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밤하늘의 관람차

또 하나의 관람차가 정점을 지나고 있었다.

by AYEON

우리 어디라도 같이 가지 않을래.


“어디 가는데 그렇게 꽃단장이야?”


엄마가 커피 잔을 들고 내 방문 앞에 서있었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방 안으로 들어와, 잔뜩 어질러놓은 방 안을 휙, 둘러본다.


“데이트라도 하는 거야? 누구랑, 윤후?”

“아니야, 무슨 데이트는. 그리고 윤후 선배는 연주랑 사귄다니까.”


엄마의 무신경함에 화가 난 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멍청이. 엄마는 널 못나게 키우지 않았어, 친구한테 남자나 빼앗기고 말이야.”

“윤후 선배는 그냥 선배라니까!”


나는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알았어. 그런데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아니면 아닌 거지.”

“엄마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하니까, 그러잖아. 나가, 옷 갈아입을 거야.”


엄마는 일단 순순히 물러나는 듯했다. 하지만 덧붙이는 말은 잊지 않았다.


“내 배 아파 낳은 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까 봐?”


엄마가 휘젓고 가는 바람에 의욕이 사라진 나는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껴입었다. 하지만 대충 껴입은 것 치고는 한껏 멋을 부린 느낌이었다. 머리는 돌돌 말아 묶고 얼굴에는 선크림을 듬뿍 발랐다. 가방에 지갑과 휴대폰을 넣다가 문득 화장대 위에 올려둔 파우치에 눈길이 닿았다. 화장은 무슨, 잘 보일 필요도 없는데.


“예쁘네, 우리 딸.”


내가 방에서 나와 현관으로 걸어가자 쇼파에 앉아있던 엄마가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기분이 상한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현관으로 가서 신발장을 열었다. 엄마가 현관 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신발은 뭐 신고 갈 거야?”라고 물었다. 나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몰라.”하고 대답했다.


“화장도 했으니까, 운동화보다는 샌들이 어울리겠다.”


립글로스만 바른다는 게 그만 어느새 화장을 완벽하게 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면서도 엄마의 조언에 따라 샌들을 꺼내 신었다. 엄마는 생글거리며 “잘 다녀와.”하고 인사를 했다.


“다녀올게.”


나는 억지로 무심한 척을 하며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8월의 첫날답게 후끈한 공기가 밀려왔다. 이렇게 더운 날, 하필이면 그런 곳을-


“어디요?”하고 내가 묻자 남자는 “글쎄, 그러니까 어디라도.”하고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우리는 결국 놀이동산에 가기로 했다. 그것은 단순히, 며칠 전 TV에서 놀이동산의 이벤트 광고를 본 기억이 떠오른 내가 무심코 던진 말 때문이었다. “그럼 놀이동산이라도 갈까요?”라고 조금은 지겨워진 내가 농담처럼 물었을 때 남자는 흔쾌히 “그러자.”라고 대답했다. 놀이동산과 남자라니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이렇게 더운데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놀이동산은 입구에서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남자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싸가지.


“어디야?”


남자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매표소 앞이요, 그쪽은 어디예요?”


남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었다. 나는 휴대폰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욕을 퍼부었다, 이런 싸가지 없는 놈 같으니라고!


“흐음, 이런 식이었단 말이지? 다 봤어, 너.”


별안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또 화들짝 놀라며 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노, 놀랐잖아요!”

“나쁜 짓을 하니까 놀라지.”

“멋있네요, 오늘.”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표, 표 끊어올게.”


태연한 척하며 남자가 성큼성큼 매표소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얼른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저기요!”하고 내가 부르자, 남자가 뒤돌아본다. 나는 남자에게 다가가 내 몫의 돈을 내밀었다. 하지만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와 돈을 번갈아보았다.


“내 표도 같이 사 와요.”


내 말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내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그럼 설마 내가 내 표만 달랑 사 올 것 같았냐? 됐어, 내가 살게.”


나는 고개를 꺄우뚱거리며 물었다, “왜요?”


“글쎄, 일단은 내가 오자고 했으니까, 라고 해둘까?”


남자가 표를 사는 사이 나는 입구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남자가 두 장의 표 중 하나를 내게 건넸다. “고마워요.”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저녁은 내가 살게요.”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놀이동산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지만, 그리 혼잡할 정도는 아니었다.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막막해졌다. 무슨 놀이기구를 좋아하지는 지나 물어볼까, 하고 망설이는데 남자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놀이기구 잘 타?”

“뭐, 그럭저럭.”

“그럼 탈까, 저거?”


남자가 가까이에 있는 롤러코스터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기가 많은 기구인지 대기하는 줄이 꽤 길었다. 더구나 남자와 둘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있으니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카페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침묵이 이상하게도 상당히 어색하다. 무슨 말이라도 해볼까?


“어제 TV 봤어요? 그 여자 아이돌-”

“TV, 잘 안 봐.”

“아, 그래요? 그럼 집에 있으면 주로 뭐해요?”

“별로, 아무것도.”


이래서는 대화가 전혀 되질 않잖아!


“우리 차례야, 가자.”


때마침 순서가 다가와 다행히도 그 어색한 침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롤러코스터에 앉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놀이동산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보통 이 나이쯤 되면 커플이 아닌 이상은 이런 곳에 잘 오지 않으니까.


“꺄아아아악-”


거의 90도 각도로 떨어지는데도 남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는 두 손까지 번쩍, 들어가며 다른 사람들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심장을 저 위에 두고 몸만 떨어지는 기분! 그 짜릿함에 온 몸이 기분 좋게 오싹해졌다.


“귀청 떨어지겠다, 입 좀 다물어.”


남자가 내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래야 재밌죠!”하며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엄청 잘 타네요, 놀이기구?”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롤러코스터가 멈췄다. 사람들이 우르르, 출구로 몰려간다. 남자는 이 정도야, 하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웃으며 그런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음, 잠깐만요.”


사람들에 섞여 출구로 빠져나오자 눈앞에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보였다.


“야, 어디가?”

“기다려요!”


나는 곧장 그 가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얼른 천사의 링이 달린 머리띠와 악마의 뿔이 달린 머리띠를 샀다. 양손에 머리띠를 하나씩 든 나를 보며 남자가 설마, 하는 눈길을 보내왔다. 하지만 아랑곳 않고 나는 남자에게 악마 뿔 머리띠를 건넸다.


“우리 이거 하고 다녀요, 네?”


남자의 표정은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다.


“유치하게, 무슨, 애도 아니고.”

“그럼 오늘은 어린이라고 하죠, 뭐. 자, 현이 어린이.”


남자는 한사코 거부했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결국 나는 남자의 머리에 머리띠를 씌워주었다. “잘 어울리기만 하네.”하고 나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남자는 계속 투덜거렸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천사 링이 달린 머리띠를 썼다.


“너는 엄청 안 어울리거든.”


휴대폰 액정을 거울삼아 이리저리 살피는 내게 남자가 얄밉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명랑하게 물었다.


“자, 다음은 뭐 탈래요?”




“목마르지 않아요?”

“조금.”

“좀 쉴까요, 음료수라도 마시면서?”


오후 내내 놀이기구를 타느라 기운이 빠진 우리는 회전목마가 잘 보이는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아, 힘들어, 하며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테이블에 엎드렸다. 롤러코스터, 범퍼카, 바이킹, 후룸라이드, 드롭 타워-


“뭐 마실래?”

“음, 시원한 카페라떼!”

“알았어.”


내가 지갑을 꺼내려고 하자 남자가 됐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저녁 산다며?”

“그래도, 아까 아이스크림도 그쪽이 샀는데-”

“카페라떼라고 했지?”


덜컹, 소리를 내며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나는 엎드린 채로 속속 화려한 조명을 켜기 시작하는 놀이기구들을 바라보았다. 이 놀이동산에서 가장 화려한 회전목마에서는 어느 애니메이션 주제가의 오르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말이나 마차에 탄 아이들이 부모님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부모님들은 그런 아이들의 사진을 찍느라 바쁘고.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나왔던 음악이더라,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남자가 돌아왔다.


“자, 커피.”

“고마워요.”


나는 시원한 커피가 담긴 플라스틱 컵을 건네받았다.


“우리 회전목마도 탈까요?”


남자는 머리띠를 벗겨내며 “야, 적당히 해.”하고 나지막하게 소리를 지른다.


“아아, 왜 벗어요? 잘 어울리는데!”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 너도 좀 벗어.”

“싫어요, 나는 마음에 드는 걸요.”


빨대로 쏙, 커피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대답했다.


“어머, 준하야, 안 돼-”


갑자기 한 아기가 의자 손잡이에 칭칭 감아둔 풍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기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달려와


“죄송해요.”하고 내게 사과를 했다.

“저건 이모 거야, 그러니까 준하는 함부로 손대면 안 돼요.”


풋, 하고 남자가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울상을 지었다.


“그거, 그만 벗지 그래?”


남자가 머리띠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계속 풍선에 관심을 보이는 아기와 남자를 번갈아보았다. 그리고 결국 천사 링 머리띠를 벗어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엄마가 사줄게.”하고 아기의 엄마가 떼를 쓰는 아기를 달래고 있었다. 나는 풍선을 묶어둔 매듭을 풀어 아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아기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아기에게 풍선을 건넸다. 빨갛고 동그란 풍선.


“자, 선물이야.”


아기가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얼른 내 손에서 풍선을 가져갔다. 아기의 엄마가 “미안해서 어쩌죠.”하고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저희는 이제 곧 나갈 거라서 필요 없어요.”하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더니?”


자리로 돌아오자 남자가 풍선을 들고 달려가는 아기를 돌아보며 내게 물었다.


“뭐, 아기가 자꾸 우니까.”

“사준 건 난데 왜 인심은 네가 쓰냐?”


남자가 투덜거렸다.


“그쪽이 나한테 사준 거니까, 엄연히 내 것이죠.”


그날의 파란 하늘과 잘 어울렸던 빨간 풍선.


“그보다 이 노래, 어디에 나온 건지 기억나요? 따다단따다단-”

“무슨 노래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군.”

“흥, 지금 회전목마에서 나오는 이 노래요.”

“같은 노래인 줄 몰랐어. 이거 백설공주에 나오는 노래 아닌가?”

“백설공주? 디즈니?”

“응. Someday my prince will come.”


나는 가만히 제목을 되새겨보았다. Someday my prince will come. 언젠가는 나의 왕자님이 오실 거예요.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제목이네, 하고 생각했다.


“다 마셨으면 그만 갈까?”


네, 하고 나는 남은 커피를 단번에 들이마시고 일어섰다. 어느덧 해가 지고 깜깜한 어둠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회전목마의 조명들이 더욱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타고 싶어, 회전목마?”


놀이동산 지도를 보느라 조금 뒤처진 나를 돌아보며 남자가 물었다.


“뭐, 별로.”

“타보자, 어디.”


이런 청개구리 같은, 하면서도 나는 회전목마를 향해 가는 남자의 뒤를 따라간다. 역시 키가 내 허리 정도밖에 안 되는 아이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뻔뻔하게 그 뒤에 줄을 섰다.


“엄마, 나는 말! 하얀 말!”

“나는 공주님이니까, 마차 탈 거야, 으앙.”


입구가 열리자 흡사 아수라장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아이들이 모두 자리에 앉기를 기다린 후 남자와 나는 빈 목마에 나란히 올라탔다.


“백마 탄 왕자님이네요, 그쪽은.”

“그럼 너는 누런 말을 탄 무수리냐?”

“아니거든요! 이럴 땐, 공주님이냐고 해야죠!”


오르골 음악에 맞추어 회전목마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빙글빙글, 그리고 아래위로 움직이며. 언젠가는 나의 왕자님이 오실 거예요. 유치하지만 사랑스러운. 나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옆에 앉은 남자의 모습을 찰칵, 하고 찍었다.


“참 잘 나왔어요, 현이 어린이.”

“야, 찍지 마. 이런 유치한-”

“벌써 찍었는데 어쩌죠? 확, 인터넷에 유포해버릴까요, 스물셋 현이 어린이.”


하지만 회전목마는 정말로 재미없었다.


“너무 시시해, 역시.”

“나도 지겨웠어요, 솔직히.”


롤러코스터를 탈 때보다 더 지친 상태로 우리는 목마에서 내려왔다.


“이제 슬슬 갈까요, 저녁 먹으러?”


회전목마에서 내려 시계를 보니 어느덧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것도 탈까?”


남자가 멀리 보이는 동그란 형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 우리나라에서 제일 커다란 관람차라고 떠들썩했던 관람차가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며 천천히 돌고 있었다.


“엄청 지루할 텐데 회전목마보다 훨씬.”


가능한 한 관람차만은 피하고 싶었던 내가 말했다.


“왜, 걱정돼?”


남자가 웃으며 물었다. 정곡을 찔린 나는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내가 왜요?”


“내가 혹시 너를 덮치기라도 할까 봐?”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식으로 남자가 말했다. 나는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무슨, 좋아요, 탑시다, 관람차! 재미없다고 투덜대지나 마요!”


나는 반짝이는 관람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자는 싱글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관람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예상은 했었던 상황이었지만, 둘이서 한 몸인 것처럼 꼭 붙어선 커플들이었다. 차라리 어린이들과 함께 회전목마를 타는 편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그곳에서 우리는 이질적이었다.


“아, 오늘 정말 덥지 않아요?”


잠시 상투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국어책을 읽는 말투였다. 남자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묵묵히 앞사람의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괜히 조바심이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게다가 남자와 둘이서 관람차를 타게 되다니, 이거 꼭 진짜 데이트 같잖아?


“두 분이시죠? 즐거운 관람 되세요.”


상냥한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노란색 관람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직원에게 물었다, “한 바퀴 도는데 얼마나 걸려요?”


“약 17분이 소요됩니다, 고객님.”


직원이 인형처럼 웃으며 또박또박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시금 상냥한 목소리로 다음 커플들을 환영했다. 남자가 야, 하고 나를 불렀다. 17분이라, 길다-


“와, 움직인다!”


나는 유리벽에 매달려 커다랗게 소리쳤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앉아있었다. 천천히 관람차가 하늘을 향해 떠오르기 시작한다.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본 적이 있었다, 관람차라는 놀이기구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천천히 하늘을 가로질러 가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다. 그리고 남자가 좋아하는 사람도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남자도 생각하고 있을까, 이 관람차를 함께 타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그녀였으면 좋겠다고.


“참 시시하다, 그죠?”


내가 남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남자는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생각해보면 롤러코스터보다 훨씬 더 무서운 놀이기구가 관람차야.”

“뭐가 무서워요, 이렇게 천천히 움직이는데?”

“꼭대기에서 갑자기 고장이 나서 멈춘다고 상상해봐, 안 무서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내 “전혀.”라고 대답했다. 어차피 이 안에 있으면 높이 떠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텐데, 뭐. 그러자 남자가 덧붙였다, “꼭대기에 가면 높이가 117미터야.”


“백십........칠?”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높이다. 그 말과 동시에 서서히 눈앞에 까만 하늘만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점 정상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해 여름의 까만 밤하늘을 가로질러-


“조, 조금 무섭기는 하겠네요.”


나는 의자에 바로 앉았다. 남자는 여전히 미동 없이 앉아, 내 어깨너머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하늘에 그리운 얼굴이라도 나타난 것 같은 표정으로.


“있잖아요, 왜 같이 오자고 했어요?”

“응? 여기 오자고 한 건 너잖아?”


남자가 시선을 내게 옮기며 되물었다.


“아니 그건 맞지만, 그러니까 내가 묻는 건 왜 나랑 같이-”


남자는 “글세.”하고 여느 때처럼 애매하게 대답했다. 사실은 이유 따위는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별로 중요한 이유도 아닐 테니까. 하지만 이제 이유를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탄 이 관람차가 정상에 다다르기 전에-


“글쎄, 너는 엄청 성가시니까,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았거든.”


남자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두근거림은 우리가 점점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지 결코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지금 곧 이 관람차는 정상, 117미터 지점에 도달합니다.”


스피커에서 친절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정상이다. 나는 상체를 틀어 다시 밖을 바라보았다. 아래에는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자동차 헤드라이터의 불빛, 가로등의 오렌지색 불빛, 멀리 고층 아파트의 요란한 불빛,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의 불빛, 모든 것들이 조그맣게 보였다.


“고마워, 같이 있어줘서.”


남자가 조그맣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못 들은 척 정말 멋있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래,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공간에 함께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 이 남자인 것은. 정상을 지난 관람차는 서서히 지상을 향해 낙하한다.


앗, 하고 갑자기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왜 그러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입을 꼭 다물었다, 우리 바로 다음 관람차의 커플이 진한 키스를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해버렸단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눈치 빠른 남자는 힐끗, 내 머리 위를 올려다보더니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관람차 하면 역시 저거지?”

“무, 무슨 말이에요?”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내 쪽을 향해 상체를 서서히 기울여왔다. 나는 깜짝 놀라, 꺅, 하고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봐요, 그쪽은 이렇게 능글맞은 캐릭터가 아니잖아요?


“야, 그만 눈 떠. 내가 설마 너 같은 애한테-”


살그머니 눈을 뜨자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간 남자가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분노로 눈물까지 핑 돌았다.


“장난칠 게 따로 있지, 사람이 왜 그래요? 깜짝 놀랐잖아요! 정말 싫어!”


남자의 어깨너머로 롤러코스터의 불빛이며 바이킹의 불빛이 점점 더 커다랗게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탄 관람차는 17분간의 여정을 끝내고 천천히 플랫폼으로 들어선다. 처음 출발할 때와 같은 속도로, 하지만 다른 속도로-


“고객님, 즐거운 관람되셨습니까?”


여전히 인형 같이 웃는 얼굴로 직원이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넨다. 즐거운 관람, 즐거운 관람이라. 즐겁진 않았지만, 그래도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17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관람차를 꼭대기를 보았다. 또 하나의 관람차가 정점을 지나고 있었다.


“야, 뭐해?”


남자가 출구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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