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에 나가서 사람이나 하나 더 죽여라
나 같은 'Be폭력주의자'에게는(그러니까, 진짜 폭력을 휘두른다는 것이 아니라, 장르적 취향이 그렇다는 것이다) 굉장히 흥미로운 영화인데 아직도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스스로 개탄스러울 뿐이다.
애초에 소설을 쓴다는, 그리고 범죄물이나 액션물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액션물의 정수나 다름없는 존 윅 시리즈에 손도 안 대 봤다고 하면 다들 혀를 찰 것이다. 사실 취향은 느와르에 가까워서 이렇게 개인이 총으로 다수를 쏴 죽이는…… 그러니까 뭔가 007을 떠올리게 하는(심지어 이것도 본 지 한참 됐다) 영화는 잘 보지 않는다. 차라리 사기 치는 영화가 더 취향에 맞다.
하지만 존 윅을 보고 반성했다. 내가 반성할 시간에 존 윅은 사람을 하나 더 죽일 것이지만, 아무튼 나는 반성했다. 따지고 보면 존 윅의 반성 방식이 바로 살인일 것이다. 누군가는 살인을 하고 누군가는 집에서 키보드나 두드리면서 생존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지, 존 윅? (아님 말고)
이 글에는 존 윅 4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보실 분들은 읽지 마세요.
애초에 사전 정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알고 간 건 존 윅이 1분에 30…… 몇 명이지? 아무튼 사람을 수십 명 죽인다는 이야기, 전작이 무려 세 개나 있다는 정도. 나는 마블 시리즈도 봐야 할 것이 숙제처럼 쌓인 이후에는 복습을 포기하고 그냥 보고 싶을 때만 골라서 보는 인간이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모르고 가거나, 안 가거나.
평소 같았으면 안 간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귀찮기 때문이다. (이 표현을 수식하는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이딴 건 일기장에나 써야 할 것 같아서 썼다가 지웠다.)
하지만 액션에 시즌 1, 2, 3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그냥 모르고 가기로 했다. 존 윅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건 앞선 세 개의 시즌 동안 존 윅이 수천 명을 살해하고 멋지게 살아남았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존 윅은 내가 모르는(당연함) 어떤 조력자에게 멋진 수트를 받고 내가 모르는 어딘가(당연함)로 떠난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적(당연함)을 죽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적어도 존 윅 3을 보지 않았다면 시작 후 10분 동안은 좀 지루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사운드가 방대하고 수트가 멋있고 액션이 있어서 살았다. 그걸 보면서도 내심 '아…… 이 텐션으로 세 시간을 버티라고? 진짜 죽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빌 스카스가드, 그러니까 그라몽 후작이(나한테는 빌 스카스가드가 더 익숙해서 그냥 배우 이름으로 부르는 게 편하겠다. 아니면 미남이라고 쓸까 싶다.) 웬 호텔을 부수고 사람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넣을 때까지도 솔직히 완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이유는 뻔하다.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데 우정을 과시하다가 한 사람은 죽는다. 음…… 그렇구나. 많이 슬플 것 같아. (이렇게 말하지만 내 MBTI는 F 90이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딱 그 구간까지가 제일 지루했던 곳이었다. 그들만의 감정선은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난 작품의 뭔가를 회수하는 느낌이고, 주고받는 대사들도 너무 진부하게 느껴졌다. 사실 '삶이란 그런 거지.'(원어가 더 인상깊었는데 나는 영어라곤 How are you밖에 모르는 문외한이라 까먹었다!)라는 처음 주고받을 때는 노골적인 사망 플래그로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 씬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사실 호텔 폭발이었고, 이후로 나열할 수많은 '좋은 점들'이 모두 이와 유사하다.
호텔 폭발이란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 같이 본 친구도 극대노하며 꾸짖을 갈! 을 서른 번은 한 것 같다. 물론 우리가 존 윅 1, 2, 3을 보지 않아서 이 거대한 판타지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하물며 괴수가 식사 알람처럼 등장하는 어벤져스에서도 건물을 무너뜨리면 욕을 처먹는데……) 하지만 이 작품은 현실이 그렇게 뭐 중요한 건 아니다. 현실이 중요하면 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즘 작품이 널려 있다. 일단 존 윅은 절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고, 만약 그랬다면 사람이 방탄 수트를 입고 총알을 계속 장전하면서 뛰어다니다 추락하고 구르고 넘어지고 차가 지나다니는 도로에서 싸움질을 하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존 윅에 등장하는 모든 액션이 멋있다는 것이다. 액션물에서도 기대하는 바가 있지만, 특히 존 윅 같은 떼싸움물, 그중에서도 먼치킨물은 주인공이 멋있어야 한다. 먼치킨물에서 주인공의 간지를 빼면 남는 게 뭐가 있을까? 떼죽음? 저 수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에 묻힐까 하는 현실적인 걱정? 부서진 건물은 누가 복구하나 하는 심란함?
나는 먼치킨물을 정말 정말 정말 진짜 많이 매우 좋아한다.
이렇게 강조해야 내 진심이 좀 전달될 것 같다. (절대 강조 표시를 써 보고 싶어서 쓴 게 아니다.) 왜냐하면 먼치킨물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먼치킨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은 주인공이 힘들지언정 극복하기를 바라고, 망가질지언정 회복하길 바라며, 기본적으로 멋있기를 바란다. 요약하면 뭐랄까…… 간죽간살?
그런 의미에서 존 윅은 훌륭한 먼치킨 캐릭터다. 그리고 존 윅뿐만 아니라 주변인물, 즉 그의 동료들도 아주 매력적인 먼치킨 캐릭터다.
(이 설명을 하면서 사진을 덧붙이기 위해 포토를 뒤져 보았는데, 내가 찾는 사진이 없다. 아니, 어떻게 존 윅의 오래되고 유일한 친구들 사진을 찍어 놓지 않을 수가 있지???????????? 존 윅이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
아무튼 이 친구들과 존 윅이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액션이 완전히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성격을 액션으로 드러낼 수 있다.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대화문을 통해 캐릭터성을 드러낸다면, 액션이 중요시되는 액션 영화에서는 전투를 통해 캐릭터성을 드러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말이 많은 사람은 주로 싸움을 하지 않는 이들이고, 액션 담당인 이들은 몸으로 말한다. 아마 여기에서 출연 대비 대사량이 가장 많은 이는 분명 빌 스카스가드일 것이다. 그는 말로 캐릭터성을 드러내고, 킬러들은 주로 행동이나 액션으로 캐릭터성을 드러낸다. 액션 영화라는 특성에 너무나 충실했다.
여러 개의 액션 씬 중, 개인적으로 좋아한 것은 오사카에서의 액션 씬과(이건 오사카에 돌입한 순간부터 그곳의 등장 배우, 사용한 물건이나 긴장감까지 모든 게 좋았다. 그냥 특유의 느와르한 분위기가 취향인 것도 한몫한 듯) 성당으로 가는 길의 추격전과 총격전이었다.
사실 오사카에서 매력적으로 느낀 것은 존 윅보다 케인이었기 때문에 이건 제쳐 두더라도, 성당에서의 추격전은 OST와 총소리의 조화가 정말 멋있었다. 딱 그 장면만 다시 보고 싶을 정도였다. 이후의 총격전에서는 게임처럼 항공 샷을 잡으면서 불꽃 총탄을 사용하는데, 겜덕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이 정말 자리에서 일어나 게임 패드를 쥐고 싶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무기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액션 영화를 좋아한다면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게, 일 대 다수, 일 대 일 싸움이 모두 존재하는 데다가, 무기도 다양하다. 총, 칼, 활, 쌍절곤, 도끼, 불꽃(이건 마법 대체품인 건지, 진짜 좋았다. 화려해서.), 자동차, 오토바이, 주먹, 강아지(...), 지팡이, 플레잉 카드…… 쓸 수 있는 건 다 쓴 것 같다. 지루해할 틈이 없다. 인간을 죽이는 101가지 방법으로 책을 내도 될 수준이다.
일단 일 대 다수(즉 엑스트라들)를 상대할 때는 불꽃으로 지져 버리거나, 자동차로 밀어 버리거나 칼을 던지면서 대학살을 벌이고, 중요한 캐릭터와 일 대 일 다이다이를 까야 할 때는 갑자기 주먹질을 한다. 이건 게임적으로 생각하면 보스몹인 것이다. 보스는 한 방에 죽으면 안 된다. 싸움은 길어야 하고 플레이는 순조롭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모든 보스몹들을 상대할 때, 존 윅은 언제나 총알이 부족해져서 기본 무기로 돌아와야 한다거나 어디 하나 부상을 입는다거나 혹은 적어도 심리적으로 너프(친구라는 감정)라도 당해 있다. 단순해 보여도 나름대로 잘 짜인 구조인 것이다.
물론 관람 내내 묘하게 촌스럽다고 느낀 지점은 존재한다. 클리셰도 많고 대사는 사실 특이할 것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대사에 쓸 힘을 액션에 몽땅 탈탈 털어부었다!) 사실상 작품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라고 놀란 지점보다는 '역시 여기서는 이렇게 해야지! 죽여라, 존 윅!'이라고 응원한 부분이 훨씬, 훨씬훨씬훨씬 더 많다.
사실 이 작품의 근간이 되는 거대한 개념부터가 클리셰라고 볼 수 있다. 고독한 킬러!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고, 아직도 마음속에 아내를 묻고 산다. 언제나 그를 뒤따르는 수많은 위험과 적들. 그러나 뛰어난 킬러는 자신을 위협하는 적을 다 제거해 나가며 몇 되지 않는 가족 같은 친구들과 함께 매일매일을 버텨 나간다. 그의 이름은……. 존 윅이 아니라도 국가당 오백 명은 거뜬히 나올 것이다.
애초에 이 작품을 받치는 감정들도 전부 클리셰다. 사랑, 즉 형제애(느와르적 표현이다), 부성애, 부부애. 동물에 대한 사랑도 있다. 맞닥뜨리는 딜레마도 결국 형제애를 중시할 것인가, 부성애를 중시할 것인가 등의 싸움으로 이어지곤 한다. 엔딩도 결국 존 윅이 '다정한 남편'이 되는 것으로 부부애를 강조하며 마무리된다. 모든 감정선이 사실 이런 장르에서 흔히 보이는 클리셰로, 특이할 것은 없다. 그 누구든 한 30분쯤 보면 대사며 뒷이야기며 궁예처럼 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웰 메이드 클리셰가 뭐가 나쁘지? 모르겠다. 그건 약간…… 잘 만든 피자를 먹는 기분이다. 레시피를 잘 숙지해서 만들었고, 심지어 좋은 요리사가 잘 요리한 것 같다. 왜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지 않았냐고 고함칠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일단 피자가 타지 않았다. 그러면 뭐…… 요리의 기본은 한 거 아닌가? (물론 피자를 싫어할 수도 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누구나 피자를 싫어할 권리는 있다.) 심지어 맛있기까지 하면 사실 별점 5개를 받아도 충분하다고 본다.
솔직히 앞선 1, 2, 3편을 다 보고 갔으면 더 재미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은 남지만, 액션물을 기대하고 갔다면 후회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이 추천글이냐고? 그럴 리가. 누군가 이 글을 보았다면 영화를 다 본 사람일 테니까. 안 보고 여기까지 읽었다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이 글을 읽는 동안 존 윅은 373명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