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스 Aug 12. 2023

모두가 그런다고 그것이 옳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직도 들려오는 구슬픈 소리.

“낑, 낑, 끼잉-” 


급기야 하울링, 울음소리도 터져 나온다. 의성어로 묘사할 수 없을 만큼 그 소리는 가슴 깊이 무너진 곳에서 쏟아져 나온 소리였다. 시간은 새벽 2시와 3시 사이. 두유는 저녁부터 지금까지 내내 누군가를 찾으며 울고 있다. 애원하고 있다. 비명을 지르고 있다. 두유는 물론 나조차 슬픔과 괴로움에 사로잡혀 잠을 잘 수 없는 수준이다. 두유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두유 (사진 제공: 토란)


두유는 내가 사는 빌라 바로 앞 집 돌담 뒤에 묶여 있는 커다란 강아지이다. 리트리버 믹스라서 일어서면 키가 나만큼 크지만 나만 보면 반가워서 벌떡 일어나서 흙이 잔뜩 묻는 발로 나를 반긴다. 자신의 커다란 몸집에 대해선 살면서 생각도 안 해본 것이 분명하다. 내가 두유를 만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7월 초였다. 하지만 두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집 가까이서 개가 우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5월 달에 이사를 왔지만 그 두 달 동안 그 소리의 정체를 궁금해 하기만 할 뿐, 직접 몸을 움직여 근원을 찾아내려고 굳이 애쓰지 않았다. 어차피 내 개가 아니니까.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을까. 무엇보다 귀찮으니까. 지금 돌아보면 왜 그랬을까, 후회가 된다.


하지만 거듭된 어느 개의 서글픈 울음소리는 나를 움직이게 했고, 나는 그 개가 바로 우리 빌라 맞은편(내 창문과 마주하고 있다) 집에 있음을, 이렇게 가까이 있었음을 알고 크게 놀랐다. 글자 그대로 코앞에 있었다. 두유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우선 나와 연결된 존재에게 이름을 선물해주었고(부디 마음에 들었길) 인사를 나눴다. 두유가 살고 있는 환경을 살펴보니 두유가 우는 이유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분리불안이었다. 두유는 아무도 살지 않는 창고 같은 곳에 혼자 묶여 있었다. ‘주인’(일부로 보호자 대신 이 표현을 선택한다. 보호자 의식이 전혀 없고 소유 의식만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은 아침에 와서 밥만 주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리트리버는 다른 견종보다 분리불안의 위험성이 3배나 높다고 한다. 한때 사냥 견이었던 리트리버는 사냥감을 가지고 언제나 ‘주인’에게 회귀하도록 개량되었기에, 그에게 보호자와의 연결감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 하루 종일 혼자 인기척도 없는 창고에서 1미터도 안 되는 짧은 쇠사슬에 묶인 덩치만 큰 1살 아기 두유는 심각한 분리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두유 (사진 제공: 토란)


낑낑거리는 소리에 도저히 가만히 앉아 바라만 보고는 없겠어서,나는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 거, 산책을 시작했다. (함부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가 충동적인 것입니다...) 두유는 처음에는 나랑 걷는 것 자체가 신이 나서 나를 안으려고 난리가 났다. 하이파이브인지 내가 두유한테 덮쳐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한참을 내 곁을 뛰어다니더니 산책을 다음 시작했다. 신나게 걷다가도 동네 개울이 나타나면 허우적거리다가 물에 풍덩 빠졌다! 수영하는 두유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두유는 분명 웃고 있었다. 행복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두유와 나는 오솔길을, 바닷길을, 시냇물을, 바다를 쏘아 다니며 풀 향을 맡고 시원한 물에서 첨벙거렸다. 바다에서 흥이 나 첨벙 뛰어다니는 두유의 모습은 미소천사 포세이돈과 다름없었다. 두유! 부르면 금방이라도 귀를 쫑긋 세우고 나를 향해 우다다 뛰어오는 두유는 나에게 선물 같았다. 놀라움과 행복이 달려왔다.


두유가 나에게 커다란 기쁨으로 다가온 만큼, 새벽마다, 한밤중마다 들려오는 그의 슬픔 가득한, 애절한 울음소리는 나에게 엄청난 슬픔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무력감과 분노, 슬픔에 나 또한 침잠되기 시작했다. 나와 두유가 동일시되기 시작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고민은 점점 깊어지고, 나도 두유처럼 시름시름 앓아갔다.


두유 (사진 제공: 토란)


어느 날, 산책 중 두유를 알아본 동네 주민으로부터 드디어 두유의 ‘주인’의 신원과 행방을 알 수 있었다. 연락을 해보니 그는 요 몇 달 간 새 집을 짓기 위해 두유를 이 창고에 묶어두었고, 지금은 해외여행 중이었다. 그는 9월까지만 이렇게 둘 것이고, 산책을 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며칠 후 ‘주인’이 돌아왔고 달라진 건 없었다. 두유는 그대로 묶여 있었고 매일을 울었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주인’에게 길고 긴 문자를 보냈다. 두유가 하울링을 할 만큼 심각한 분리불안을 겪고 있고, 지금처럼 산책도 안 시키고 사람 없는 곳에 방치해두는 것은 학대나 마찬가지라고. 심각한 어조로 보낸 나의 문자에 그는 ‘나에게’ 불편을 주어 사과하며 답했다.


“이 마을 강아지들 보면 다 집에서 묶어놓고 밥만 주는 사람 많아요. 동물 학대라 생각하지 마세요.”


동물 학대가 아니라니! 그것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기 때문에 동물 학대가 아니라니! 무슨 논리란 말인가! 화가 났다. 그에게 똑똑히 말했다. 


“모두가 그런다고 그것이 옳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세상이 안 바뀐 거죠. 동물 입장에서는 학대가 맞습니다. 저렇게 두유가 매일 비명 지르고 우는데 어찌 두고만 볼 수 있습니까. 동물은 밥만 먹고 자는 기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부디 강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주십시오.”


두유 (사진 제공: 토란)


바로 다음 날 두유는 거처를 옮겼다. ‘주인’은 더 좋은 곳으로 옮긴다고 했다. (다행히 자세히 들어보니 사실인 듯 했다. 부디 사실이길.) 아침 일찍 두유와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를 보자마자, 두유는 반가움에 또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이별이 빨리 찾아올 줄 알았다면 어제 산책 더 오래 시키고, 더 자주 볼 걸... 가슴이 미어졌다. 두유가 내 티셔츠를 흙으로 잔뜩 물들여도 냅두었다. 두유의 포옹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비록 두유의 울음은 나를 슬프고 고통스럽게 했지만 두유의 환대, 미소와 발걸음, 첨벙거림이 나를 그만큼이나 행복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두유가 떠난 뒤 나는 두유의 빈자리를 보며 자꾸만 그 자리를 맴돌았다.


두유와의 짧은 만남. 그리고 헤어짐. 그러나 절대 가볍지 않았던 우리의 연결. 난 두유를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두유가 새로운 곳에서 행복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더불어 세상 모든 두유‘들’, 지금도 울고 외로워하는 시골의 두유‘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모두가 그러니까 상관없다, 괜찮다’는 식의 취급을 받지 않길 바란다. 모두가 그러니까 더욱더 경각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성찰해봐야 한다. 생명이 생명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다시 한 번 또렷히 말한다.


“모두가 그런다고 그것이 옳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글쓴이: 토란

책에 파묻혀 사는 비건 퀴어 에코 페미니스트.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사랑스러운 존재들과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존재의 평화를 바라며 글을 읽고 쓰고 목소리 내고 있습니다. 현재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제주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평화, 동물권, 페미니즘, 환경, 퀴어 등 온갖 경계를 넘나드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내려고 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