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만 삽니다 Episode 1
근 1년간 시국이 시국인지라 집, 회사만을 반복하며 점점 집순이가 되었다. 평일이 지나 주말이 되면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넷플릭스와 함께 하는 삶이란, 치맥 뺨칠 만큼 달콤하다. 하지만 문득 여기에 취해있다간 내 인생 아무것도 남지 않겠다는 생각에 이번 주말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제주도, 여수, 강릉... 부산? 어딜 갈까 떠올리다 부산에서 멈췄다. 지금 회사에 입사하기 전 쉴 겸 떠났던 곳도 부산이었기 때문이다. '쉬러 갔었는데 또 부산으로 쉬러 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끌렸다. 굳이 표면적인 이유를 찾자면 이랬다.
1. 나는 장롱 면허다 → 대중교통이 편한 곳
2. 조용한 바다를 보고 싶다 바다가 있는 곳
3. 특이한 공간들이 좋다 이색 카페, 전시 등 볼거리 많은 곳
심지어 비행기만 저렴하게 잘 찾으면 KTX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1시간 만에 편하게 갈 수 있다. 부산에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모든 면에서 부합했던 최적의 여행지라 비행기표부터 끊었다. 왕복 75,600원에 결제한 비행기 티켓. 그게 여행의 시작이었다.
숙소는 바다 뷰의 오피스텔을 선택했다. 오피스텔에서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오늘의 집에 나올 법한 통창 있는 방을 찾았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살아보겠나. 그렇게 첫날은 하얀 이불을 덮고 귤을 까먹으며 5번도 넘게 본 <옷소매 붉은 끝동>을 정주행 했다. 창 밖의 해지는 바닷가를 구경하기도 하면서.
부산 오면 배달 어플 보는 재미도 있는데 올 때마다 서울에선 볼 수 없던 메뉴들이 업데이트된다. ‘김치말이 김밥’, ‘시래깃국’, ‘빼떼기 죽’, ‘구슬 떡볶이’, (서울은 찾아야 하지만) 분식집에 꼭 있는 ‘비빔만두’ 등. 서울에선 잘 먹지 않던 떡볶이도 부산에선 꼭 먹고 간다. 요즘엔 서울에도 통통한 가래떡 떡볶이가 종종 보이지만 부산에서 먹는 맛은 다르다. 기분 탓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아무튼 아침부터 떡볶이를 간단히 먹고 근처에 '해리단길'이 있다길래 밖을 나섰다.
'~단길'은 전국적으로 퍼져갔나 보다. 해운대의 '해리단길'에 이어 전포동의 '전리단길'도 발견했는데 이미 꽤 유명한 카페 거리였다. 해리단길에선 특별히 그 상권만의 특이점을 발견하진 못했고 특이한 벽화들이나 골목 구경하는 정도였다면 전리단길로 넘어와선 가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보고 싶었던 카페 두 곳이 전포동에 있어 넘어오게 되었는데 외국 같은 비비드한 컬러로 시선을 끌거나 7080 빈티지 느낌의 네이밍과 간판으로 호기심을 끌었다. 1년 반 전에 왔을 때보다 더 외국 스타일로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가보고 싶었던 카페 두 곳 모두 해외여행 콘셉트였다. 듀코비와 22게이트인데 듀코비는 미국 하이틴 영화에 나올 법한 고등학교를 그대로 구현해 냈고 22게이트는 만석이라 밖에서만 봤지만 공항 콘셉트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카페는 더 이상 앉아서 음료 마시는 공간이 아니다, 경험을 사는 곳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그 말이 현실로 와닿았던 순간이었다.
맨 오른쪽 사진은 와인숍 포도이다. 전날 한 디자이너가 소개하는 부산 핫플이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알게 된 곳인데 근처에 있어 가봤다. 정말 눈 돌아갈 만큼 다양한 와인이 있었고 와인 앱에서 평점 높은 와인들도 꽤 있었는데 배송까지 가능해 바로 세 병 사서 택배로 보냈다. (여기서 알게 된 시라는 내가 먹은 와인 중 제일 깔끔했다)
소품 숍, 빈티지 숍도 구경하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들'이란 전시도 있길래 잠깐 둘러봤다. 만원이 꽂힌 만 원짜리 잡초 '만스테라'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는데 돈을 파괴하여 만들었고 돈을 들여 만든 결과이기도 한 이 잡초는 쓰임 없고 의미 없는 작가의 행동과도 같다고 한다. 마치 나의 남는 것 없는 지나온 주말을 빗댄 것 같아 반성하면서 '앞으로의 내 주말은 조금이나마 유의미해졌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저녁엔 국물이 당겨 국밥 시켜먹고 산책할 겸 불빛 축제 구경을 했다. 이걸 왜 하는지 궁금했는데 한쪽 벽에 스토리가 적혀있었다. 과거 거북이들이 산란했던 구남로와 신라 진성여왕의 천연두를 치료해준 해운대 온천의 스토리가 접목된 빛 축제. 산책할 겸 쓱 둘러보는 정도로 괜찮았다.
출발할 때만 해도 목적지 없던 여행이었는데 어느새 차곡차곡 채워졌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온전히 하고 싶은 대로 이틀을 보냈다. 살수록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날이 적어지는 것 같은데 내 마음 하나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에게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었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이 대사를 듣고 '그럼 서울이 고향인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고향이 따로 있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마음의 고향을 만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언제든 쉬고 싶을 때 올 수 있는 편안한 곳. 내게 부산은 그런 곳이 된 모양이다.
- 2022년 1월 셋째 주 주말