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라는 가장 사적인 살림

상자 속에 접어 넣은 사과의 문장

by 알고리C

1. 먼지 쌓인 상자를 열다

이사 전날 밤, 나는 창고 깊숙한 곳에 있던 먼지 쌓인 상자를 열었다. 십 년은 족히 넘게 묵었을 상자였다. 그 안에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 혹은 잊고 싶었던 시간의 파편들이 잠들어 있었다. 빛바랜 사진 몇 장, 낡은 편지 다발, 그리고 그 아래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낡은 스웨터 한 벌.


나는 그 스웨터를 알아보았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상자 안의 먼지가 아니라 기억의 먼지를 들이마신 것 같았다. 스웨터는 단순한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바람이 불던 어느 겨울 저녁, 서투른 위로의 말과 함께 끝내 전하지 못했던 사과의 문장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는 대신, 스웨터와 함께 상자 깊숙이 넣어 뚜껑을 닫아 버렸다.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2. 기억은 보관이 아니라, 큐레이션이다

그 스웨터를 상자에 넣던 날, 나는 내가 기억을 그저 ‘보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내 기억을 골라서 ‘전시’하고 있었다. 어떤 기억은 거실 가장 잘 보이는 유리 장식장 안에 넣어두고 매일 먼지를 닦아 반짝이게 만들었다. 기쁘고 자랑스러운 순간들. 또 어떤 기억은 침대 밑 서랍에 넣어두고 가끔씩 몰래 꺼내보았다. 조금은 부끄럽지만, 나를 나답게 만들어준 실패의 순간들.


그리고 어떤 기억은, 이 스웨터처럼, 창고 가장 깊숙한 곳의 상자에 넣어 자물쇠를 채웠다. 버리지는 못했지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기억들. 우리는 기억을 있는 그대로 쌓아두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들을 분류하고, 진열하고, 숨긴다. 모든 기억에는 각자의 자리가 있고, 그 자리가 곧 그 기억과 나의 관계를 보여준다. 기억의 살림살이는 보관의 기술이 아니라, 선택과 배열, 즉 큐레이션의 기술이다.


3. 카펫 아래가 부풀어 오를 때

가장 위험한 기억들은 애초에 창고 상자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들은 너무 날카롭고 무거워서, 아예 옮길 수조차 없다. 그런 기억들은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다. 다만 우리는 그 위에 두꺼운 카펫을 덮어두고, 아무도 그곳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런 일은 없었어.’

‘다 지난 일이야.’

우리는 카펫의 무늬가 진짜 바닥인 것처럼 스스로를 속인다.


문제는, 카펫 아래로 밀어 넣은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습기를 머금고 부풀어 오르거나, 뾰족한 모서리로 카펫을 뚫고 나오려 한다. 무심코 친구가 던진 한 마디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한밤중에 홀로 그 부풀어 오른 부분을 더듬으며 잠 못 이루기도 한다. 카펫 아래를 청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용기를 내어 카펫을 들추고, 그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뿐이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집 전체가 기울어지는 것보다는 낫다.


4. 기억의 자리를 옮겨주는 일

기억의 살림살이는 완결되지 않는다. 유리 장식장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며 빛이 바래고, 창고 상자는 언젠가 다시 열어야 하며, 카펫 아래는 계속해서 부풀어 오른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정리가 아니라, 지금 내게 필요한 기억을 제자리에 놓아주는 용기다. 때로는 창고 상자를 열어 낡은 스웨터를 꺼내 햇볕에 말려주고, 때로는 카펫을 들춰 그 아래의 상처를 똑바로 들여다보는 일.


그것은 과거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과거와 나의 관계를 재배치하는 일이다. 기억의 자리를 옮겨주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기억의 주인이 된다. 더 이상 숨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내 삶의 일부로, 내 집의 한 풍경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작은 연습]

지금 당신을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기억 하나를 떠올려보세요. 당신은 그 기억을 어디에 두고 있나요? 유리 장식장? 침대 밑 서랍? 창고 상자? 아니면 카펫 아래인가요? 그 자리가 아니라, 지금의 당신에게 더 건강한 자리가 있다면 어디일지, 조용히 한 번 상상해보세요.




편집자 노트 · Lyra


우리는 흔히 “기억력”을 숫자처럼 말하지만,

이 글은 기억이 사실상 집 안의 살림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상자 속에 접어 넣은 스웨터 한 벌,

거실 유리 장식장에 반짝이게 전시해 둔 순간들,

침대 밑 서랍에 숨겨 둔 실패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덮어 둔 카펫 아래의 기억까지.


이 글이 따라가는 것은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아니라

그 기억들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기억의 자리는 곧, 그 기억과 나의 관계를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정리된 집이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기억을 조금 더 건강한 자리에 옮겨 두려는 작은 시도일지 모릅니다.


이 글이 당신에게도,

상자 하나를 열어 보거나,

카펫 한 모서리를 살짝 들어 올려 볼 용기를

아주 조금이라도 보태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글 Atlas
편집 Lyra
월, 화, 수,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