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내가 들고 있던 그날의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리는 빨간색 풍선.
“아, 이제 완전 배고프다. 저녁 먹으러 가요, 뭐 먹고 싶어요?”
우리는 놀이동산을 빠져나왔다. 아직 불꽃놀이나 퍼레이드 같은 이벤트들이 아직 남아있어서인지 폐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놀이동산 입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비싼 것도 괜찮아요!”
무르기 없기다, 라고 남자가 내게 다짐을 받았다. 그때 지이잉, 하고 가방에서 긴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가방에서 꺼내 보니 재인 선배의 이름이 깜빡이고 있었다. 남자에게 양해를 구한 후 전화를 받았다.
“선배?”
“꼬맹아, 지금 어디야?”
수화기 저편으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선배의 묘하게 흥분한 목소리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숨길 필요는 없었지만, 굳이 솔직하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잠깐 밖에 나와 있어요, 친구랑.”
나는 의도적으로 친구에 살짝 힘을 주어 발음했다.
“잠깐만, 다아도-”
“아니, 다아는-”
선배와 실랑이를 벌이는 목소리는 틀림없이 그 사람의 것이었다. 그 사람의 목소리로 듣는 내 이름을 내 귀가 쉬이 넘길 리가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이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좋아한다.
“선배, 무슨 일 있으세요?”
나는 가슴을 졸이며 물었다. 남자가 지루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전화 속 그 사람의 목소리에 모든 신경을 기울였다. 선배와 그 사람의, 정확한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실랑이가 잠시 이어졌다. 그러더니 선배가 “미안.”하고 드디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윤후가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선배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너한테도 일단은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윤후 녀석은 괜히 걱정만 끼친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네. 나는 지금 병원인데 너는 친구랑 같이 있으면 나중에-”
“갈게요, 지금!”
“아니, 그렇게 심하게 다친 건 아니고-”
남자는 가로등에 기대서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애꿎은 바닥을 툭툭, 차고 있었다. 남자가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나는 선배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 어차피 친구랑 막 헤어지려던 참이었어요. 어디로 가면 돼요?”
“여기 푸른 병원이야, 알지? 일단 이쪽에 도착하면 나한테 다시 연락해.”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전화를 끊고 나는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내가 지금 가야 한다고 말하면 분명히 화를 내겠지. 하지만 그 사람이 입원까지 했다는 말을 듣고 남자와 태연하게 저녁을 먹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를 하고 더욱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기, 미안해서 어쩌죠?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바로 가야 할 것 같은데.”
남자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역시. 잔소리의 폭우가 쏟아지길 기다리며 나는 숨을 잠시 멈췄다. 하지만 남자는 무뚝뚝한 음색으로 “알았어.”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의외이긴 했지만, 일단은 내게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더 이상 따져 묻지는 않았다.
“정말 미안해요. 저녁은 다음에 꼭 살게요, 더 근사하게.”
“알았어.”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휴가 끝나고 봐요, 먼저 갈게요!”
나는 남자를 남겨두고 달리기 시작했다. 혼잡한 도로에서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푸른 병원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병원까지는 택시로 15분 정도만 가면 되는 거리였지만, 나는 초조하게 연신 시계를 힐끔거렸다. 다행히 러시아워를 지난 후라 도로는 한산했다.
“선배, 저 지금 병원 앞이에요. 어디로 갈까요?”
나는 택시에서 내리는 것과 동시에 재인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럼 본관으로 들어와서 오른쪽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와. 내가 마중 나가 있을게.”
“네, 선배.”
본관으로 들어가서 곧장 오른쪽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다 문득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향을 틀어 매점에 먼저 들러 비타민 음료를 한 박스를 샀다. 나는 다시 엘리베이터로 가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나는 네모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숫자 7을 누르고 닫힘 버튼을 꾹, 눌렀다. 문이 닫히자,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 찰나의 무중력 상태가 남자와 탔던 롤러코스터의 느낌을 상기시켰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었는데 생각해보니 남자에게 정말 엄청나게 미안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남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남자를 두고 그 사람에게 냉큼 달려온 건 찜찜했다. 물론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사람을 선택하겠지만.
땡, 하는 소리가 나를 생각의 늪에서 끌어내 주었다. 곧 문이 열리고 재인 선배가 나타났다. 나는 선배를 보자마자 그 사람의 상태부터 물었다.
“윤후 선배는요?”
“크게 다친 건 아니고 몸 여기저기에 가벼운 찰과상과 왼쪽 팔에 금이 간 정도야.”
“아,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쩌다가 다치신 거래요?”
“무단 횡단하는 사람을 피하려다가 쾅.”
선배가 먼저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선배를 따라 병실로 들어서자 창가 쪽 침대에 앉아있는 그 사람이 바로 보였다. 4인 병실은 아담하고 깨끗했지만, 역시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다아야.”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팔에 깁스를 하고 뺨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자 속이 상했다. “괜찮아요?”하고 내가 울상을 지으며 묻자 그 사람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괜찮아, 살짝 다친 것뿐이야. 봐, 이래서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건데.”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대답한 후 그 사람은 재인 선배를 나무랐다.
“그래도 입원까지 했는데 나중에 알면 꼬맹이가 섭섭할 거 아냐. 다들 알고 있는데 꼬맹이만 모르는 건 공평하지 않아. 음료수 마실래? 아이스크림도 있는데, 아니면 과일?”
그렇게 물으며 재인 선배는 냉장고 문을 열고 음료수와 아이스크림, 그리고 키위와 파인애플을 한꺼번에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들고 있던 음료수를 내밀었다.
“아, 이거, 마땅한 게 없어서요.”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뭐 이런 걸 다 사 왔어?”
그 사람 대신 재인 선배가 음료수를 받아 들며 나를 나무랐다.
“어쨌든 고마워, 잘 마실게.”
그리고 그 사람이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스크림부터 먹을까?”
재인 선배가 나와 그 사람의 손에 작고 귀여운 핑크색 스푼을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의 뚜껑을 열어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알록달록한 색깔이 보기만 해도 입안이 얼얼해질 만큼 달아 보인다.
“아, 선배, 아이스크림 같은 거 드셔도 돼요?”
내 말에 그 사람은 “무슨 죽을병이라도 걸린 사람 같은 취급인데?”라며 웃었다. 오늘 그 사람은 유난히 더 자주 웃는다.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다. 이 웃는 얼굴에 조금도 동요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기대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관계는 끝을 향해 한없이 속도를 올리며 달려갈 것이다. 마치 결승전에 도달하기 직전의 순간처럼. 이루어지지 못할 짝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런데 정말 금방 왔네, 가까이에 있었니?”
그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오물거리며 내게 물었다.
“아, 네, 그냥 이 근처에.”
나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차마 남자와 놀이동산에 갔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딱히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거나 떳떳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수진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 사람도 알고 있으니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와 둘이서, 그것도 놀이동산 같은 곳에 갔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대답을 하는 도중에 결정했다.
“아, 이 아이스크림 맛이 하나도 없네. 다른 거 먹자.”
재인 선배는 숟가락을 내던지고 우리의 동의를 얻기도 전에 아이스크림 통을 닫아버렸다.
“뭐야, 너 오늘 왜 이렇게 제멋대로야?”
“이거 치약맛 나서 싫단 말이야.”
나는 쓸모없어진 핑크색 앙증맞은 숟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재인 선배는 조금 전에 내가 건넨 박스에서 비타민 음료를 꺼내 그 사람과 내게 건넸다. 우리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성격이나 취향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까지 이런 모습을 내 앞에서 보인 적은 없었다. 오늘은 둘 다 어쩐지 짜증을 억지로 참는 듯 서로에게 신경질적이었다, 물론 오늘도 내게는 친절했지만.
“어, 다아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그 긴장감은 연주로 인해 깨졌다. 다행스럽다기보다는 내 몫을 빼앗긴 것처럼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병실로 들어서는 연주는 빨간 장미가 풍성하게 꽂힌 꽃병을 들고 있었다. 꽃병을 그 사람의 침대 맡에 내려놓으며 연주가 “어떻게 알고 왔어?”라고 물었다. 그 물음이 마치 내가 오면 안 될 곳에 왔다고 문책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불렀어, 다아한테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대신 재인 선배가 나섰다. 그 사람이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말이야.”라고 덧붙였다. 연주는 예의 미소를 지으며 “잘하셨어요.”라고 대답했다.
“늦었으니까, 난 그만 갈래.”
갑자기 재인 선배가 탁, 하고 음료수병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까칠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리고는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가방을 챙겨 들고는 병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넌 안 갈 거야?”
병실 문 앞에서 선배가 돌아서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 “아, 저도 가볼게요. 푹 쉬고 얼른 나으세요.”라고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네고 나는 허둥지둥 병실을 빠져나왔다.
“조심해서 가, 다아야.”
연주가 병실 문 앞까지 나와 배웅을 해주었다. 나는 “응, 수고해.”하고 짤막하고 무미건조한 말투로 인사를 한 후 이미 저만치 앞서가는 선배를 따라잡기 위해 달렸다. 내가 선배를 가까스로 따라잡았을 때 선배는 싸움이라도 걸고 있는 것처럼 엘리베이터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선배?”
나는 말을 걸었지만, 선배는 대답이 없었다. 오늘 사람들은 내게 낯선 모습을 보여주기로 작정한 것 같다. 나는 다시 “선배?”하고 불러보았다. 그제야 선배가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화가 나셨어요? 갑자기-”
“이런 말, 너한테는 좀 거북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네 친구가 별로야.”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선배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미안, 역시 좀 그렇지?”
내가 대답이 없자 선배는 내가 불편하게 생각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아, 내가 생각해도 정말 유치하고 한심하다.”
그렇게 말하며 선배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땡,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유치하다거나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응?”
“저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으니까요.”
선배는 하하, 하고 가볍게 웃었다. 내가 고개를 들고 선배를 보자 선배가 몹시 따뜻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 녀석은 아마 영원히 모를 거야.”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머리 위의 뜨거웠던 태양과 다 녹아 흐르던 아이스크림, 그리고 내가 들고 있던 그날의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리는 빨간색 풍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