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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스 Mar 16. 2024

한 달 여행하러 갔다가

인생의 삼분의 일 이상을 살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시작점

나는 프린팅 디자인 프로그램이 끝나면, 유럽으로 한번 여행을 가고 싶었다. 그때 뉴질랜드에는 유럽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들이 많았다. 또한 뉴질랜드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은 호주나 유럽에서 일하는 것을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내 기억 속에 당시 뉴질랜드는 그렇게 산업이 발달한 게 아니라서, 디자인이나 IT직종은 뉴질랜드보다는 호주가 더 일자리와 임금이 높은 편이었다. 또한 평균 임금은 호주가 더 높은데, 물가는 뉴질랜드나 호주나 비슷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주변의 영향을 받아서, 나는 뉴질랜드에서 일을 해보는 것을 도전해 보기 전에 다른 나라를 가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국 음식을 파는 푸드코트에서 일을 해서 경비를 모았다. 학교 끝나고 저녁타임 아니면 주말에 점심 저녁에 일을 했다. 푸드 코트에 음식이 남으면 싸갈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았다. 그 당시에 베를린에 있는 친구가 있어서, 베를린과 파리를 가기로 했다. 나는 유럽 하면, 런던, 파리를 많이 들어봤는데, 런던은 파운드가 세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비행기 표도 왕복으로 샀다. 짐이 별로 없기는 했지만, 다시 뉴질랜드에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몇 가지는 살던 방놔두었다. 



그렇게 간 베를린에서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내가 나 자신으로써 베를린에서 존재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매력적이었다. 한국에서는, "다름"은 "틀림"으로 인식될 때가 내게 많았는데, 여기서는, 내가 있는 그대로 그냥 있어도 되는 느낌을 받았다. (베를린에서 살만 큼 산, 지금의 시각으로서는 베를린의 자유로움과 독일 사회의 포용력은 다른 주제이다. 피부색, 인종이 다른 이민자인 나에게, 독일은 포용력이 좋은 나라는 (inclusive)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여기서 적응해서 오래 살던, 나는 이곳 사람들에게 얼굴에서부터 이미 이방인이기 때문에, 평생 이방인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제는 내가 이방인임을 느낀다, 아마 내가 한국 사회에서의 기준을 좀 벗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그 기준을 몰라 조심하게 될 때도 생긴다... 어렸을 때의 나는 이런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기회들을 잡으려 하며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와 버렸다.)


또한 뉴질랜드에서는 나의 영어 이름을 썼는데,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나의 본명을 물어보고, 본명을 말하려고 하는 모습에 감명받았다. 게다가 영어가 여기서는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도 있지만, 어떤 발음의 영어를 쓰던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뉴질랜드에서 나는 뉴질랜드 억양의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현지인으로부터 핀잔을 받을 때가 많았다. 전형적인 미국식 영어에 익숙한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독일어를 작은 단어만 할 줄 알아도, 잘한다면서 칭찬을 해주었다. (오래 살다 보니, 독일어 잘한다 소리는 이제 불편한 칭찬이 되었지만...)


여하튼, 그 당시 베를린과 사랑에 빠진 나는, 여행 간 베를린에서 계속 미술을 공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대학교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고 싶었다. 프린팅 디자인 일 년 프로그램은 대학 졸업장이 아님으로, 뉴질랜드에서 좋은 일자리를 찾는데 한계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겨우 일 년 배운 것이기 때문에 실력도 부족했을 것이다. 또한 나의 원 계획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미대로 전과를 하는 것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한국보다 독일의 학비가 엄청나게 낮았다. 부모님이 나의 독일에서의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해 주시는 게, 한국에서 미대를 다니는 것보다 가격이 쌌다. 독일의 공립 대학교는 등록금이 그 당시 한국으로 30만 원도 채 안되었다. 학생증이 있으면 버스와 지하철을 무료로 쓸 수 있었다. 매달 내야 하는 돈은 집세와 의료보험료이었는데, 내가 학생일 때의 베를린은 지금과 비교하면 집세가 엄청 쌀 때였다. (지금은 세배 이상 뛰었다.)


나는 일단 시험 삼아 사립 미술 대학교에, 한국으로 치면 시각디자인(Communication design) 전공으로 사립 대학교에 지원했다. 운 좋게 내가 여행할 시기에 사립 미술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집했다. 나는 나의 가능성도 시험할 겸, 내가 뉴질랜드에서 일 년 동안 배우고 만든 것을 포트폴리오로 만들어서 지원했다.


베를린 미대를 생각하고, 한국에서 내가 배우고 싶던 순수 미술을 목표로 잡고 독일 미술 입시를 준비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돈과 독립이라는 미래의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해서 시각디자인 전공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미 뉴질랜드에서 배웠던 것들이 시각디자인과 좀 겹치는 부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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