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재 Oct 05. 2023

으악, 전갈이다

꿈꾸는 자연 친화적인 삶


내가 꿈꾸는 자연 친화적인 삶은,



창문 너머로 이런 풍경이 펼쳐지고



정원에는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고

 


텃밭에서 유기농 채소들을 키워가며



자연 속에서 다른 생명들과 조화를 이루며



멋진 석양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영화나 사진이나 그림 같은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었다.


꿈깨라 자연 친화적인 삶


'꿈깨라'를 예증하기 위해서는 이런 공지가 필요할 듯하다.

(다소 혐오스러운 사진이 있으니 노약자나 임산부나 심신미약자는 주의를 요합니다.)


산동네로 이사를 온 다음날 아침에 마주한 것이 흥분한 듯이 더듬이를 흔들어대며 거실 바닥에 돌아다니고 있는 개미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읽어 본 것과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본 개미가 전부인 나는 개미에게 어떻게 설득해서 집 밖으로 나가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발로 쿵쾅거려 보고 "야, 나가!" 이렇게 고함을 질러 보았지만 개미의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질 뿐 도통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파리채를 찾아서 밖으로 유도를 하려고 슬쩍 건드렸더니,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검은색 페라리처럼 무한질주를 해서 소파 아래로 쏙 들어가 버렸다. 밖으로 내 보내려던 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집 안 깊숙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개미 한 마리 때문에 소파를 옮기기가 귀찮아서 모른 척하기로 했다. 개미 한 마리 때문에 크게 피해를 입을 것 같지가 않아서 이기도 했다.


다만, 남편의 로망에 억지로 산동네로 끌려 온 100% 아스팔트 킨트인 아내가 우연히 더듬이를 흔들며 배회하고 있는 도망자 개미와 조우를 하게 된다면 비명 소리와 함께 약간 소란스러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기는 했다. 처음 본 사람들에게 개미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모습을 가진 생명체가 아니겠는가? 아내는 오래전에 본 영화 '쥐라기 공원'을 떠올리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자연?


자연친화적인 전원 속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 속에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서로 싸우고 죽이며 살아가야 하는 팍팍한 도시를 떠나 평화스러운 자연 속에서 살고 싶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간의 편리함을 극대화시킨 도시에 끼여 살다 보면 자연스럽거나 부자연스럽거나 실제로 죽음을 대면하고 목격하는 일은 드물다. 철저한 방역 덕분으로 도심 아파트에서는 죽은 곤충을 보기도 쉽지 않다. 간혹 뉴스에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 사고가 나오기는 해도, 속이 풀리는 뜨끈한 곰탕에 잘 익은 깍두기를 한 점 올려서 크게 한 숟갈 입 속으로 밀어 넣으며 감정이입 없이 보고 듣는 나와는 상관없는 먼 타인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의 피 터지는 경쟁을 피하고 평화 그 자체인 아름다운 자연 속으로 왔는데,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이고, 이미 죽은 생명체를 뒤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수없이 노출된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보다 더 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더 자주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생명'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기회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죽여야 하거나 주검을 처리하는 일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준다.


교전 규칙


집 안에서 마주치는 작은 생명체들은, 도보로 걸어서 들어오는 개미와 다양한 곤충들도 있고, 비행이라는 최첨단 기술로 날아서 들어오는 날벌레들로 다양하다. 구석에 거미줄을 치고 한 살림 거나하게 차리는 느릿느릿한 거미가 있는 반면, 벽이나 천장을 기어 다니며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때로는 풀쩍 뛰기도 하는 거미들도 있다.



이 놈들도 인상이 고약하여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좋다. 상대에게 겁을 주고 그래서 자신이 더 안전해지려고 나름대로 위협적인 풍채를 뽐내는 것인데, 그 녀석의 의도대로 나에게 위협적이고 혐오스러워서 오히려 파리채를 찾게 만든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파리채를 손에 들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집안 구석구석 순찰을 도는 일이다. 아내가 눈을 뜨기 전에 침입자들을 처단하고 흔적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더 이상 못살겠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아내를 보호하고, 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침입자를 색출하는 정당한 자위권의 발동이지만 아침마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두드려 잡는 행위는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도시에서 보다 더 많은 생명체를 죽이고 해치는 행위를 하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나름대로의 교전규칙이 필요했다.


상대에 대한 분석: 대부분 '즉각적인 퇴거 조치'를 위한 대화나 설득이 불가능하다.

보편 규칙: 자연 속에서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철저하게 자기 영역을 방어하고 침입자에 대해서 응징한다. 따라서, 나도 나의 영역(집안)에 들어온 침입자에 대해서 자연의 보편적 규칙을 따른다.


교전규칙 1. 움직임이 느린 생명체의 경우 가능한 쓸어 담아서 영토 밖으로 추방한다.

교전규칙 2. 움직임이 빠른 생명체의 경우 즉시 사살한다.


익숙해졌지만


이제는 아내도 남극 대륙을 횡단하는 아문센처럼 광활한 거실을 질주하고 있는 개미를 보면 "야, 나가"라며 빗자루로 쓸어서 밖으로 내보내는 수준이 되었다. 나는 불빛과 본능에 이끌려 우연히 들어왔다가 인간들이 거주하는 척박한 콘크리트 공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사망한 벌레들을 손으로 집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수준이 되었다.


지중해성 기후


포르투갈 알가르브에서는, 아이유가 '에잇(Eight)'에서 노래한 대로, 그야말로 "오렌지 태양 아래"에서 일 년 내내 강열한 태양과 온화한 기후를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이런 것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인간의 손이 닫지 않는 구석구석 외진 곳을 돌아다니며 거미나 곤충을 잡아먹고 인간에게는 해로울 것이 없다'는 도마뱀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봐도 쫓지 않고 그냥 모른 척 지나가지만, 조상 대대로 DNA를 통해서 물려받은 방어기제가 작동되어 무언가 움직이면 일단 나의 몸이 움찔하고 본다는 것이다. "아이 C, 놀랐잖아."라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도마뱀에게 투덜대지만, 대상이 무엇인지 파악되기 전에 움찔하는 몇 초간은 몸이 경직되고 신경이 곤두서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밤 중에 무슨 이유였는지 왔다가 빠져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요런 위험한 생명체를 보고 나면 "야, 밤에는 절대로 밖에 안 나와야지. 아이고, 무서버라." 이런 다짐을 하게 된다.



좋은 자연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 온 놀라운 크기의 벌레를 보고 나면, 당장에 슈퍼로 달려가서 실리콘을 구입하고, 바늘구멍만 한 창틀이나 문틀의 작은 구멍도 기를 쓰고 막게 된다.


급기야



급기야 전갈을 부엌에서 마주쳤다. 동물의 왕국에서나 봤던 그 전갈을. 독이 있는 꼬리를 높이 들고 위협을 하고, 때로는 맹독에 생명을 잃는다는 무서운 그 전갈 말이다. "우리 동네에 전갈도 있어?" 사막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충격적이다.


한 밤중에 부엌으로 내려와서 불을 켰더니 어둠 속에서 돌아다니던 전갈이 놀라서 싱크대 아래로 돌아가려다 아차 늦었다 싶었는지 중간에서 얼음땡을 시연하며 모르는 척 없는 척하고 있었다. 사진은 나의 파리채 공격에 한 방 얻어맞고 실신 상태다. 대부분의 곤충이 그러하듯 전갈도 골격이 무척 연약했다. 이런 것에 겁을 먹었나 싶을 경우가 대부분이다. 잘못 학습되고 과장된 공포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늘 깨닫는다.


부엌에서 전갈이 발견된 이유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일단 포르투갈 알가르브 지역은 여름 건기 동안은 4-5개월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다. 한국에서나 다른 나라에서는 하늘과 구름은 한 세트로 늘 하늘에 구름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몇 개월 동안 볼 수 있다.


전지적 전갈시점


비가 내리지 않은 기간이 오래되니 대부분의 하수구가 바짝 말라 있을 것이다.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구멍이 있으면 대부분 어떤 생명체든 집으로 삼고 서식을 한다. 건조한 하수구는 많은 생명체에게 넓고 편안한 최신식 고급 아파트가 되었을 것이다. 호기심이 많든, 더 좋은 장소를 찾든 전갈 한 마리가 하수구를 타고 긴 여정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좌로 틀고 우로 틀고 미로처럼 엮인 배수관을 타고 올라와서 급기야 어느 집 부엌에 떨어졌을 것이다. 싱크대 아래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른다. 밤에 몰래 나와서 음식 쓰레기를 뒤집어 보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그날 밤은 재수가 없었다. 절대로 내려오지 않는 한 밤중에 그 집에 서식하고 있었던 한 인간이 불쑥 나타난 것이었다.


자연친화적인 삶의 숙명


싱크대 아래를 뒤져서 느슨하게 틈이 있었던 파이프 연결 부분을 모두 틀어막았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화장실을 포함해서 집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든 파이프 연결 부위를 확인하고 어떠한 생명체도 절대로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단속했다.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부엌에 갈 때면 바닥부터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두려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고, 겁이 많아서 살아남았던 우리 조상님의 DNA가 나의 몸에서 여전히 민감하게 작동을 하고 있다. "그렇게 스트레스받아서 어떻게 사나?" 싶을 것이다. 아니다. 덕분에 작은 움직임을 포착하는 시력이 좋아졌다. 덕분에 바스락거리는 아주 작은 소리도 듣게 되었다. 덕분에 옆집에서 준비하는 요리 재료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후각이 예민해졌다. 자연 속에서는 모든 생명체들이 이렇게 예민한 감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럼, 도시의 지나친 자극에 무뎌진 나의 감각이 조금은 더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워'진 것일까?




https://brunch.co.kr/@algarve/305


매거진의 이전글 아스팔트 킨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