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가족임에도 새삼스럽게 서먹한 느낌이 들뿐이다.
8월 2일, 오전 11시. 어제는 그렇게 맑더니 비가 온다.
“창문 좀 닫아, 빗물 다 들어오잖아!”
엄마의 잔소리에도 나는 그러든지 말든지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그 앞에 앉아 발톱을 깎는다. 구부정하게 굽은 등이 마치 고양이의 등 같다. 잘려나간 발톱들이 제멋대로 튀었다.
“다아야, 엄마 말 안 들려?”
나는 손톱깎이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대충 창문을 닫는 시늉을 했다. 엄마는 더 이상 잔소리하는 것도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나는 다시 발톱을 깎는 행위에 집중한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데에는 이런 단순한 행동이 최고다.
“아버지한테는 전화드렸어?”
빗소리와 엄마가 보고 있는 TV 속 여배우가 내지르는 비명처럼 들리는 말소리, 그리고 발톱 깎는 소리가 유지하고 있던 균형을 아빠의 목소리가 깨트렸다. 엄마는 몹시 나른한 목소리로 “응.”하고 짧게 대답을 했다. 아빠는 물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뭐해? 준비 안 하고?”
냉장고에 다시 물병을 넣은 후 아빠가 엄마를 향해 무뚝뚝하게 물었다. “해야지.”하고 엄마는 다시 나른하게 대답한다. 나는 얼른 발톱 깎기를 마무리하고 청소기로 불과 몇 분 전까지는 내 몸의 일부였던 발톱들을 빨아들인다. 엄마의 본격적인 잔소리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서둘러 욕실로 몸을 피했다. 아니나 다를까, 샤워기의 물소리로도 엄마와 아빠의 옥신각신하는 소리는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늘 이런 식이다, 온 가족이 함께 외출하기 직전에는.
“준비 다 했니?”
“응.”
올해는 휴가 날짜와 할머니의 제사가 겹쳐서 연초에 새 달력을 받았을 때부터 여행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다. 뭐, 어차피 할머니의 제사가 아니더라도 가족끼리 여행을 가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나는 차에 타자마자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가방을 베개 삼아 뒷좌석에 벌러덩, 누웠다. 시골로 향하는 내내 나는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아득한 정신 너머로 창문에 달라붙는 빗방울만이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다아야, 일어나, 다 왔어.”
“으응.”
나는 억지로 잠에서 깨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바로 앉았다. 창밖으로 비에 젖은 낯익은 풍경들이 스쳐가고 있었다. 푸른 논이며 하얀 비닐하우스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이곳은 시골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엄마!”
차가 할아버지의 집 앞에 멈추자마자, 대문 앞을 서성이던 까무잡잡한 아이가 단숨에 달려왔다. 아이는 대뜸 엄마의 품에 안겼다, 아니, 이제는 엄마를 품에 안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야, 나는 보이지도 않냐?”
내 말에 아이는 얄미운 표정으로 “아다다도 왔네?”라고 대답했다.
“너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이 찐따야, 엄마한테서 떨어져!”
“싫어, 백치 아다다.”
그동안 더 밝아진 것 같네, 내 동생. 제법 누나다운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한다.
“누나한테 백치 아다다라니, 너 자꾸 까불래?”
다진이가 얄밉게 혀를 내밀며 엄마 뒤로 숨는다. 아빠가 무뚝뚝하게 “할아버지는?”하고 묻자 다진이는 갑자기 얌전해진다.
“안에 계세요.”
“들어가자.”
그렇게 아빠의 말 한마디에 이산가족 상봉을 끝내고 우리는 마당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네 마당은 늘 변함이 없다.
2년 전, 나와 얼굴은 하나도 닮지 않은 주제에 성격은 판박이처럼 빼다 박은 다진이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주변 아이들에게 시달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가벼운 심부름을 시키는 것으로 시작해 돈을 요구하고 때로는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결국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가족들 중 그 누구도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저희 왔어요, 아버님.”
“어어, 이제 오냐?”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상황을 전해 들은 엄마는 매일 다진이는 붙잡고 울기만 했고 아빠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진이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다진이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정말 이러다 온 가족이 동반자살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 요즘도 기침을 많이 하세요?”
“기침은 많이 좋아지셨는데, 요즘은 자꾸 무릎이 아프다고 하셔.”
흙탕물 때문에 엉망이 된 발을 닦으며 투덜대는 나와 달리, 다진이는 할아버지 옆에 바짝 붙어서 착실하게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많이 컸네, 녀석. 다시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제법 제대로 된 누나처럼.
2년 전의 끔찍했던 상황에서 해결책을 찾아낸 것은 결국 다진이, 본인이었다. 전학시켜줘, 할아버지네 집으로 갈래. 말을 하지 않기 시작한 지 2주 만에 처음으로 엄마에게 꺼낸 말이 그것이었다. 엄마는 극구 반대했지만, 아빠는 쉽게 허락했다. 그즈음엔 아빠도 지칠 대로 지쳤던 게 아니었을까?
“셋째는 온대요?”
주변을 둘러보느라 늦게 마당으로 들어선 아빠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6시쯤에 도착한다더라.”라고 느릿느릿하게 대답하셨다. 나는 마루 위로 올라가 다진이의 방문을 열었다. 남자아이 특유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점만 빼면 솔직히 말해 다진이의 방은 내 방보다 깨끗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다진이가 곧바로 따라 들어오며 핀잔을 준다.
“왜 남의 방에 마음대로 들어와?”
“누나가 동생 방에도 마음대로 못 들어와? 왜, 뭐 숨기고 싶은 거라도 있어?”
“어디 볼까?”하며 나는 장난스럽게 침대 시트를 들추는 시늉을 했다. “없어, 그런 거!”하고 소리치며 다진이는 시트에서 내 손을 강제로 떼어냈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방안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다진이는 일일이 발끈하며 나를 쫓아다녔다.
“여자 친구 생겼어?”
책상 위에 나란히 놓여있는 액자에 눈길이 닿았다. 하나는 언젠가 가족끼리 집 앞 공원에서 찍은, 아마 유일한, 가족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해맑게 웃으며 브이를 그리고 있는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의 사진이었다.
“누구야? 귀엽네.”
얼굴이 빨개진 다진이는 내 손에서 액자를 낚아채갔다.
“마음대로 건드리지 마, 짜증 나!”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그리 다정한 남매가 아니었다. 어릴 때는 나도 다진이를 제법 귀여워했었고 다진이도 나를 잘 따르는 편이었다. 하지만 나이 차이가 4살이나 나다 보니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대화가 없어졌다. 중학생이었던 내게 코흘리개 동생은 관심 밖이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다진이와 마주칠 시간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다진이가 고등학생이 되어 이제 겨우 말이 조금 통하나 싶었을 때부터는 아예 떨어져서 살기 시작했으니 지난 몇 년간의 서로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가족임에도 새삼스럽게 서먹한 느낌이 들뿐이다.
“너 지금 누나한테 소리 지른 거야?”
나는 나보다 훨씬 키가 큰 남동생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아, 왜 그래!”하고 다진이가 짜증스럽게 내 팔을 밀쳐냈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다시 머리 쓰다듬기를 시도했다. 내 나름대로의 동생에게 다가가는 방식이라고 할까, 싫어하는 행동을 계속하면서 괴롭히는 것 말이다. 다진이가 이렇게 짜증을 낼 때면 정말 동생처럼 느껴진다. 우리 사이의 거리감이 조금은 옅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 말라니까, 내가 개도 아니고!”
결국 다진이는 정말 화를 내고 만다. 나는 내심 기뻐하며 방문을 열고 뛰쳐나간다. 아직도 비는 흐느적흐느적 내리고 있었다. 엄마는 본격적인 제사 준비를 위해 옷까지 갈아입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친척들의 ‘슈퍼 울트라 오지랖 질문 3종 세트‘를 직격타로 맞은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다. 남자 친구는 있니, 졸업은 언제 하니, 취업은 어디로 할 거니. 나는 시원한 바닥에 엎드렸다. 나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바닥에 붙어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뭐야, 또 남의 방에 마음대로 들어왔어?”
문을 열고 들어오던 다진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투덜거렸다. 헤헤헤, 하고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다진이는 침대 끝에 걸터앉더니 내 허리 위에 두 발을 떡하니 올려놓는다.
“야, 뭐야? 안 치울래?”
“벌이야, 내 프라이버시도 좀 존중해주는 게 어때?”
프라이버시라니,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다진이가 발로 허리를 꾹꾹 누른다.
“아이고, 시원하다. 더 꾹꾹 밟아봐, 좀 더 아래로.”
작은 엄마들이 늦게 오시는 바람에 나는 내내 엄마를 도와야 했다. 그런 동생의 마음이 기특해서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서 괜히 평소보다 한층 더 높은 톤으로 쓸데없는 말들을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누나.”
내 수다를 끊은 다진이의 목소리는 마치 숨을 내뱉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느낌이었다. 누나를 부르는 남동생의 낯설고도 기묘한 목소리에 나는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왜?”하고 나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누나도 그냥 엄마랑 같이 올라가.”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휴가는 이틀이나 더 남아있었고, 어차피 집에 있어도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나는 며칠 더 있다가 갈까, 라고 언뜻 지나가는 말을 던진 것뿐이었다. 그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명령조로 말하는 다진이에게 나는 반발심과 호기심이 동시에 생겼다. 똑바로 일어나 앉으며 나는 힘주어 대답했다.
“싫은데?”
내 말에 다진이는 단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왜? 시골이라면 질색이잖아?”
나는 으르렁거리며 “내 마음이야!”라고 유치하게 대답했다.
“됐어, 마음대로 해.”
다진이가 이제 그만하자는 듯 손을 내저었다. 사실 다진이도 나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처지였다, 친척들의 질문 공세가 다진이라고 비껴갈 리가 없으니까. 이런 시골에서 공부가 제대로 되니, 모의고사 성적은 어느 정도 나오니, 대학은 어디를 갈 거니. 할아버지께서 나서셔서 귀찮게 하지 말라고 말리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모의고사 과목별 등급까지 모조리 보고할 뻔했다.
“요즘 공부는 잘 돼?”
나는 다시 바닥에 몸을 뉘이며 물었다. 다진이는 새삼스럽게 그런 건 왜 물어보냐는 식으로 웃어 보였다. 하긴, 하고 나도 따라 웃었다. 생각해보면 다진이와 이런 식으로나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정말 새삼스럽군, 하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아야, 넌 어떡할 거야? 정말 더 있다가 올 거야?”
엄마가 문을 열고 내게 물었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다진아, 엄마 갈게. 보충 수업 끝나면 개학 전까지는 집에 와서 지내, 알았지?”
“응, 생각해볼게.”
“한 번 안아보자, 우리 아들.”
엄마가 와락 다진이를 품에 안았다. “어우, 닭살이야!”하며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주었다. 친척 어른들과 엄마, 아빠를 배웅하고 넓은 할아버지의 시골집에는 할아버지와 다진이, 그리고 나만 남았다. 텅 비어버린 느낌,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집 안은 내 숨소리가 울릴 만큼 고요했다. 항상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할아버지와 다진이는? TV를 켜보았지만, 워낙 시골이라 케이블 TV 따위는 나오지 않았고 지상파의 정규 방송은 이미 끝난 후였다. 지지직거리는 소리만 나오기에 하는 수 없이 TV를 끄고 이번에는 라디오를 켰다. 다행히 라디오에서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여자 진행자가 사연을 읽고 있었다.
“할아버지 주무시는데 시끄러워.”
다진이가 씻고 나오며 나를 나무랐다. 결국 나는 라디오마저 끄고 일어섰다.
“나는 어디서 자면 돼?”
“몰라, 그러니까 집에 가라니까.”
“그럼, 내가 침대에서 잘래. 네가 바닥에서 자.”
나는 재빨리 다진이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일단 침대에 드러누웠다. “뭐 하는 거야?”하고 다진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나는 이불속으로 파고들며 “잘 자.”하고 능청스레 말했다.
“아, 정말! 정말 짜증 나는 거 알아?”
진심으로 짜증을 내는 다진이의 목소리에 나는 조바심이 들어 살그머니 눈을 떴다. 다진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불을 끄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할아버지 방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어디가?”
잠결에 부스럭대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어둠 속에서 다진이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학교.”
“참, 그렇지. 몇 시에 마치는데?”
교복 단추를 잠그며 “왜?”하고 다진이가 퉁명스레 물었다.
“물어보면 안 돼?”
“1시. 할아버지 점심 좀 챙겨드려, 엄마가 냉장고에 반찬이랑 국 챙겨놨다고 했어.”
“알았어.”
다진이가 나가는 걸 보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고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며 아이콘이 깜빡이고 있었다.
[ 대박 배팅하세요, 배당률 200배 보장. ]
번호를 한 번 바꾸던가 해야지,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스팸 메시지가 온다. 나는 삭제하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아 번호를 스팸으로 저장하고 신고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 휴대폰을 닫으려는데 여전히 메시지 알람이 떠있었다. 어차피 이번에도 스팸 메시지겠지, 하고 나는 휴대폰을 침대 머리맡으로 내던졌다. 그리고는 다시 달콤한 아침잠에 빠져들었다.
“다아야, 다아야?”
한창 꿈속을 헤매던 나는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문 앞에서 할아버지께서 나를 부르고 계셨다. “네!”하고 나를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할아버지께서 “아직도 자니?”하시며 웃으셨다.
“아-”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집에서는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시골의 아침은 일찍 시작되기에 할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엄청 늦잠을 잔셈이었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아침 먹자구나.”
할아버지께서 이미 아침상을 차려놓으신 후였다. “죄송해요.”하고 나는 중얼거리며 밥상 앞에 앉았다. 반찬은 거의 어제 남은 제사 음식들이었다. 밥맛이 없었지만, 할아버지의 성의를 생각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밥 먹고 옆 동네 사는 친구네 집에 갈 건데, 너는 계속 집에 있을 거냐?”
괜히 오기를 부려 남겠다고는 했지만, 사실 이곳에 남아서 할 일은 없었다.
“글쎄요, 다진이 마중이나 나갈까 해요.”
“그래, 다진이가 좋아하겠구나, 누나가 마중을 가면.”
과연 그럴까요, 하고 나는 되물으려다 말았다. 왜 왔어, 하고 인상을 쓰는 다진이의 모습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급조해낸 생각 치고는 제법 쓸 만한 계획이었다. 식사를 끝낸 후 나는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할아버지께서는 옆 동네에 다녀오신다며 나가셨다.
“양산이라도 가지고 올 걸.”
다진이가 다니는 읍내의 고등학교는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무섭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늘 하나 없는 국도를 따라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도저히 이 땡볕 속을 그냥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다진이의 옷장을 다 뒤졌지만, 모자를 찾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께서 일하실 때 쓰시는 커다란 모자와 낡은 우산 중에 고민을 하다가 우산을 선택했다. 정말 미친 여자 같네, 하고 혼자 생각하며 우산을 쓰고 나는 집을 나섰다.
푸른 논이 싱싱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드문드문 일을 하시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검고 낡은 장우산은 햇빛을 막아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차가 다니지 않는 국도를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시골길을 걸어보는 것은 어릴 적 이후로 처음이다.
“할머니, 서동 고등학교가 어디예요?”
이름도 촌스럽지, 서동이 뭐야. 제법 커다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에 이르러 나는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 한 분에게 길을 여쭈었다. 할머니께서는 나를 몹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셨다. 앗, 우산! 나는 얼른 우산을 접어서 등 뒤로 감추었다. 비도 오지 않는, 오히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몹시 맑은 날에 이렇게 시커먼 우산을 쓰고 있으니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했다. 할머니께서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저기로 쭉 올라가.”하고 길을 알려주셨다.
“감사합니다.”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나는 할머니가 가리키신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서동 약방, 서동 양장점, 서동 국밥, 서동 문방구, 서동 철물점. 80년대 분위기가 흠뻑 묻어나는 조그만 읍내를 가로지르자 멀리 학교처럼 보이는 건물이 보였다.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이윽고 교문 앞에 다다르자 서동 중·고등학교라는 낡은 현판(懸板)이 보였다. 휴대폰을 꺼내 시계를 보니 12시 56분이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늦지는 않았다.
“어, 메시지가 와있었네?”
나는 잠결에 보지 않고 내던져둔 메시지를 그제야 확인했다.
[ 다아야, 늦었지만, 어제 병문안 와줘서 고마워. ]
그 사람이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늦게 확인하다니, 바보. 메시지가 도착한 시간은 어젯밤 11시였다. 벌써 하루나 지나버렸는데 지금 답장을 보내도 될까? 뭐라고 보내야 하지? 아아, 이런-
“오늘 형준이가 말이야-”
“아이스크림 사 먹자, 더워 죽겠어.”
“에어컨 때문에-”
내가 메시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 사이 수업이 마쳤는지 아이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모두 내게 한 번씩은 시선을 던진다. 시골 학교지만, 아이들의 모습은 여느 도시의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왁스로 잔뜩 멋을 부린 남자아이, 교복 치마를 짧게 줄여 입은 여자아이, 아이돌 가수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없는 여자아이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걷는 남자아이.
“누구지? 처음 보는데.”
“몰라, 대학생 같아 보이는데.”
몇몇 아이들은 내게 관심을 보이며 자기들끼리 추측을 하기도 했다. 나는 어쩐지 유명인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나?”하고 다진이가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로 나를 부르기 전까지 나는 으쓱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다진이에게 달려갔다.
“뭐야, 왜 왔어?”
다진이가 인상을 썼다.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우리 찐따 마중 나왔지.”
아이들이 다진이와 나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다진이가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그런 다진이의 모습에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다진이가 이곳으로 온 이유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괜한 짓을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