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01x10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극곰 Nov 11. 2020

1. 나는 죽어가고 있는가, 살아가고 있는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10명의 사람이 모여 매일 101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합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함께 해온 친구, 대학 친구, 그리고 그들의 지인들이 모였습니다.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써내려가는 답변들을 읽는 시간이 너무나 신납니다. 미지의 사람들의 삶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거든요. 10여년 가까이 시간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의 새로운 면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잘 알아가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매일 답변을 공유하고, 2주마다 한 명씩 질문 하나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10명이 써 내려갈 101일간의 여행기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 매우 설렙니다. 모두에게 의미있는 여정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가끔씩 자다 몸서리를 치며 깰 때가 있다. '나는 언젠가 죽을텐데, 죽음 뒤에는 뭐가 있지. 엄마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그 상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면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앞에 나는 완전한 무력감을 느낀다. 애써 죽음이라는 생각을 지우며 다시 잠에 든다. 어릴 땐 나만 이런가 싶었는데 나와 같은 경험을 한 번씩은 해본 것 같아 위안을 얻었다. 집 서재 한 켠의 '메멘토 모리'란 책처럼 죽음을 늘 기억하라는 말의 의미는 알지만 나는 죽음을 잊은 채 살아가고 싶다. 늘 내일이 있을 것처럼 기대로 가득 차 살아가고 싶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간다는 행위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시간의 유한함 안에서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갈 것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하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그런 것 치고는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고 있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것도 너무나 많다.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끝장나게 잘생긴 남자와 농도 짙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하며, 머릿속에만 있는 수익성 제로에 수렴하는 사업들을 실행해보고 싶기도 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여행지가 수두룩하고 버킷리스트에는 작고 큰 무언가들이 쌓여만 간다. 읽고 보고 듣고 싶은 책과 영화들, 전시들, 공연들. 만나고 싶은 사람들. 내 생은 갈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내 의식 아주 깊숙이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결국엔 맞닥뜨릴 죽음인데 굳이 상기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숨을 쉬고 살아있는 것처럼 죽음이 곁에 늘 머물고 있다는 것은 상기시키지 않아도 느껴진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나이는 아니지만 한 해가 지날 때, 숫자의 앞자리나 뒷자리가 바뀔 때 원치 않아도 죽음의 발자국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서른을 맞이한 해는 더더욱 그랬다. 나는 벌써 삶의 3분의 1을 살았구나. 어쩌면 이미 반 정도는 산 것일지 모른다. 노인의 하루는 느리게 흘러가나 행위에 비례한 시간은 빨리 지나가니까. 행동과 사고가 느려지는만큼 청년이 하루 만에 해낼 일이 하루 혹은 며칠은 걸리지 않을까. 벌써부터 체력이 후달리고 만성 피로에 시달리며 20대의 젊음과는 확연히 달라진 무언가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 나는 분명히 죽어가고 있다. 점점 죽음의 가속도가 가팔라질테다.




심너울 작가의 단편이 떠오른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해 태어나기 전 유전자 조작을 통해 영생을 누리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누군가가 와서 칼로 찌르거나, 차에 치이지 않는 이상 암이나 심장병 같은 것들이 위협하지 않는 몸을 가진 주인공은 아주 망나니처럼 생을 영유한다. 미드 굿 플레이스에서는 천국에서 시간을 보낼만큼 보내던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영생과 이별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에 대입해보자면, 망나니처럼 살 것 같긴 하다. 세상을 가진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하고. 다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을 생각하면 영생은 저주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지겨울 것 같기도 하다. 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살아있다는 감각 또한 희미해지는 상태가 되어버린다던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가끔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은 순간들을 맞이하기를 기대한다. 물론 실제로 죽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죽음을 초월할 정도의 무언가를 맞닥뜨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죽음이 아닌 서로에게 머물러 있는 순간들 말이다. 죽음은 두렵지만 그래서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


'죽어가고 있는가,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무색하게 죽음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찬다. 매일을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으니 이 순간은 죽음에 대해 탐구해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작년 할머니를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다졌던 사람이다.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생의 허무함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했던 사람의 공백을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는 것으로 메우고자 했다. 


할머니의 죽음 이후 머릿속을 맴돌던 책 구절이다.

'물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변형될 뿐. 산화되어 재만 남는다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물질은 아주 작은 부분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한다.' 


내가 갖고 있는 목표의식 또한 비슷한 점이 있다. 내 이름을 알리고,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일들을 만들어내고, 내 목소리와 행위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던가. 결국 나의 목표들은 생 그 자체인 동시에 무형의 영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육체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갔지만 나의 정신적인 부분들은 계속해서 누군가의 곁에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실 남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것을 알 수조차 없는데 말이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런 방식으로 이겨내고자 하는 의식이 투영된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엄마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것 같다 말했다. 모든 세포가 깨어있던 시절의 영민함을 잃어가고, 몸이 삐그덕대는 나날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엄마는 그럼에도 죽음을 말하기보다는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한 고민이 더 깊다고 말했다. 삶은 유한하니 자신에 대해 더 깨우치고 모든 감각을 열면서 살기 위해 노력하자고. 명상도 꾸준히 하라는 말은 늘 그렇듯 함께였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 육체가 죽어가고 있음과 달리 내 정신은 온전히 살아감에 집중하고 있다. 모든 행위의 중심축은 죽음이 아닌 삶이다. 살면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맛보고 깨우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하루, 한 달, 일 년, 오지 않을지도 모를 그 너머를 계획하고 상상한다. 그 상상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지향적인 소비에 관심을 갖고 환경 문제에 분노하는 나, 더 나은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과 그런 일을 하기 위한 노력을 떠올리면 나는 상당히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에 대한 분노, 인간성에 대한 비관은 희망을 끊임없이 갈구함에서 비롯된다. 나의 삶만이 아닌 다음 세대와 동식물이 안전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돈 때문에 사람들이 컨테이어 벨트에, 용광로에 삶을 마감하지 않기를. 가장 아름다운 행성인 지구가 지구다울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차피 올 죽음이라면 나는 계속해서 죽음을 저 뒤로 밀어 두고만 싶다.(언젠가는 어떤 죽음이 좋을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싶다. 그리고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내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