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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재 Mar 03. 2023

아스팔트 킨트

아스팔트 킨트


아스팔트 킨트(ASPHALT KINT)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가 세상의 모든 지식과 소식이 마냥 신기했던 대학교 신입생 때였다. 아직 12시 통행금지가 살아있던 1980년대 초에는 오늘날과 같이 인터넷으로 검색 가능한 정보화 시대는 SF 영화에서 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군부 독재 정권이 시대에 알맞은 이념과 사상의 틀을 자기 마음대로 정하고 사람들의 상상력 마저 서슬푸르게 검열을 하던 시대라, 음침한 시대의 벽을 뚫고 세상 밖 어디서 들려오는 소식과 용어와 개념에 목말라하던 시절이었다.


독일어에서 왔다는 '아스팔트 킨트'는 특히 '-팔트 킨트'로 이어지는 음성적 조합이 매력적이었다. 용어를 전해 준 선배에 의하면, 킨트(Kint)는 독일어로 '아이'라는 뜻으로 '아스팔트의 아이'로 번역이 될 수 있으며,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채워진 도시에서 성장하여 자연의 흙을 밟아보지 못하고 자란 세대'를 일컫는다고 설명했다.



부러운 아스팔트 킨트


분명 '자연의 흙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자란 세대'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용어임에도 나에게는 오히려 '아스팔트 킨트'라는 말이 멋있게 느껴졌다. 나는 공무원이셨던 부친을 따라 어린 시절에 잠시 있었던 시골 생활과 나머지 대부분을 지방의 소도시에서 성장했다.


그 당시 지방의 작은 도시는 주변을 둘러싼 농촌 지역에 비해서 번화한 도시의 풍채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시내버스가 다니는 큰길은 아스팔트가 깔려 있기는 했지만 나머지 골목길은 모두 비포장으로 흙이 드러나 있었다. '시내'라고 불리는 도시의 중심부를 벗어나면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공터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난감하게도, 나는 도시에서 성장을 하기는 했지만 흙도 밟고 자랐다. 안타깝게도 '도시에서 자라며', 또, '흙도 밟아보지도 못하고 자란' 아스팔트 킨트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와, 도시가 얼마나 발전되고 멋지길래 어떻게 흙이 하나도 없을 수 있어?" 나에게 아스팔트 킨트는 마치 미래에서 온 아이들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아스팔트 킨트가 부러웠다.



결국은 아스팔트 킨트


1980년대 이후는 한국의 고도성장기였다. 이 시기에는 국내 산업화와 수출을 촉진하기 위한 개발 지향적인 정책들이 추진되었으며,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도시화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상업지구, 공장 등이 건설되면서 도시의 인프라와 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발 정책은 환경 파괴와 지역 발전의 불균형으로 이어졌다. 고속도로와 대형 아파트 단지 건설 등으로 인해 많은 숲과 녹지가 파괴되고, 대도시 지역에서는 대기 오염과 수질 오염이 심해지며 생활환경이 저하되었다.


결론적으로, 경제적 발전과 도시화를 추구하면서 많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로 인한 환경 파괴와 지역 발전의 불균형과 같은 문제도 발생하였다. 결국은 우리나라에도 '아스팔트 킨트', '아스팔트의 아이들'이 되고 말았다.


아스팔트 킨트의 기원


40년도 지난 옛날에 들었던 '아스팔트 킨트'라는 말의 근원을 40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추적해 보았다. 검색 결과가 주르르륵 쏟아질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아스팔트 킨트'와 'Asphalt Kint' 두 개의 검색어로 한국어와 다른 외국어를 왔다 갔다 해도 자료가 없었다. 근래에 출시된 같은 이름의 패션 브랜드가 있기는 했지만 찾고자 하는 정보는 아니었다. 기원이나 의미에 대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라? 나는 엄청난 이론적 배경을 가진 학술적인 용어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특정 지역이나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용어나 개념이 아니겠냐는 검색 결과를 접하고 보니 황당했다. 그렇다면, 그 특정 지역이나 문화권이 '한국'이란 말인가? 그런데, 왜 독일어이지?


그 해답은 전혜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수필가이자 번역가였던 '불꽃처럼 살다 간 여인' 전혜린의 책, 「홀로 걸어온 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년 출간)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아스팔트킨트 (아스팔트만 보고자란 도회의 고향 없는 아이들)라는 단어는 나에게도 쓰일 수 있는 명칭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독일 유학생이며 독일어 번역문학가였던 그녀였기에 '아스팔트 킨트(Asphalt Kint)'라는 독일어는 그리 낯설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가 사용한 '아스팔트 킨트'라는 명칭을 어디에서 인용한 것인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반쯤 아스팔트 킨트와 완전 아스팔트 킨트


나는 반쯤 아스팔트 킨트이고 아내는 완전 아스팔트 킨트이다. 나는 선친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초등학교 2학년에서 4학년에 이르는 3년의 기간 동안 시골에서 살았다. 그렇다고, 우리 논이나 밭이 있어서 농사를 지은 것도 아니고, 전통적인 시골집에서 산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규모와 생활환경이 좋았던 적산가옥인 관사에서 살았다.


하지만,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앞에는 강이 흘렀다. 전기는 제한적으로 초저녁에 잠시 들어왔다가 나갔다. 숙제도 거의 없었고, 간혹 숙제가 있기는 해도 하는 학생들이 드물었다. 선생님도 간혹 숙제를 하였는지 묻기는 했지만, 몹시 기분이 나쁜 어느 날을 제외하고는 숙제를 일일이 확인하고 혼내지 않으셨다.


아마 우체국과 면사무소가 있는 면 소재지 학교까지 한두 시간을 걸어서 오는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어디인지 가 보지는 못했지만 면 소재지인 우리 동네가 저녁 시간에 겨우 몇 시간 전기가 들어 올 정도면 그 아이들의 산골에는 분명히 전기가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먼 길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면 이미 어둡고, 마을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생님께서 분명히 알고 계셨을 것이다.


숙제 검사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도 한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다들 공부라고는 안 했다. 사실, 공부할 방법도 모르고 공부할 거리도 없었다. 나는 시내에 출장을 가신 선친께서 매 학기 초에 '표준전과'와 '동아수련장'을 사다 주셨기 때문에 숙제하기가 나름대로 쉬웠다. 연습 문제의 답을 전과를 보고 베끼면 되니까. 그까짓 거 고민하며 풀 필요도 없었다. 대충 베껴가도 숙제를 해 온 열명 안에는 드니까. 선생님께서도 책에 답이 적혀 있는지 쓰윽 확인만 하고 가셨으니까.


간혹 무언가에 스트레스를 받으신 선생님께서 숙제 검사를 일일이 하기 시작하고,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들을 벌하기 시작면 우리 집은 인기가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우리 집에 우르르 몰려와서 엉덩이를 추켜올리고 전과를 가운데 놓고 방바닥에 엎드려서 답만 최대한 빠른 속도로 베꼈다. 순식간에 숙제를 해 치우고는 모두 들로 산으로 강으로 달려 나갔다.


대부분 몰려 다니며 해질녘까지 놀았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저녁때가 되어서 아이들을 찾으러 나온 엄마들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놀라서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곤 했다.


나는 반쯤 아스팔트 킨트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짧았던 3년의 시골 생활이 크게는 연도별로 짧게는 계절별로 아직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후에 성장한 아스팔트 깔린 도시에서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학창 시절의 몇 개의 사건으로만 기억될 뿐 도시와 생활환경에 대한 추억이 없다. 대부분이 아스팔트 위에서의 삶이었지만, 자연 속에 있었던 유년 시절의 추억을 지니고 있으니 스스로를 '반쯤 아스팔트 킨트'라고 부르고 싶다.



쌀나무


아내는 그야말로 완전한 아스팔트 킨트이다. 장인께서 도시를 기반으로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아내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성장을 했다. 현대식 주택을 지어 딸을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그 흔한 시골 외가도 없이 외가마저 같은 도시였다. 그래서 방학이나 명절이라도 시골 외가에 갈 기회가 없었다. 도시 학교의 여학생이 수해복구 지원을 위해서 태풍으로 쓰러진 벼를 세우러 갈 일도 없고 해서 농촌에 간 적도 없고 그래서 논에서 자라는 벼를 실물로 본 적도 없었다.


1970년대 어느 날 시골, 골목길이 굽어서 옴팡지고 햇살이 좋은 곳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담장에 붙어 서서 햇살을 쬐며 장난을 치고 낄낄거리고 있었다.


"야, 도시 애들은 쌀이 '쌀나무'에서 나온다고 한데."
"뭐? 쌀나무? 하하하하하하."

눈앞에 보이는 것이 논이고 그 논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것이 벼인데, 어찌 당연한 그런 것도 모를 수 있냐며 우리 촌놈들은 우쭐대며 깔깔거렸다.


결혼 후에 아내가 시골에 가서 논에서 자라는 벼를 가리키며 무엇인지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쌀나무. 하하하"
"진짜야?"
"진짜지. 내가 왜 거짓말을 해."


정말 도시 애들은 몰랐다. 사실이었다.


철옹성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우리 부부도 도시에서 방범창과 방충망으로 둘러싸인 빈틈없이 깨끗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완전 무장을 한 방역 업체 직원이 아파트 구석구석에 독한 약을 뿌려대며 정기적으로 완벽하게 방충 소독작업을 했다. 바퀴벌레라도 한 마리가 나온다면 다음 달 반상회 주제가 될 지경이었다. 인간을 제외한 어떤 생명체도 허락이 되지 않은 철옹성을 구축하며 살았다. 벌레를 잡는다고 독한 화학 약품을 세상에 뿌려대며. 아이들이 모기에 물려 아주 작은 표시만 나도 약을 바르고 야단을 떨며 살았다.


덕분에 아이들은 벌레와 곤충을 포함하여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완전한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벌레에 물리거나 상처 한 번 없이 키웠다고 부모로서 자랑스러워하며 살았다. 근대화와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 몸을 담그고 생존해 온 우리 시대의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이며 최선의 환경과 방법이라 생각했다.


간혹 철통 같은 보안을 뚫고 들어 온 녀석들 때문에 소동이 일기는 했지만, 우리는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구획하고 방어하고 대비하며 더럽고 건강에 위협이 될 자연을 철저히 차단하면서 살았다.


https://brunch.co.kr/@algarve/87



어쩌다 텃밭


외국에 살게 되면서 한국식 아파트에 살기가 어려워졌다. 고층건물로 지어진 아파트 형태의 주거지는, 아주 호화스러운 고급 주택이거나, 아니면, 보통 시청에서 무주택자나 사회 취약 계층을 위한 주거지였다. 그래서, 주거 환경이 나빴다. 특히, 아이들을 키우기에는 여러 가지 꺼려지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일반 주택에 살게 되었는데, 대개 도로에서 진입하는 쪽으로 작은 앞 가든과 집 뒤에 큰 뒷 가든이 있었다.


은퇴한 노부부로 이루어진 이웃들이 프로 축구 구장처럼 잔디를 관리하고 부지런하게 가드닝을 하는 것에 비해서 우리 뒷 가든은 방치 상태였다. 나에게 잔디를 깎고 담장을 깎는 것은 퇴근 후에도 해야하는 잔업같은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동네 할아버지들이 넘겨다 보고 안타까운 듯이 고개를 흔들지 않을 수준으로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한 해에 한국에서 모친이 다녀 가시고, 한 해에 장모님이 다녀 가시면서 거실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먼 거리만큼 관심이 없었던 뒷 정원의 끝 부분 1/5 정도를 정리하여 한국 채소의 씨를 뿌리고 가셨다. 기억하기로, 상추, 쑥갓, 아욱, 열무, 들깨와 같은 잎채소와 쌈 채소였다.


평생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신 분들이라 소일거리로 하신다고 생각하고 보고만 있었는데, 떠나시고 난 뒤에 파릇파릇하게 싹이 올라오고 자라는 것이 신기했다. 오랜만에 한국 상추를 바로 뜯어서 쌈장에 올려서 먹는 맛은 환상적이었다. 한국에서는 먹어 보지도 못했던 아욱 된장국의 구수한 맛은 최고였다. 그렇게, 채소를 키우는 것에 재미가 생겼다. 그렇다고 영농기술을 따로 습득한 것이 아니다. 그냥 줄지어 뿌려 놓고 먹을 수 있는 크기로 자랄 때까지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자라는 놈은 자라고 죽는 놈은 죽고.



엄마야~~~


두 분 어르신은 잔디가 없이 땅이 드러난 부분이 있으면 모든 곳을 정리하여 씨를 뿌려서 채소가 자라났지만 아내는 먹기를 꺼려했다. 달팽이가 와서 식사를 한 부분도 있지만, 상처를 입지 않은 채소마저도 달팽이가 스쳐가거나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구역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몸서리를 쳤다.


그래서, 목재를 구입하여 긴 직사각형의 텃밭 상자를 몇 개 만들어서 식용과 자연의 경계를 만들었다. 겨우 몇 밀리미터 두께의 차이로 구별된 상자 안에서 자란 채소는 아내가 식용으로 인정하고 안심했다.


문제는 토양이 좋아서 지렁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진동으로 위험을 감지하는 지렁이는 텃밭 상자 주변을 오가는 우리 발걸음을 듣고, 채소를 뜯는 과정에 발생하는 진동을 느껴서 밟지 않아도 꿈틀거리기 마련이다. 아내가 천진난만하게 식사에 먹을 상추 잎을 가위로 자르다가 타이밍을 잘 못 맞춘 지렁이가 꿈틀 거리는 순간이 오면 그것으로 끝이다.


"엄마야~~~"


그 길로 아내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집안으로 달려가버린다. 그리고는, 사흘 정도는 나오지 않았다.



자연과 친해지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더라."라고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가 있다. 자연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몰라서, 사귀어 보지 않아서 막연히 두렵고 무서울 뿐이다. 도시 아파트와 똑같이 콘크리트와 타일과 이중창과 방충망으로 잘 방어된 집에 살지만, 산동네에서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추적과 추측이 불가능하게 개미나 작은 벌레들이 집 안으로 들어온다.


여전히 완전 아스팔트 킨트인 아내는 처음에는 무조건 "엄마야"를 외쳤지만, 지금은 담담하게 나에게 외적의 침입을 알리거나, 어쩔 수 없을 때는 파리채를 들어서 대적하기도 한다. 이상하게 생겨서 무서운 개미란 놈도 나가라는 설득이 통하지는 않지만 생명에 위협적인 존재는 아님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렇게 자연과 조금 친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막연한 두려움과 오해가 조금 풀렸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임을 인정하고, 다른 자연의 구성원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기로 했다. 심리적 경계와 벽을 허물고 조금만 더 다가가 보기로 한다. 어쩔 수 없이 아스팔트 킨트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이라도 자연을 이해하고 교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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