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여정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도착했다. 열 시간 반을 날아오는동안 책을 읽고 영화를 보았으며 그 밖의 시간은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장시간 비행은 역시 힘들다. 정시에 도착한 비행기는 비가 내려 직원들이 비행기와 공항통로를 연결하는 작업을 안 하고 있다는(?) 이유로 승객들을 30분 동안 비행기 안에 가둬두었다. 기다리는 동안 “다른 비행기도 다 같이 지연되어서 환승승객분들께서는 걱정 안하셔도 된다”는 조금 희한한 멘트가 나왔다. 내가 탈 비행기 출발 시간까진 세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고 정시출발할거라는 안내 알림이 왔다.
PP카드를 이용해 라운지에서 좀 쉬고 싶었지만 라운지에 가려면 시큐리티체크를 다시 해야 한다고 해 그만 두었다. 환승 체크를 할 때 면세점에서 구입한 봉지가 검색대에 걸렸었다. 직원을 따라가 밀봉된 포장을 뜯고 검사를 받았다. 언니가 부탁한 일본제 화장품이었는데 특수한 검사함에 넣고 확인을 했다. 다행히 아무 문제가 없는 걸로 판명되어 금방 환승구역으로 왔지만 나갔다 들어올 때 또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환승구역 내 카페테리아에서 요거트를 먹으며 쉬었다. 창가가 보이는 중앙 테이블에 앉아 무심코 고개를 드니 수십 대의 항공기가 줄지어 선 위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하루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빛이 창에 부딪쳐 반짝였다. 꽤 낭만적이었다. '옆에 있는 것이 면세쇼핑봉투가 아니라 남친이었으면 완벽했을텐데'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휴그랜트 같은? (비행기에서 노팅힐을 본 후유증이라고 해 두자.)
밤 도착이 신경쓰여 호텔에 택시픽업예약 확인 메일을 보냈다. 지금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있고 정시 도착예정이라고 썼다.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보딩시간이 30분 지연되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다시 메일을 보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앞선 비행에서 잠을 못 자 컴퓨터를 다시 켜기도 힘들게 지쳐있었다. 로마행 비행기는 40분 지연 출발을 했다. 택시 기사가 가버리면 어쩌나 걱정됐지만 방도가 없었다. 로마 다빈치 공항에 밤 12시 30분이 넘어 도착했다. 재빠르게 짐을 찾고 입국장으로 나가는 순간은 정말 떨렸다. 비몽사몽이었고, 컨디션이 안 좋았다. 무사히 숙소까지 갈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입국장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손엔 이름이 적힌 피켓도 짐도 없었다. 다 소매치기가 아닐까 의심이 드니 긴장이 고조됐다. 멀뚱히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내 이름이 적힌 흰 종이를 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호텔에서 보내 준 픽업 기사였다. 휴우, 다행이다. 연착되어서 늦었다고,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기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양손을 위로 펼치는 몸짓을 했다. 괜찮다는 건가. 이탈리아 사람들이 무표정하단 말을 듣긴 했지만 표정만으론 그들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내 캐리어를 끌고가는 픽업기사의 뒤를 졸졸 따랐다.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동안 말 한마디 없었다. 그저 앞만보고 걸을 뿐이었다. 내 머릿속에선 혹시 돈을 더 달라고 하는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밤이라 차가 막히지 않아 30분 만에 호텔 앞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예약할때 안내받은 45유로를 건네자 무표정하던 기사의 얼굴에 미소를 번졌다. 그라시아스! 라고 했다. 잠깐, 저건 스페인어 아닌가? 집을 떠난 지 열아홉 시간 만에 무사히 로마에 짐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