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시각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재 Oct 24. 2022

죽어있으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집에 살던 들고양이에게

1.

코펜하겐의 한 아파트에 슈뢰딩거는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창에 드리워진 두꺼운 커튼 사이로 강한 햇살이 들어왔다.

슈뢰딩거는 강한 빛을 피하려고 신경질을 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몸이 앞으로 쏠리자 흔들의자가 앞으로 기울었다.

흔들의자 아래에서 졸고 있던 고양이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뛰어 오른 고양이는 옆에 있던 빈 종이 상자 속으로 빠져 버렸다.

그 장면을 보고 웃으면서 슈뢰딩거가 상자 속 고양이에게 물었다.

"살았니? 죽었니?"


2.

하늘색 리본을 머리에 묶은 여자 아이는 돌아 서서 눈을 감았다.

나머지 아이들은 재미와 긴장으로 볼이 빨개졌다.

넓게 그려진 원 밖으로 흩어졌다.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잠잔다"

"잠꾸러기!"

"살았니? 죽었니?"


3.

새롭게 이사한 우리 집 담장 너머 나무 아래에 똥을 싸던 들고양이가 있었다.

새롭게 집주인이 된 나는 나무 아래에 똥을 싸서는 안된다고 선언했다.

새롭게 집주인이 된 나의 새로운 규칙이었다.

오래전부터 들고양이는 나무 아래에 똥을 싸고 있었다.

새롭게 집주인이 된 나는 들고양이가 나무 아래에 똥을 싸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로 하였다.

들고양이는 우리 집 고양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4.

매일 밤마다 담장 너머 나무 아래에 들고양이는 똥을 싸고 갔다.

새롭게 집주인이 되어 새로운 규칙을 정한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매일 밤마다 담장 너머 나무 아래에 들고양이는 똥을 싸고 갔다.

담장 너머 나무 아래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났고 그래서 들고양이가 무척 미웠다.

새롭게 집주인이 된 나는 아침이면 달려 나가서 오물을 제거하고 고양이 퇴치제를 뿌렸다.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


5.

어느 날 언덕 아래에서 졸고 있던 들고양이를 보았다.

늙고 야위고 병들어 보였다.

불쌍했다.

나도 늙고 야위고 병들어갈 것이다.

너도 사는 것이 힘들구나. 


6.

들고양이는 늘 거리를 두고 우리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무심이'라고 이름을 불러 주었다.

무심이라 불리면서 들고양이의 동의와 상관없이 우리 집 고양이가 되었다.

무심이는 여전히 들판에서 지냈고, 여전히 담장 너머 나무 아래에 똥을 누었다.

하지만, 담장 너머 나무 아래에서는 더 이상 냄새가 나지 않았다.

이제는 들고양이가 무심이라는 우리 고양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7.

마당 구석에 먹이를 챙겨 주었을 때 몇 개월을 밤에 몰래 먹고 갔다.

언젠가부터 낮에도 조심스럽게 와서 먹고 갔다.

언젠가부터 우리 집 담장 위에 앉아서 졸았다.

언젠가부터 우리 집 마당 햇살 좋은 곳에서 졸았다.

어느 날 처음으로 울음소리를 내었다.

어느 날 마당 가운데 누워서 졸았다.

어느 날 서로 눈을 맞추었고 한참이나 마주 보고 있었다.

무심이는 주로 우리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들고양이의 신념을 포기하고 집고양이로 전향하지 않았다.


8.

어느 날 무심이가 처음으로 아침 일찍부터 나타났다.

미처 먹이를 채워두지 못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더 야위고 쇠약해진 무심이는 안전한 거리를 두고 앉아서 언제나처럼 지켜보았다.

그날은 떠나지 않고 담장 안 마당 나무 아래에서 하루 종일 뒹굴며 뒤척이고 있었다.


9.

무심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그날 무심이가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무심이가 다 먹지 못한 사료를 보관하고 있다.

그래서, 담장 너머 나무 아래를 볼 때마다 혼잣말을 한다.

"살았니? 죽었니?"


10.

이것이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는

우리 집에 살던 들고양이 이야기다.

오래전에 알았지만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우리들의 오래된 인연들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바람의 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