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중순 서울의 기온을 살펴보자. 서울의 평균 기온은 최저 영하 6도에 최고 영상 3도 정도이다. 제법 손발이 시리고 몸이 저절로 움츠려 드는 날씨다. 청춘은 아프다는 책 제목을 표절하자면, 추우니까 겨울이다. 아니, 겨울이니까 춥나? 하여튼, 우리나라 겨울은 춥다. 따뜻하다고 해 보았자, 예년에 비해 또는 더 추운 날에 비해 덜 추울 뿐 우리에게 겨울은 춥다.
그래서 박완서 작가의 소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제목만으로 충분히 호기심을 느낄만하다. 추운 것이 당연한 겨울인데 그해 겨울은 왜 따뜻했을까?
만약에 소설이 포르투갈 최남단 알가브(Algarve)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제목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라고 했다면 제목이 그렇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왜냐? 겨울이 그리 춥지 않기 때문이다. 그 해뿐만 아니라 그 전해도 그랬고, 앞으로도 쭈욱 겨울은 따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은 정말 따뜻했을까?
다음은 알가브 어느 동네의 12월 중순 한 주일 간의 기상 정보이다. 말로만 따뜻하다고 하는 것보다 쉽게 믿어질 것 같아서 검색 화면을 캡처하였다.
최저 기온은 영상 10도 내외에 최고 기온이 영상 17도 내외이다. 한 겨울인 12월에 이렇게 비현실적인 날씨가 있나? 우리나라에 편향된 계절에 대한 정보와 지식, 그리고 제법 많은 겨울을 지내 오면서 누적해온 경험에 기초한 나의 몸과 머리로는 겨울에 대한 이해가 믹스기로 갈아버린 과일 주스처럼 대충 짐작은 가나 구체적인 확인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다.
남반구와 북반구는 계절이 반대다는 상식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북반구에 위치하고, 서울과 비슷한 북위 37도에 위치한 포르투갈 알가브 지역에서 맞이하는 겨울은 상당히 혼란스럽다. 좌측통행을 하는 국가에서 운전하는 것 같이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의 개념의 충돌과 실천의 혼란은 아니어도 내가 믿고 살아온 것에 대한 작은 균열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까?
계절 개념의 혼란 1 - 풀이 갈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하고 성장을 시작하는 계절은? 정답, 겨울
가을부터 갈색으로 변하고, 겨울이면 가혹한 생존을 위해 죽은 듯이 움츠려 있는 한국의 풀과 나무. 알가브에서는 겨울이 오면 나무와 풀들이 오히려 싱싱한 초록색 잎을 피워내고 성장한다. 물론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여 마른 잎을 떨구는 녀석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녀석들은 분명히 나와 동일한계절 감각을 지니고,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고 살아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타향에서도 한국식을 고집하며 살아가는 나처럼. )
아래 그래프는 알가브 지역의 연중 평균 기온과 일조량이다. 적색 실선이 평균 기온의 변화를 나타내는데, '심하게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온 덕택에 연중 기온의 편차가 심하지 않다. 노란색은 일조량이다. 지중해성 기후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포르투갈은 유럽 국가들 중 가장 온화한 기후를 갖는 나라 중 하나로, 알가브는 겨울에도 온도가 0 °C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며, 대개의 경우 5 °C 정도에서 머문다.
계절 개념의 혼란 2 - 풀이 갈색으로 변하고 성장을 멈추는 계절은? 정답, 여름
우리나라의 여름은 찌는듯한 무더위와 함께 엄청난 생명의 힘으로 성장하는 들풀들이 온통 산과 들판을 뒤덮는다. 인적이 드문 곳은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들풀들이 삽시간에 무섭게 자라는 여름은 성장의 최고 정점에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들풀들이 갈색으로 변해갈 때, 알가브의 들풀들이 초록으로 성장을 시작하듯이, 우리나라 들풀들이 미친 듯이 성장을 거듭할 때 알가브의 들풀들은 메마른 더위 속에서 숨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다. 자연은 공평하다. 물론 일 년 내내 성장하는 밀림도 있고, 몸집을 줄이고 낮추어야만 생존이 가능한 툰드라도 있지만.
알가브의 여름 들판
알가브의 여름이 여름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 혼란을 주는 이유는 건조하고 높은 기온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구름 한 점 없이'라는 표현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문학적인 서술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날들이 7월, 8월, 9월까지 계속된다. 소위 '비올 확률 0%'로 기록되는 날들이 3개월 연속으로.
아래 도표는 적색 실선이 최고 기온을, 청색 막대는 월별로 비가 온 일수를 나타낸다. 기온이 높고 몇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여름이 알가브의 풀들에게는 가장 가혹한 시절이 되겠다. 타는 목마름으로 노랗게 말라서 비 오는 겨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래 우리나라 강수량과 기온의 연중 변화표를 비교해 보시라. 적색 실선이 최고 기온, 청색 막대가 월별 강수량 되시겠다. 온도의 추이는 비슷한 형태이나 강수량이 우리나라와는 정반대다.
그래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동차가 오른쪽 차선으로 주행을 한다. 누군가가 좌측 차선으로 자신의 자동차를 몰아간다면, 자살행위 내지는 유명한 김여사 둘 중 하나다. 그래서, 우측 차선 유지는 생명과 같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는 절대적인 선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자동차가 왼쪽 차선으로 주행을 하는 나라에 도착하였을 때, 생명처럼 여겼던 오른쪽 차선을 포기하고 자살행위와 같았던 왼쪽 차선으로 주행하도록 강요받았다. '에이 씨... 왜 왼쪽으로 가야 하는 거야?' '대부분의 나라에서 오른쪽 차선으로 주행을 하니, 나는 세계의 보편적인 질서 개념에 따라서 오른쪽으로 주행하겠다'는 요런 호기를 부릴 수도 없이 죽기를 각오하였던 왼쪽 차선으로 운전을 하였다. 그런데, 죽지도 않았고, 남을 해치지도 않았다. 나의 지조 없음과 상황 적응력에 박수를 보낸다. 그렇게 오랫동안 왼쪽 차선으로 주행을 하다가 다시 오른쪽 차선으로 주행하는 나라로 왔다.
내가 진리와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제한적이고 얼마나 작은 한계 속에 있을까 두렵고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내가 몸을 담그고 있는 우물이 너무 깊어서 뛰어서 빠져나갈 수는 없지만, 간혹 용기를 내어 힘껏 뛰어올라서 잠시 본 우물 밖 그림자를 보고, 이 우물이 세상의 전부, 인식의 기준, 지식의 전체가 아님을 잊지 않고 살고 싶다.
풀이 자라고, 꽃을 피워내는 알가브의 겨울은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살아온 것과 조금씩 다른 생각과 세상이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생각에 거침이 없고, 인식에 벽이 없어지는 그 날에 '그래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한마디를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