폴레옹에 대항하지 않고 협력했던 바이에른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던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왕국으로 승격된 후,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쟁(1866년)에서 오스트리아 동맹에 가담했다가 패배하면서 크게 위축된다. 이후 프로이센이 프랑스마저 격파하고 독일 제국을 선포하자 남부 독일의 다른 나라들과 함께 제국으로 흡수되어 현재의 독일 연방을 구성하게 된다.(1871)


한편, 철혈(鐵血) 정책을 펴며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차례차례 힘으로 제압하고 최초의 통일 독일을 이끌었던 인물은 프로이센의 명재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Schönhausen)이다. 발트해 연안의 소국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은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굴복하며 프랑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산업화를 바탕으로 한 군사력 증강에 집중했던 비스마르크의 리더십으로 19세기 중반에는 전혀 다른 나라가 되어 있었다.


1866년에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영향권에서 축출한 후, 독일의 완전한 통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프랑스를 꺾어야 한다고 믿었던 비스마르크는 스페인의 왕위 계승 문제를 구실로 책략을 펴 1870년에 프랑스의 선전 포고를 이끌어 낸다. 이미 대 프랑스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발톱을 숨기고 '방어 전쟁’이라며 국제 여론전까지 펴는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프로이센을 여전히 깔보고 '열 받아' 급하게 선전을 포고했던 프랑스는 멕시코 등 해외 문제로 국력이 분산되어 있어 어수선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상황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와의 국운을 건 전쟁에 대비하여 오스트리아와의 전후 처리도 현명하게 완료해 둔 터였다.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가 비엔나 점령을 원했음에도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가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며 이를 막아 오스트리아를 끝까지 중립 지대에 묶어둘 수 있었다.


손자는 병법에서 이길 싸움이 아니면 피하라고 했다. 프랑스가 손자를 알았다면 새겨 들었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깔봤던 애송이 프로이센은 단 2번의 전투로 전쟁이 벌어진 지 1년도 안되어 프랑스를 무너뜨렸고(보불전쟁; Franco-Prussian War), 1871년에 빌헬름 1세가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며 초대 황제에 등극했다.

포로가 된 나폴레옹 3세와 면담하는 비스마르크(우측)


노이슈반스타인 성과 루드비히 2세

한편, 프로이센이 한창 통일 독일을 향해 달려가며 주변의 소국들을 합병해 가던 1864년, 남부 독일의 바이에른 왕국에서 루트비히 2세(Ludwig II)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미남에 키가 컸던 그는 어려서부터 예민하고 내성적인 데다 음악, 미술 등에 대한 예술적 감성이 뛰어났다. 그는 출중한 외모 덕에 유럽 내 여성 귀족들의 인기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왕으로서 정치와 외교, 경제는 뒷전인 채 오로지 건축이나 오페라, 음악과 미술에만 심취했다는 점인데 하필 당시 시대 상황이 독일 지역뿐 아니라 전 유럽에 큰 변화의 파도가 몰아치던 엄중한 때였다. 평화의 시대라면 예술을 숭상한 왕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으나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루트비히 2세가 즉위하고 2년 후에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했고, 오스트리아 동맹에 가담했던 바이에른 왕국은 패배 후 반강제적으로 독일 제국에 편입되어 루트비히 2세는 빈껍데기 왕이 되고 만다. 현실은 구질구질했으나 그는 절대 권력을 가진 중세 시대 왕의 모습을 동경했다. 그래서 더욱 자신만의 성 안에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루트비히 2세는 무엇보다 오페라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의 예술세계에 빠져 그를 숭배했다. 루트비히 2세가 왕위에 오른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무명에 가까웠던 바그너를 뮌헨으로 불러 모든 빚을 갚아주고 이후의 작품 활동에 대해 모든 재정을 후원하도록 한 일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루트비히 2세(좌)와 리하르트 바그너(우, 출처 : 위키피디아)


어린 시절을 호엔슈방가우(Hohenschwangau) 성에서 자란 루트비히 2세는 이 성으로는 바그너가 오페라를 통해 노래한 게르만 민족 영웅의 전설과 신화를 담기 어렵다고 보고 여러 개의 새로운 성 건축을 추진하였다. 특히 호엔슈방가우 성 맞은편에 지을 새로운 성은 구상부터 건축까지 직접 챙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노이슈반스타인 성이다.

프로이센은 정치와 경제를 정비하고 제국 통일을 향해 달리는데, 왕이 정사는 내팽개친 채 현실과는 동떨어진 예술과 판타지 감성을 추구하며 성만 건축하고 있으니 국고는 탕진되어 가고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바그너는 시와 오페라를 통해 더욱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루트비히 2세는 궁전의 벽화나 장식들에 모두 바그너의 오페라를 주제로 구성하게 된다. 성들이 바그너를 위한 건축이라는 소문뿐 아니라 루트비히 2세가 파혼하게 된 이유도 바그너와의 동성연애 때문이라는 소문도 퍼졌다. 뮌헨에 있는 귀족들의 견제가 심해지자 루트비히 2세는 결국 바그너를 배제하기는 했으나, 내성적이고 예민했던 인물이었기에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퓌센에서 은둔하며 더욱 성 건축에만 매달렸다고 한다.


1868년부터 왕이 직접 건축을 시작한 노이슈반스타인 성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바그너의 오페라가 인테리어와 벽화의 주제로 사용되었다. 그 범위는 왕이 사춘기에 매료되었던 로엔그린(Lohengrin)과 로엔그린의 후속작으로 그 아버지의 전설을 노래한 파르치팔(Parzifal),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Isolde)와 탄호이저(Tannhäuser) 등 게르만과 북유럽의 전설을 노래한 상당한 작품들을 망라한다.

로엔그린과 파르치팔에 대한 벽화 (출처 : www.neuschwanstein.de)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한 벽화 (출처 : www.neuschwanstein.de)


왕실의 돈으로 성을 짓기는 했지만 엄청난 빚을 지면서도 계속 성을 짓는 왕의 '기행(奇行)'에 뮌헨의 귀족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반대파들은 왕이 '미쳤다'라고 단정했고 왕의 주치의가 괴짜일지언정 미치지는 않았다는 반박을 하는 등 혼란은 커져만 갔다.


1886년 6월, 루트비히 2세는 결국 반대파들의 주장에 따라 정신병자 판정을 받고 왕의 침실에서 체포된 후 강제로 폐위되어 뮌헨 남쪽의 베르크(Berg) 성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그는 주치의와 함께 닷새 후 베르크 성 옆의 슈타른베르크(Starnberg)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뮌헨에서는 왕이 자살했다고 발표를 했으나 정신병자라는 이유도 석연찮았고, 190cm의 키에 수영도 잘했다는 그가 얕은 호수에서 익사했다는 사망 원인도 의문에 싸여 있다. 더구나, 왕과 함께 익사체로 발견된 주치의의 머리에는 상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정적들에 의해 암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다.

어쨌거나 동화 속 왕자님의 외모와 함께 내성적이지만 친절한 성품 덕에 인기도 있었던 루트비히 2세의 실제 이야기는 디즈니랜드의 판타지와 달리 너무나 비극적이다.

Christian Jank가 구상한 완성된 모습의 성 디자인(출처 : www.neuschwanstein.de)


루트비히 2세의 사망에 따라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1892년에 건축이 중단되었다. 왕좌의 홀에 신축이 예정되어 있던 왕좌는 결국 제작되지 못했고, 성도 당초 계획의 1/3 가량만 공사가 진행된 상태에서 모든 건축 계획이 취소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성이 관광지로 전락하는 것이 싫었던 루트비히 2세가 자신이 죽으면 성을 파괴해 달라고 말했음에도 그가 죽은 지 불과 7주 후에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관광지로 일반에 개방되었다.

루트비히 2세 사망 당시의 성 건축 상황 (출처 : www.neuschwanstein.de)


그러나 건축 당시 국가의 재정을 파탄 내다시피 했던 애물단지가 오늘날 최고의 관광지로서 바이에른 주 재정에 톡톡히 효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 건축에 그토록 집착했던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의 판타지였던 이 성에서 2주가량 밖에 살지 못했다고 하니 얼마나 덧없는 인생인가. 결론적으로 그는 사후에 자신의 나라에 기여한 셈이 되었다.


노이슈반스타인 성 방문길

전날 밤에 천둥 번개를 동반하여 폭우가 내렸지만 아침 일기예보에는 정오 무렵부터 날이 갤 것이라고 나와 있어 적잖은 기대를 했었다. 체크아웃을 하면서 호텔 리셉션에 앉아있던 주인장에게 오늘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대한다고 했더니 무뚝뚝한 독일 아줌마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저 성에는 비가 내리면 늘 하루 종일 내리거든요.’
‘아니, 나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시면 안 되나요?’

살짝 김이 샌 내가 작은 한숨을 쉬며 항의(?)를 하자 그녀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오후에는 비가 갠다는데?'라면서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아침부터 오락가락하던 비는 우리가 성을 다 보고 내려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할 때는 물론, 저녁때까지 하루 종일 쏟아졌다.

짙은 비구름 아래 비가 내리는 야속한 아침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외부만 보려면 별다른 예약이 필요 없으나 성 내부에 입장하려면 사전에 온라인으로 입장 시간을 예약한 후 입장 1시간 30분 전에 매표소에 직접 와서 티켓을 수령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에 티켓을 수령하지 않으면 'No Show'로 취소가 되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입장권은 매표소에서 현장 구입도 가능하나 줄이 매우 긴 데다 현장 발매분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더구나 아무리 빨라도 티켓을 받은 후 1시간 30분이 지나야 입장이 가능하므로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여행 몇 주 전에 온라인 예약을 해 둔 나는 이날 오전 9시 30분에 티켓을 수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매표소는 노이슈반스타인 성과 호엔슈방가우 성이 모두 올려다 보이는 산기슭에 있다. 주차장도 넓고 관광버스도 수시로 들어오고 있어 관광지로서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매표소에서 받은 티켓에 '439번 그룹', ‘11시 15분 입장'이라고 표시되어 있어 이게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아침에 도착했을 때는 매표소 주위를 둘러싼 짙은 비구름과 운무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홀연히 구름이 걷히더니 산 중턱 위에서 노이슈반스타인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을 직접 보니 입장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는데도 마음이 급해졌다.

매표소 앞에서 올려다 본 노이슈반스타인 성


매표소부터 성까지는 걸어서 30분이면 올라갈 수 있는 거리지만 마침 비가 세차게 퍼붓고 있어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천 운동화를 신고 있던 아이들의 분노 게이지는 이미 절반 이상 차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빨리 버스를 타는 것 말고는 달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딸이 여행에 대해 다시 저주를 쏟아내기 전에 성 입구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매표소 앞에 2마리의 말이 끄는 관광용 마차가 서 있어 아들이 관심을 보였다. 순간 마차를 타볼까?라는 생각을 했으나 비가 오는 날이라 그런지 유독 말똥 냄새가 심해 고개를 저었다.

매표소에서 50여 미터 가량 떨어진 곳의 셔틀버스 주차장에 줄을 섰더니 금방 버스가 왔다. 성인 2.5유로, 청소년 1 유로면 왕복 셔틀을 탈 수 있고, 버스는 출발한 지 6-7분 만에 마리엔 다리(Marienbrücke) 앞 정류장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버스에서 보니 빗속에 걷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날씨만 좋았다면 정말 좋은 산책길이다.

매표소 앞 마차의 말들. 왠지 좀 피곤해 보인다.


마리엔 다리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협곡 위의 작은 아치형 다리이다. 다리는 성 내부 관람을 마친 후에 가보기로 하고 일단 성을 향해 걸었다. 정류장에서 성 정문까지는 절벽의 오솔길을 따라 약 10분가량만 걸으면 된다.

성과 마리엔 다리, 정류장의 관계 (구글 위성 사진 캡처)


성 정문이 가까워 올 무렵, 왼쪽의 산 아래로 호엔슈방가우 성과 호수가 손에 잡힐 듯 시원하게 펼쳐졌다. 우리가 조금 전에 출발했던 매표소와 주변 건물들도 장난감처럼 들어왔다. 궂은날인데도 호수의 물은 초록빛 산과 어우러져 더욱 파랗게 보였고 노란 호엔슈방가우 성의 모습도 귀여워 보였다. 우리는 굳이 구입하지 않았지만 노이슈반스타인 성의 관람 패키지에는 호엔슈방가우 성이 포함된 것도 있으니 필요하면 선택하면 된다.

노이슈반스타인 성으로 걷는 중에 내려다 보이는 호엔슈방가우 성


어느새 눈 앞으로 노이슈반스타인 성이 성큼 다가왔다. 이 성이 '중세의 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기본 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임에도 노이슈반스타인은 중세 시대의 성 건축 양식을 계승하거나 본뜨지 않는 독창적인 성이다.

화약과 총, 대포가 군사력의 기본이 된 시기이므로 창, 칼의 시대에 맞는 성은 지을 필요가 없어 근대에는 일반적으로 성을 잘 건축하지 않았다.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그 자체로 독특한 판타지 성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노이슈반스타인 성으로 걸어가는 길


이윽고 우리는 보수 공사가 한창인 성의 정문에 도착했다.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지은 육중한 건물인 데다 석회암으로 건설된 외벽이 계곡의 비바람을 많이 견뎌야 하므로 건물과 지반의 안전성을 끊임없이 모니터링하고 성의 내외부를 보수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도 1년 내내 한쪽 끝에서 반대쪽까지 가면서 보수를 한다는데 노이슈반스타인 성의 관리도 만만찮을 것 같다.

비가 더욱 세차게 퍼붓는 가운데 우리는 정문 안의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나는 문득 입구의 전광판을 보고 나서야 티켓에 적힌 ‘439번 그룹’의 의미를 깨달았다.

노이슈반스타인 성 내부는 자유로운 관람이 불가능하고 내가 속한 그룹과 함께 가이드를 따라서 정해진 동선과 시간대로만 관람이 가능한데, 5분마다 그룹 번호가 불리면 그 그룹의 관람객들이 앞으로 모여 티켓을 제시하고 입장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유명 관광지임에도 성 주위가 비교적 한산한 이유는 이런 철저한 입장관리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해도 하루에 입장하는 인원이 6천 명에 이른다.

그룹별 입장 시간을 알려주는 입구의 전광판


한편, 내부 관람 시 동행하는 가이드는 별다른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입장할 때 나누어 준 오디오 가이드를 그때그때 틀어주는 사람이었다. 즉,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게 되면 인솔자는 오디오 가이드가 제 때 나오도록 관리하는 사람이며 정해진 시간(방마다 5분 남짓)이 되면 다음 방으로 관람객들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국어 가이드도 있어 편리하긴 하나, 설명이 끝나면 무조건 다음 방으로 이동해야 해서 벽화나 장식 등을 내가 원하는 속도로 충분히 감상하기는 어렵다.
성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가이드와 구석구석 서 있는 경비인이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있어서 감히 카메라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런 제약 사항들 때문에 내부를 원하는 만큼 감상하지 못한 아내가 다소 실망하여 성에 대한 작은 안내책(영문)을 구입했다.(아래 본문의 사진들은 우리가 구입한 책자 속의 사진들을 다시 촬영한 것들이다.)


노이슈반스타인 성과 바그너

성 내부에서 가장 인상 깊은 방은 왕좌의 방(Throne Room)이다. 루트비히 2세가 절대 왕정을 동경하며 자신의 왕좌를 세울 목적으로 만든 방이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따라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다. 900kg에 이르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낮게 드리워져 있고 모든 면이 화려한 금빛 문양과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왕좌의 방 : 왕좌 쪽에서 입구 방향을 본 모습


왕좌가 있어야 할 대리석 계단 위의 자리는 비어 있으나 뒷면에는 신과 왕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벽화가 보인다. 독일의 하인리히 2세, 프랑스의 루이 6세 등 시성 된 6명의 왕들이 예수 아래에 그려져 있다.

왕좌의 방 : 입구에서 왕좌 쪽을 본 모습


왕좌의 방 입구에는 백마를 타고 용을 무찌르는 익숙한 용사의 그림이 보인다. 기독교 성인 중 한 명인 성 조지에 대한 그림이다. 재미있는 점은 성 조지 앞의 산 위에 노이슈반스타인 성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다는 점.

그 성은 루트비히 2세가 4번째로 계획했던 팔켄스타인(Falkenstein) 성이라고 알려져 있다. 왕의 죽음으로 건설 작업은 착수되지 못했다.

왕좌의 방에 걸려있는 성 조지의 그림


붉은 비단 커튼이 인상적인 왕의 다이닝 룸은 13세기 독일 시인들이 왕을 노래하며 축제를 벌였다는 콘테스트 전설(Wartburg Contest)과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의 이야기로 장식되어 있다.

파르치팔(Parzifal)과 트리스탄의 전설 이야기를 노래했던 시인들의 그림이 문 위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음식을 요리하는 부엌이 무려 3개 층 아래에 있어서 완강기 같은 도구로 음식을 위로 실어 올렸다는 점이다.

왕의 다이닝 룸


싱글이며 외로웠을 루트비히 2세는 특히 침실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침대의 캐노피와 세수대 위에는 엄청난 크기의 오크나무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장신인 왕의 몸에 맞게 침대는 길이만 해도 2미터가 넘는 크기이며, 침대보와 의자에 사용된 네이비블루는 루트비히 2세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라고 한다.

벽화는 바그너의 오페라이자 전설인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한 이야기이다.

왕의 침실


왕의 거실은 루트비히 2세가 가장 심취했던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의 이야기를 메인으로 파르치팔,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의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거실에 놓인 반침 위에는 백조 모양의 화병이 있는데, 백조는 로엔그린을 통해 루트비히 2세가 가장 좋아하는 피조물로 이 성의 이름에 왜 백조가 들어있는지 알 수 있다.

왕의 거실


가수의 홀(Singer's Hall)은 루트비히 2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방으로 노이슈반스타인 성이 이 방을 중심으로 기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의 가수의 홀을 본땄지만 훨씬 더 화려하고 사치스럽다고 한다. 이 방 벽화들의 모티브는 대부분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치팔이다.

왕이 그렇게 신경을 썼던 방이지만 그의 생전에 이 방이 사용된 적은 없다. 이 방이 처음으로 용도에 맞게 사용된 것은 1933년 바그너의 사망 50주년을 맞아 열린 갈라 콘서트였다.

가수의 홀


오디오 가이드 투어가 끝나면 카페 등 휴게 공간이 있는 곳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 곳에는 야외 발코니가 있다. 왕좌의 방에도 발코니가 딸려 있지만 일반인의 출입이 불가능하다. 대신 왕좌의 방 위층에 있는 이 전망 좋은 발코니가 관람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

발코니에서는 왼쪽으로 산 위의 마리엔 다리부터 호엔슈방가우 성을 지나 오른쪽의 평야 지대까지 한눈에 들어와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노이슈반스타인 성에서 내려다 본 슈방가우의 평야
올라오면서 봤던 호엔슈방가우 성과 호수 전경


마리엔 다리에서 본 노이슈반스타인 성

외부에서 노이슈반스타인 성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뷰 포인트는 성의 뒤쪽 협곡 사이에 걸린 마리엔 다리이다. 이 다리는 원래 루트비히 2세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언 2세가 1845년에 호엔슈방가우 성을 조망하도록 아내를 위해 나무로 건설했다가 1866년에 루트비히 2세가 보수한 후 몇 번의 증개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노이슈반스타인 성에서 본 마리엔 다리


성 내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데 마침 비가 좀 잦아들고 있었다. 꼭 가봐야 할 곳이라며 가족을 마리엔 다리로 이끌었지만 아침부터 궂은 날씨에 걷느라 컨디션이 나빠진 여성 분들은 안 가겠다고 퇴짜를 놓는 바람에 아들만 데리고 길을 나섰다.


협곡의 다리는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5분만 걸어가면 나타난다. 다리의 골격은 철제 구조이나 상판은 나무로 되어 있다. 캐나다 밴쿠버 근교에 카필라노 서스펜션 다리(Capilano Suspension Bridge)라고 계곡 사이에 흔들리는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와 생김새가 닮았다.(그러나 흔들리지는 않는다.) 상판이 방부목이긴 하겠지만 수십 명의 사람이 올라가는 상황이라 약간 걱정은 되었다.


오전보다 날이 좋아져서 다리 위에서 아름다운 성의 옆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얼마나 절대적인 왕권을 동경했으면 저런 절벽 위에 웅장하면서 아름다운 성을 지을 생각을 했는지 루트비히 2세를 떠올리며 다리 위에 한참 서 있었다.

마리엔 다리에서 바라본 노이슈반스타인 성


셔틀을 타고 다시 매표소까지 내려오니 비가 잠시 그쳤다.

그제야 아들은 아침에 가고 싶어 했던 호숫가로 뛰어갔다. 물을 그렇게 좋아하는 친구인데 관람 시간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여행에서 참고 따라줘서 고마웠다.


호숫가에서 놀고 있는 백조들을 보고 있자니 노이슈반스타인, ‘새로운 백조의 돌’과 참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로만틱 가도 여행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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