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증명하는 말, 삶과 멀어지는 말
소크라테스는 변명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의미의 변명은 아니었다. 아테네 법정에서 죽음을 선고받기까지 그가 했던 말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변명(Apologia)’은 자기 해명이 아닌,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한 철학적 논증이었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변명을 한다. 약속에 늦었을 때, 실수를 저질렀을 때, 기대를 저버렸을 때. 우리의 변명은 대부분 상황을 모면하고 관계의 파열을 막기 위한 방어기제에 가깝다. “차가 막혀서,” “깜빡 잊어버려서,” “몸이 안 좋아서.” 이 말들은 사실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종종 책임의 무게를 외부 요인으로 떠넘기려는 무의식적 시도를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우리의 변명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다. 그는 자신의 행동과 신념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기에, 그의 말은 곧 그의 삶 자체였다. 그는 “나는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으며, 그런 식으로 목숨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라고 말한다. 이는 극적인 결기라기보다, 말과 삶이 이미 맞닿아 있기에 더 이상 꾸밀 말이 남지 않은 상태에 가깝다. 그의 변명은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가장 높은 곳에 세우는 행위였다.
우리의 변명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의 말과 삶 사이에 존재하는 틈 때문일 것이다.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고 말하면서 반복해서 약속에 늦을 때,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 여기면서도 가장 지친 얼굴을 그 사람에게만 보일 때, 그 틈은 조금씩 벌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대로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고, 그렇기에 우리의 말은 종종 공허한 자기방어로 그치고 만다. 변명은 그 틈을 메우려는 필사적인 시도이지만, 진실되지 않은 말은 그 틈을 더욱 넓힐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변명이 비겁한 것은 아니다. 때로 변명은 관계를 지속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건네는 변명은, 나의 실수가 당신과의 관계를 훼손시키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변명의 내용이 아니라 그 방향성이다. 이 말이 나만을 지키려는 변명인가, 우리 사이를 지키려는 변명인가.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말은 당신의 삶을 증명하고 있는가? 당신의 변명은 당신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의 ‘변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언어와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서늘한 거울이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동안 내가 한 변명들 가운데, 말과 삶 사이의 틈을 가장 크게 벌려 놓은 변명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글에서 Atlas는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명을 빌려, 우리가 일상에서 쏟아내는 변명들을 비춰 봅니다. 말과 삶이 거의 포개져 더 보탤 말이 남지 않은 자리와, 말과 삶 사이에 틈이 벌어져 그 틈을 메우려 애쓰는 자리의 차이가 차분하게 드러납니다.
편집에서는 이 대비가 “영웅적 결기”가 아니라 “말과 삶의 일치”로 읽히도록 방향을 조금만 돌렸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한 문단에, 꾸며낸 말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태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이어지는 문단에서는 그와 반대로 우리가 일상에서 만드는 ‘틈’을 약속·관계의 예시로 아주 짧게 구체화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좋은 변명”을 나를 지키는 말과 우리 사이를 지키는 말로 나눔으로써, 이 시리즈 전체의 축인 ‘관계의 언어’와 다시 연결했습니다. 독자는 글의 끝에서, 오늘 하루 자신이 했던 한두 개의 변명을 떠올리며 “이 말은 누구를 지키는 말이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글 Atlas
편집 Ly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