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자전거를 타고

뜨거운 햇살, 시원한 바람, 그리고 든든한 남동생.

by AYEON

“다진아, 너네 누나야?”


그때 한 아이가 고개를 쏙, 내밀며 말을 걸어왔다. 귀여운 얼굴의 남자아이가 다진이에게 친한 척을 하며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응, 우리 누나.”

“안녕하세요, 신재영이라고 합니다. 다진이의 베프입니다, 누님.”


생글거리는 얼굴이 참 귀여운 아이였다. 재영이라는 아이에 이어 몇몇 아이들이 더 다가와 내게 인사를 했다. 그중에는 같은 반이라는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다진이는 빨개진 얼굴로 점점 몰려드는 친구들을 말리느라 정신없었다.


“아, 내가 시원한 거라도 살게, 뭐 먹을래?”


내 말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다진이만은 곤란한 얼굴로 “누나!”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어느새 아이들의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읍내의 유일한 빵집으로 들어갔다. 팥빙수를 시켜주고 더 먹고 싶은 게 없냐고 묻자 재영이가 빵을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재영이와 몇몇 남자아이들에게는 빵까지 사주었다. 한창 크는 아이들답게 대단한 식욕이었다.


“안 그래도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누님.”

“맞아요. 다진이가 얼마나 누님 자랑을 하던지, 듣던 대로 미인이십니다.”


아이들의 귀여운 아부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팥빙수 하나 더 먹을래?”


어느새 다진이도 기분 좋게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 한 여자아이가 유난히 예쁘게 웃으며 다진이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다진이가 재영이와 게임 이야기를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듣고 있을 때였다. 낯익은 얼굴 같아 다시 한번 보니 다진이의 책상 위 액자 속에서 본 그 귀여운 아이였다. 오호라, 나는 속으로 손뼉을 쳤다. 갑자기 그 아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나는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 아이도 얼굴을 붉히며 나를 따라 웃는다.


“다진아, 내일 봐! 누님,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한바탕 시끌벅적한 인사를 뒤로하고 빵집 앞에서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집이 멀어서 마을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가는 아이들도 있고 집이 읍내라서 걸어서 가는 아이들도 있고 혹은 다진이처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크게 손까지 흔드는 재영이를 마지막으로 아이들은 모두 흩어졌다. 다진이는 빵집 앞에 세워두었던 자전거를 내 앞으로 끌고 왔다.


“타.”


“고마워.”하고 나는 얼른 자전거에 올라탔다.


“자, 출발!”


자전거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엄청 무거워!”하고 다진이가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시끄러!”하고 자전거를 발로 찼다. 그 바람에 자전거가 균형을 잃고 한번 휘청거렸다. 뜨겁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바람이 머리를 헝클이며 스쳐간다. 다진이가 힘차게 발을 구르며 점점 자전거의 속도를 높여간다.


“그런데 우산은 왜 들고 왔어?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아, 이거?”

“아무튼 누가 백치 아다다 아니라고 할까 봐, 쯧쯧.”

“누가 백치 아다다라는 거야, 자꾸 까불래?”


나는 다시 자전거를 발로 힘껏 찼다. 자전거는 전보다 더 심하게 휘청거렸다.


“아, 정말 넘어질 뻔했잖아!”


겨우 균형을 잡은 후 다진이가 나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우산을 활짝 펼쳐 머리 위로 들었다, 다른 한 손으로 다진이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다진이가 고개를 들어 우산을 쳐다본다.


“어때, 이러니까 좀 시원하지?”


다진이와 내 머리 위로 그늘이 차분하게 내려앉는다. 나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한 여름날의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 우리 남매의 곁을 바삐 스쳐가고 있었다.




한껏 솜씨를 발휘한 다진이의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었다. 할아버지는 저녁 연속극이 끝나자마자 주무시겠다며 방으로 들어가셨다. 늦게까지 하릴없이 수다스러운 토크쇼를 보던 우리 남매에게도 슬슬 졸음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시골의 밤은 도시의 밤보다 일찍 오는 모양이었다, 집에서는 이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시간인데. 다진이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나는 TV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방에 들어가서 자.”


씻고 나온 다진이가 TV를 끄고 내게 말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다진이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마찬가지로 할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다진이를 향해 말했다.


“오늘은 그냥 네 방에서 자.”

“그러면 누나는 어디서 자고?”


다진이의 물음에 나는 아주 순진하게,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랑 같이 자면 되지.”


다진이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때 다진이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은 정말 볼만했었는데, 나중에 언젠가 내가 다진이에게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그랬다고 아쉽다는 듯 말하자 다진이는 내 표정도 만만찮았다고 투덜대며 말했다. 아무튼 다진이는 곧 “됐거든?”하고 콧방귀를 뀌며 할아버지의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사실 반쯤은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그렇게 단칼에 거절당하고 나니 어쩐지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마루에 혼자 남겨진 나는 약이 올라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찐따 자식!


“시끄러워, 할아버지 주무시잖아.”


볼륨을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나를 혼내며 다진이가 방문을 살며시 열고 마루로 나왔다. 할아버지께서 주무시는 방의 문을 닫는 다진이의 손에는 얇은 이불과 베개가 들려있었다.


“코 골면 마루로 쫓아낼 거야.”


그렇게 말하며 다진이가 먼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마루의 불을 끄고 방으로 쪼르르 따라 들어갔다. 다진이는 바닥에 이불을 대충 깔더니 그 위에 벌러덩 드러눕는다. 나는 전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더워? 선풍기 켤까?”


어둠 속에서 다진이가 물었다.


“아니, 별로 안 더워.”

“문은 열어놓고 잘게, 답답해.”


다진이는 몸을 일으켜 방문을 활짝, 열어둔 후 다시 자리에 눕는다. 고요한 밤의 정적이 기분 좋게 방안을 가득 메웠다. 다진이의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렇게 다진이랑 같은 방에서 자보는 건 거의 15년 만인 것 같다.


“생각해봤는데, 네가 나보다 훨씬 요리를 잘하는 거 같아.”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불쑥 다진이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진이도 자지 못하고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내가 누나보다 요리만 더 잘하는 줄 알아?”


나는 천장을 보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다진이는 요리랑 청소도 자기가 더 잘할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조금은 잠이 묻어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나는 아예 다진이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어디 그뿐이야, 연애도 나보다 더 잘하잖아?”


장난기 어린 내 말에 다진이는 귀찮다는 듯 “뭐야, 헛소리하지 마.”하고 투덜거렸다.


“예쁘더라, 다음에는 꼭 정식으로 소개시켜줘.”


다진이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뭐야, 너 부끄러워서 자는 척하는 거지?”


하지만 많이 피곤했던 걸까, 다진이는 정말 금방 곤히 잠들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나도 잠을 청하기 위해 똑바로 누웠다.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려본다. 그 사람에게는 결국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다진이가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몇 번이나 답장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지만, 도무지 뭐라고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내 답장을 조금은 기다리고 있을까? 나한테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나는 왜 연애 안 해?”


잠든 줄 알았던 다진이가 태연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내 머릿속을 다진이에게 모두 들켜버린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미처 생각의 필터를 거칠 겨를도 없이 질서 없는 말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그보다 너 안 잤어? 갑자기 웬 연애 타령이야? 자는 줄 알았잖아? 이 찐따야.”


다진이는 잠자코 나의 호들갑스런 수다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입을 다물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지난밤과 단 0.1g도 차이가 없는 목소리로 무미건조하게.


“그 정도면 할 만큼 했어.”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식의 말투였다. “뭘?”하고 나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냥, 이것저것.”


얼렁뚱땅 얼버무리려는 다진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의미야?”하고 평소보다 한 옥타브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진이는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노처녀로 늙어 죽을지도 몰라.”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은 어느새 천장의 벽지 무늬를 따라 읽고 있었다. 그리고 다진이의 말을 들은 순간, 그 무늬들은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너야말로 엉뚱한 소리 하지 마.”하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진이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지? 그만 자자, 졸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눈 후 억지로 잠을 청해 본다. 하지만 정말로 오늘은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그 정도면 할 만큼 했어. 다진이의 목소리가 밤새도록 귓가를 맴돌았다. 빙글빙글 천장의 요란한 무늬와 어울려 춤이라도 추듯이.




새벽녘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던 나는 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학교 가는 거야?”


어제와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은 다진이가 어둠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응. 집에는 언제 갈 거야?”

“몰라, 보고.”


나는 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대답했다.


“수업은 1시에 마쳐, 알지?”


방을 나서며 다진이가 확인하듯 물었다. 나는 “응.”하고 대충 대답했다.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고 다시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커다랗게 웃기 시작했다.


“난 또 무슨 말인가 했네, 귀여운 녀석.”


내 동생은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가지 말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 아이였다. 나는 기분 좋게 다시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이상하리만치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아버지께서 어젯밤 먹고 남은 된장찌개를 막 가스레인지에 올려두신 참이었다.


“그래, 잘 잤냐?”

“제가 할게요, 할아버지.”

“그러련?”


된장찌개를 데우고 냉장고에서 밑반찬들을 꺼내 차리고 어설픈 솜씨지만, 계란말이도 만들어 놓자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할아버지와 함께 늦은 아침 식사를 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니 12시가 넘어있었다.


“집에는 언제 올라갈 거냐?”


할아버지께서 나갈 채비를 하시며 내게 물었다.


“오늘 가야 해요. 다진이 오면 보고 가려고요.”


챙이 넓은 모자를 쓰시고 장화를 신으시는 할아버지는 영락없는 촌부(村夫)의 모습이었다. 나는 대문 앞까지 따라 나가 논에 나가신다는 할아버지를 배웅해드렸다.


“그래, 집에 도착하면 꼭 연락하고.”

“네, 할아버지 추석 때 봬요.”

“오냐.”


할아버지의 멀어지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본 후 나는 집안 곳곳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구석에 박혀있던 옷들을 옷걸이에 걸고 제멋대로 쌓여있는 그릇들을 차곡차곡 찬장에 넣고 여기저기 흩어진 책들을 모두 모아 책꽂이에 꽂았다. 청소를 끝내고 샤워를 했다. 그리고 시계를 보자, 1시 10분이었다. 곧 다진이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누나!”


다진이가 마당 끝에서부터 뛰어 들어왔다. 나는 이미 짐을 모두 싸놓고 마루에 앉아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잘 다녀왔어?”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를 발견한 다진이는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너무나 솔직한 표정에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줄게.”


방금 전에 읍내에서 돌아온 다진이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또 버스 터미널이 있는 읍내까지 가겠다니, 오늘은 어제보다 더 햇살이 뜨거운데.


“커피 마실래? 요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거든, 그래서 커피는 자신 있어.”


나는 주전자에 물을 얹으며 물었다. 다진이는 선풍기 앞에서 땀을 말리며 “좋지.”하고 흔쾌히 대답했다. 커피믹스를 뜯어 컵에 부었다. 끓는 물을 조금 붓고 냉동실에서 얼음상자를 꺼내 얼음을 동동 띄운다. 커피 향이 솔솔 피어나자 나는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남자, 잘 들어갔을까?


“자, 마셔.”


다진이는 목이 말랐는지 커피를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아, 시원하다.”


다진이는 순식간에 커피 한 잔을 깨끗이 비워버렸다. 나도 얼른 남은 커피를 마시고 컵을 씻어 엎어놓았다. 다진이는 내 가방을 자전거 바구니에 넣는다.


“가자.”

“정말 혼자 가도 괜찮은데.”


그러면서도 나는 다진이의 자전거로 걸어가고 있었다.


“또 발로 차면 버리고 갈 거야, 차지 마.”


다진이가 나를 돌아보며 무시무시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다진이의 어깨를 주먹으로 치며 “웃기고 있네!”라고 대꾸했다. 천천히 자전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뜨거운 햇살, 시원한 바람, 그리고 든든한 남동생.


“어느 방향으로든 일단은 가보려고.”


나는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사실은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하지만 두려웠다, 내 선택이 ‘끝‘과 맞닿아있을 것 같아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남자들이 떼로 달려들걸?”

“미친 거 아냐? 헛소리는.”

“누나한테 말하는 버릇하고는!”


이틀 동안 다진이와 지내며 비로소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다진이는 끝내 내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설사 ‘끝‘이 나오더라도,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적어도 동생에게 비겁한 겁쟁이로 보이진 않을 테니까.


“힘내, 누나.”


정말 오랜만에 듣는 다진이의 따뜻한 목소리였다.




pexels-adam-dubec-1595483.jpg ⓒ Pixels, Adam Du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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