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한(恨)을 느낄 수 있다면 이해할 수 있으리
소설가 강준은 2017년에 발간한 장편 추리소설을 '사우다드'로 이름 짓고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포르투갈어라고 설명했다. 어느 영어권 작가는 '사우다드는 번역할 적절한 영어 단어를 찾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했다.
사우다드의 의미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문화와 영혼에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는 '사우다드는 포르투갈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포르투갈 사람들이 그것(사우다드)을 갖고 있으며, 그것(사우다드의 개념)을 표현하는 단어(사우다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한(恨)으로 설명하자면, '한(恨)은 한국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은 한(恨)을 갖고 있으며, 그 한(恨)을 표현할 수 있는 한(恨)이라는 단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쯤 되겠다.
자, 그럼 사우다드가 가진 복잡 미묘함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내가 사우다드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는 마치 짬짜면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내려보고 있는 서양문화권에서 온 관광객 같았다. 한국에 가면 꼭 먹어보아야 할 음식으로 한국 친구가 추천을 해 주어서 당연한 듯이 주문을 하였지만, 막상 받아 들고 보니 스파게티와 같은 면이기는 한데, 반은 난생처음 보는 검은색 양념이 뒤덮여 있고, 나머지 반은 익숙하지 않은 매운 국물이 위협적인 이해하기 어려운 음식이다. 그래도 꼭 먹어보아야 할 한국 음식이라니 이쪽저쪽을 오가며 맛을 본다.
포르투갈어 어원사전에 따르면, 사우다드(saudade)는 '고독'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solitate(m)'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고독을 뜻하는 영어 단어 'solitude'가 조금 더 원형에 가깝다. 하지만, 사우다드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정서와 역사와 문화가 덧입혀지며 '고독'이라는 한 단어로 치환되지 않는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우다드에 대해서 향수(추억), 그리움, 외로움 등의 유사한 단어를 나열할 수 있으나 이런 단어들로도 완전히 치환되지 않는다. 모두를 섞어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런 유사한 어휘들의 짬짜면이나 모둠 요리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럼 짬짜면식으로 이 쪽 저 쪽을 오가며 사우다드가 가진 맛을 음미해 보기로 하자.
사우다드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러나, 과거의 장소나 시간에 존재했던 행복에 대한 감성적인 그리움을 뜻하는 노스탤지어와는 다르다. 사우다드는 과거 지향적인 향수의 의미와 이전에 결코 일어나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한 동경을 포함한다. 그래서, 사우다드를 '부재의 존재'라는 다소 철학적 용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그리움이 그리워하는 대상에 영영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구슬프고 가슴 아프다.
사우다드는 '우울한 그리움이나 바램'으로, 포르투갈 문학에서 '외로움과 불완전한 느낌'의 주제로 표현되기도 한다. 포르투갈의 작가 오브리 벨(Aubrey Bell)은 그의 책 In Portugal(1912)에서, "사우다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거나, 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막연하고 끝없는 갈구'라고도 했다. 사우다드는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느끼는 공허함이자 그리움 같은 것이다. 우리 안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을 마음의 불꽃이다. 우리의 기억을 일깨우고, 동시에,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우울한 느낌이기도 하다.
사우다드는 현재와 미래에 투사되는 과거이기도 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이나 무언가에 대한 열망은 아마도 과거에만 남아있을 것이다. 슬픔과 애정이 섞인 짬짜면 같은 현재의 그 오묘한 감정. 그런데 우리가 희망을 갖고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달콤 씁쓸한 맛이다. 어느 햇살 좋은 날 포르투갈의 한 노천카페에 앉아서,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작은 잔에 담긴 찐한 포르투갈 커피에 당혹스러울 정도로 큰 설탕 봉지를 탈탈 털어 넣고 입안에서 굴리면 포르투갈 사람들이 좋아하는 '달콤 씁쓸함'을 체득할 수 있으리라. 사우다드는 이 그리움과 슬픔을 표현하는 신비한 단어이며 모든 것을 포함한다.
브라질의 영화감독이며 작가인 미구엘 팔라벨라 (Miguel Falabella)의 시를 보면 사우다드가 가진 의미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고 어떤 의미를 형성할 수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멀리 떨어져 사는 형제에 대한 사우다드.
어린 시절에 본 폭포에 대한 사우다드.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어떤 과일의 맛에 대한 사우다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사우다드.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 친구에 대한 사우다드.
미지의 한 도시에 대한 사우다드.
용서되지 않는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보는 우리 자신에 대한 사우다드.
이 모든 사우다드는 아프다.
그러나 가장 아픈 사우다드는 바로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에 대한 것이다.
그들의 피부, 그들의 냄새, 그들과의 키스. 그들의 존재와, 그리고 이제 어쩔 수 없는 그들의 부재까지.”
- 미구엘 팔라벨라 (Miguel Falabella)
사우다드의 개념과 표현 방식에 대해 많은 수의 논문이 있을 정도니 우리의 짬짜면식 이해는 여기까지 하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소화도 되지 않는데 억지로 먹는 폭식은 건강에 좋지 않으니. 다행인 것은, 우리도 한(恨)이라는 말처럼 영화 아바타의 '영혼의 나무'처럼 우리의 삶과 영혼이 결합된 단어가 있기에 그 의미는 다르지만 사우다드가 어떤 형태의 개념인지는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에게 전해주고 싶다. '한국 사람도 사우다드를 느낄 수 있다'라고.
포르투갈은 수많은 시인과 몽상가들의 나라이다. 꿈꾸는 자들은 그들의 높은 이상과 눈앞에 있는 현실과의 괴리와 차이에 실망한다. 이러한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 지속적인 결핍의 느낌이 포르투갈 사람들의 삶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사우다드에는 꽉 찬 느낌보다 공허함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이런 포르투갈인들의 감정은 라틴어 운명(fatum)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포르투갈의 대표 음악 파두(Fado)에서 잘 느낄 수 있다. 파두는 노래가 된 사우다드다.
https://www.youtube.com/watch?v=iVM5-QII2Pw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ÁLIA RODRIGUES)가 파두의 전설이기는 하나, 위 링크에 있는 지젤라 조앙(Gisela João)이 나에게는 듣기가 쉽다. "O FADO DA SAUDADE(사우다드의 노래)" )
파두는 어떠한 것도 소재가 될 수 있는 간단한 형식의 노래인데, 애절한 곡과 종종 바다 또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가사를 이루고 있다. 특히, 체념, 숙명, 슬픔의 요소가 두드러진다. 파두에 나타나는 사우다드의 의미 속에는 대부분 ‘가족’이 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떠나 가 있는 가족이 느끼는 ‘향수’가 사우다드의 핵심이다.
한 때 찬란한 포르투갈의 역사가 되었던 대항해 시대 이야기를 하다 보면, 후대에 '대항해 시대'라고 거창하게 불렸지만, 당시에는 죽음이 기다리는 거친 바다를 향해 나아가야 했던 포르투갈 사람들의 삶에는 복잡한 시대적 배경과 개인의 욕망들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그런 시대와 삶이 던져주는 대의와 명분과는 상관없이, 그들이 떠나기 전에 서서 바라보았던 두려운 그 바닷가에서, 그들이 떠나고 난 뒤에 똑같은 자리에 서서 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던 부모와 아내와 자식과 연인들의 그리움과 서글픈 소망을, 그 바닷가에 서면 당신도 느낄 수 있으리라.
어떤 선원은 처자식을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겠다는 책임감으로 무역선에 올랐을 것이다. 어떤 군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으로 전함에 올랐을 것이다. 떠나려는 바다 너머에는 세상의 끝이 있고, 그 끝을 넘어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바다로 떠났다. 절박하고 절실하게.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들. 전쟁터에서 죽고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에게 먹히고. 돌아오지 않는 연인, 아버지, 아들과 남편을 기다리며 바닷가에서 통곡하는 여인들의 한이 사우다드다. 이 사우다드는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 간절함, 기대, 슬픔, 우울, 부재의 느낌 그리고 함께 했던 행복한 추억을 동시에 느끼는 복잡 미묘한 느낌이다. 옛날의 행복했던 추억을 회상함과 동시에 앞으로 함께 더 좋은 추억을 만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슬픈 예감. 떠난 이들이 느낀 가족과 고국 포르투갈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것이 사우다드이다. 때로는 특정한 대상이 없고, 결코 성취되거나 도달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그리움도 사우다드이다.
나는 오늘 그때 그 뱃사람들이 떠났던 바닷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주 적은 수의 사람만이 살아서 돌아왔고 역사가 되고 영웅으로 남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오늘날 '대항해 시대'로 기록된 장엄한 이야기에는 역사가 된 영웅들의 모험담이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도시의 광장에 기념비나 동상으로 서있고, 어느 도시의 이름으로, 어느 도로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영웅들의 이야기에 가려진, 이름 없는 뱃사람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흔적 없는 슬픈 영혼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우다드를 떠 올린 것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이미 죽음이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돌아오지 못한 자의 형제와 아들이 또 그 바다로 나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무섭고 두려운 그 바다 너머로 떠나고 떠나고 떠났을까? 언제부터 떠남이 포르투갈인들의 숙명이 되었을까?
수백 년 전 그 바닷가에서 돛을 여미는 선원의 혼잣말이 들린다.
"이런 젠장, 이건 어쩔 수 없는 내 운명이야!"
오, 짜디짠 바다여,
소금물의 얼마만큼이 포르투갈의 눈물인가!
그대를 건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리고,
얼마나 많은 아들들이 헛된 기도를 올렸는가!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결혼하지 못하고 기다렸는가
그대가 우리 것이 되기 위해, 오 바다여!"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모든 것에는 가치가 있다
영혼이 작지 않다면.
-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 시, "포르투갈의 바다" 중에서
주 1)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 '포르투갈의 바다'의 번역은 '브라질소셜클럽'님의 번역을 인용하였습니다. 시적 운율을 위하여 나누어진 포르투갈어 원문과 달리, 메시지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임의로 줄바꿈을 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