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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재 Jul 02. 2022

다섯 번의 전학이 내게 준 능력

다섯 번의 전학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만 전학을 다섯 번 했다.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1학기, 4학년 2학기. 그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친의 정기 인사이동이 임박한 시점에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인사발령으로 다른 지역으로 1학년 때 전학을 했다. 2학년 때는, 부친이 승진 심사를 통한 정기 승진을 해서 직급에 맞는 빈자리에 임시로 배치를 받았다가, 3학년 때에 제대로 된 자리에 부임을 했기 때문에 두 번의 전학을 갔다. 4학년 1학기에 부친께서 상위 직급 승진 시험에 합격하여 갑자기 직급에 맞는 자리로 배정을 받았다가, 6개월 후에 원하던 자리로 이동을 하였다. 그래서, 4학년 때 두 번의 전학을 갔다. 그 후에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같은 곳에서 근무를 하셨던 것 같다.


전학과 적응 사이


1학년과 2학년 때의 기억은 없고, 나머지 세 번의 전학은 어떠했는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기억에 남아 있다면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다행히, 작은 읍면 소재지의 기관장으로 부임을 하신 부친의 뒷 배경 덕분에, '~장 아들'은 전학 온 아이에 대한 길들이기와 텃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를 때까지 미묘한 기싸움과 긴장감은 항상 존재했다.


구구단과 벌 청소


아이들 사이의 미묘한 탐색전을 잘 극복한다고 해도, 어린 초등학생이 극복하기 어려운 당혹스러운 상황이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난감한 것은 수업 진도가 다를 경우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구구단 외우기다. 이전 학교에는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하여 겨우 4단을 마치고 왔는데, 전학을 간 학교에서는 9단까지 이미 완료한 지 오래되었다. 모든 학생들이 선생님 앞에서 2단부터 9단까지 개별적으로 검사를 받는 과정도 끝나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적극적인 독려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외우지 못하는 몇 명이 있었다. 소위, 학습 부진아들은 매일 수업이 끝나기 전에 모든 학생들 앞에서 앞으로 불려 나가서 합격 불합격 판정을 받으며 학급 아이들의 조롱을 받고 있었다.


학습 부진의 다양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당시의 담임 선생님은,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 아이들은 '구구단을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독려와 꾸지람으로 성공적인 노력을 이끌어 내지 못하였으니, 반 아이들의 조롱을 받으면 부끄러워서라도 외우지 않겠느냐는 듯이 공개적으로 무안을 주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불합격'이라는 큰 소리로 판정을 할 때마다 아이들은 책상을 치고 웃었다. 실패한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담임 선생님께서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전학 첫날이라 같이 웃지도 못하고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나에게 물었다.


"너는 구구단 외울 줄 아나?"


첫 아이가 불려 나갈 때부터 걱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


전학 첫날이라 선생님께서 학생의 대답을 어느 수준까지 받아주시는지 파악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음..."


잠시 뜸을 들인 선생님께서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공평과 공정'을 어떤 조건에 상관하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셨을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준엄한 심판을 내렸다.


"할 수 없지. 너도 오늘 같이 벌 청소해라. 내일까지 외워서 오고."


억울했다.


"이전 학교에서 아직 배우지 않았다."
"배우지 않았는데 못 외웠다고 벌 청소를 하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건방지다고 더 혼을 내시면 어쩌나 겁이 났기 때문이다.


억울하였고 눈물이 났지만 참았다. 울면 끝장이니까.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서 바보 취급을 받는 몇 명의 아이들과 함께 벌 청소를 했다. 모두 말 한마디 없었다. 침울했다. 전학 첫날의 기억으로는 최악이었다.


한 해 세 번의 소풍


잦은 전학의 좋은 점은 한 해에 소풍을 세 번이나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전 학교에서 봄 소풍이나 가을 소풍을 갔는데, 전학을 가니 또 소풍을 가는 경우다. 맛있는 김밥도 먹고, 귀한 칠성 사이다도 한 병 마시고, 평소에 먹지 못하던 달콤한 과자도 맛볼 수 있는 공식 일정이 일 년에 한 번 더 생긴다는 것은 대단한 횡재였다. 물론, 이전 학교에서 비가 와서 소풍이 연기되어서 못 가고 전학을 갔더니 새 학교에서는 일정대로 이미 소풍을 다녀왔다면 한 번의 기회가 날아갈 위험도 있었다. 다행히, 나는 그 정도로 불운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발버둥 치다


나에게 전학은, 낯선 관심과 견제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주류에 편입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터득하는 특별한 훈련의 과정이었다. 견딜만했으니 견뎠겠지만, 당시에는 나름대로 상황을 이겨내려고 최선을 다해서 머리를 굴렸고, 두려움이나 당황스러운 감정을 추스른다고 어린 나이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용기를 내어야만 했다.


거친 아이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던 어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에 화장실 뒤에서 남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서 이런 질문도 받았다.


"너 싸움 잘해?"
(중간에 있는 아이를 가리키며) "너 이 얘한테 이길 수 있어?"


축구부가 강세였던 어떤 학교에서는,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구름같이 둘러싼 아이들 사이에서 페널티킥을 차도록 강요받았다.


울거나 회피하는 방식으로 쪼그라들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울지 않았다. 거칠게 저항하며 파문을 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주류 세력의 반감도 사지 않았다. 기억할 수 없지만, 그 어느 지점의 중간을 절묘하게 타고 넘었던 것 같다.


전학이 길러준 나의 능력


여러 번의 전학과 적응 과정을 겪은 덕분에, 성인이 되어서도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했다. 내성적인 성격을 타고났음에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사성이 밝고 사교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대해서 늘 신경 쓰고 살았다. 감추려고 해도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나의 능력은 드러나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사람들이 알아보게 되어 있다고 합리화하며 애써 자신을 감추려고 애쓰며 살았다. 나 자신을 죽이고, 적당히 어울려서 잘 살았다.


이제 더 이상 전학을 가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전학을 가지 않을 것이다. 세상과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며, 세상과는 적당히 어울려 살 것이다. 타인의 기준과 평가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꽃들은 아름답다'라고 외칠 것이다. 심지어, 지는 꽃까지도. 심지어, 피지 못한 꽃까지도. 꼭 피어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그냥 지금 그곳에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고 대단하다."


스스로에게 칭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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